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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의미를 둘러싼 투쟁



여전히 저질 시비에 시달리고는 있으나 오늘날 모든 계층을 망라하여 가장 많은 이들이 즐기고 경험하는 문화이며, 우리의 일상이자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대중문화. 여전히 우리의 의식 속에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법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관점을 대중들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인식은 지배계급이 엘리트와 대중을 계몽 대 야만의 이분법적인 구분을 통해 대중을 수동적, 야만적 집단으로 계몽과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중은 엘리트에 의해 조작되는 동시에 나름대로 대중문화 텍스트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주체들로서 그들 나름의 미학적 판단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있다. 지금까지 예술을 바라보는 미학은 전통예술에 기초해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기준일 뿐이며, 이는 서구의 비평가들이 낯선 동양의 예술을 야만으로 간주한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한 편견일 뿐이다. 대중문화 텍스트는 맥락과 층위(context)에 따라 다르게 수용된다. 모든 문화는 의미소통이며 의미작용이자 이것을 조직화하는 체계다. 한 문화 안에서 인간이 의미를 만들고 소통을 하고 조직화하는 것은 세계관의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므로 세계관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 문화의 헤게모니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이들은 그동안 우리가 낯익은 것들이므로 당연하고,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 왔던 모든 것들을 새롭게, 그리하여 낯설게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낯설게 읽기란 기존의 읽기 방식 또 이에 의존한 이데올로기와 제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부정의 읽기이며, 이런 작업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낯설게 읽기는 부정의 읽기이고, 동시에 창조적 해석이므로 기존의 의미(지배 이데올로기)와 투쟁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진보적 실천의 행위가 된다.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분법적 모순율을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데아는 이데아이고 그림자는 그림자였고 주체는 주체요 대상은 대상이었지,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요 주체인 동시에 대상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항대립의 사유체계 속에서 주체는 객체를 마음껏 해석하거나 변형시키면서 단지 주체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으며, 이성은 합리성의 이름으로 무지몽매함을 밝히는 대신 진리를 절대화하고 과학기술을 도구화했고 감성과 욕망을 최대한으로 절제시키고 억압했으며 스스로를 도구화했다. 인간이 우위에 서서 그의 의지와 편리대로 마음껏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 문명이었고, 제3세계는 문명인 서구에 의해 교화되고 근대화해야 하는 미개와 야만이었으며 여성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남성에 의해 끊임없이 개발되고 착취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대중과 엘리트의 관계 역시 그렇다. 대중은 무지하고 야만적이고 대중매체에 쉽게 조작당하는 우중이자 나름대로 주체성을 갖고 자기 앞의 세계에 대응하고 문화와 예술 텍스트를 주체적으로 읽는 수용자이기도 하다. 대중은 원자화하고 부품화하며 이질적, 고립적, 비조직적 개체이자 타자와의 강한 유대 속에서 삶을 구현하고 조직을 형성하며 공동체를 추구하는 구성원이다. 대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대상이자 지배층에 맞서 저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실천 집단이다. 대중문화가 저질이고 야만이란 것도 이분법적 편견이다. 중생과 부처, 주체와 대상 사이가 서열도 대립도 없이 평등한 것처럼 대중과 엘리트, 작가와 독자, 나와 타자라는 것도 둘이 아니며 하나도 아니다. 대중이 교양을 통해 자기를 계발하면 엘리트요, 엘리트라 할지라도 대중을 계몽시키지 못하면 진정한 엘리트가 아니다. 대중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읽기와 쓰기 능력을 통해 텍스트를 올바로 읽고 쓰면 엘리트요, 엘리트도 주체적인 읽기와 쓰기를 하지 못하면 대중이다.

문화는 억압인 동시에 해방이며 문화는 길들임과 동시에 부정의 행위다. 대중예술은 욕망을 추구하면서 욕망을 억압하려는 체제로부터 일탈한다. 예술이란 것이 현실을 넘어서 꿈을 꾸는 것이듯 대중예술 또한 현실의 굴레를 넘어서서 꿈을 꾸고 비전을 제시한다. 문화가 양가성을 갖듯 대중문화 역시 양가성을 갖는다. 대중문화에서 억압과 길들임, 해방과 일탈의 양면을 볼 때 대중문화는 올바른 위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텍스트를 바꾸면 현실은 전혀 다르게 변한다. 정직한 텍스트일수록 진정한 현실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텍스트와 현실 사이엔 ‘좁혀지기는 하지만 만날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이처럼 텍스트는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쓰는 주체는 자신이 가진 이데올로기, 세계관 등의 프리즘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선택한다. 그는 말 그대로 현실을 다시 존재(re-presense)하게 한다. 재현은 단순히 의미생산에 그치지 않고 당대 권력과 유착해 지식을 생산하고 그 지식은 당대 진실로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띤다. 재현은 본질적으로 정치성을 지닌다. 텍스트는 의미를 드러내는 만큼 감춘다. 신화는 사물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정화시켜 순결하게 만들고 그것에 자연적이고 영구적인 정당화(justification)를 부여하기에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신화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기만하는 신화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는 광고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중은 광고를 통해 주체로 호명된다. 그들의 삶이 실제로 중산층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소비양식만 그런 것인데 고급냉장고를 사용하고 고급요리를 만들고 있는 한 그들은 이미 중산층이다. ‘사이비 행복의식’ 속에서 계급갈등과 불만은 자연히 없어진다. ‘반역을 향한 동경’ 또한 사라진다. 결국 그들은 이 이미지에 취해 서민적 이미지를 낡고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지배층에 포섭된다. 가족주의는 다시 가족이기주의를 낳고, 가족이기주의는 공공성, 연대, 이타성 등을 제고하고 오로지 자기 가족만의 안일과 행복만을 추구하도록 한다. 권력은 우리의 일상에 자리한다. 권력이 일상에 자리하기에 이데올로기 또한 일상에 포개져 있다.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권력을 형성하는 요소는 ‘나이, 성, 지적 수준, 사회적 위상’이다. 구조는 주체를 통제하고 담론 또한 지배한다. 그러나 구조를 형성하는 것 또한 주체다. 일상에서 행해지는 짧은 대화 안에도 권력이 비늘처럼 겹쳐 있다. 나이, 학력, 성별, 사회적 위상, 자본의 소유 정도 등을 이용해 상대방에 대해 끊임없이 권력을 형성하고 이것을 확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권력이 강제되는 한편 권력이 있는 곳에는 항상 저항과 투쟁이 있다.

독자는 주체의 의도대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현실을 표상할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 읽고, 자기 나름으로 해독하여야 한다. 그리고 텍스트를 다시 써야 한다. 텍스트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수신자를 향하면서 담론으로 변하고 담론은 이데올로기를 품는다. 언어도 그렇지만 텍스트는 억압하는 습성을 가진다. 텍스트의 분석은 신화를 캐는 작업을 동반해야 하며 가장 적극적인 신화 캐기는 그 신화와 대항신화를 형성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다.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이들은 텍스트를 뒤집는다. 뒤집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파헤치고 텍스트를 다시 쓴다. 텍스트를 다시 쓴다는 것은 세계를 다시 창조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다시 쓰기는 텍스트를 단순히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신화에 조작되던 대상이 주체로 서서서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기호학은 바로 이 부분을 문제 삼는다. 기호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의미를 찾아 나선다. 기호학은 모더니즘 예술 못지않게 화장실의 낙서에도, 그리고 누벨바그 영화 못지않게 싸구려 에로비디오에도 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기호학이 사회의 모든 현상을 기호(sign)로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 ‘기호의 과학(science of sign)’이라면, 기호학의 관심은 어떤 문화가 더 ‘우아’하고 ‘고상’한가가 아니라 어떤 문화현상이 ‘더 의미 있는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저급문화’와 ‘고급문화’의 위계화된 구분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가 기호학을 방법론의 하나로 채택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인간에게 ‘의미’의 거부는 곧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와도 같다. 인간은 언제나 의미를 추구한다. 기호학이 ‘도처에 존재하는’ 문화현상 가운데 특히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대중문화가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며, 보편적 일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자아와 정체성이 어떤 극적인 계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펴 드는 신문 한 장, 그리고 습관적으로 시청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한 편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기호학은 상식과 충돌하고 지배적 담론을 불편하게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다는 것은 그 자체가 수많은 논리, 관습, 종교, 문화,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실천대중매체, 교육, 제도, 법률 등의 매개를 통해서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사회구조가 개인의 의식과 태도,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이렇게 개인의 의식 속에 내면화된 사회 구조는 다시 사회를 영속화하는 원동력이 되는데, 이러한 포괄적인 순환 과정이 곧 문화다. 결국 문화란 우리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이고, 따라서 ‘분석’을 요하는 텍스트가 된다.

권력은 그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영속화하는 데 기여하는 의미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물론 그들의 이익에 역행하는 의미와 즐거움은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으로 제시된다. 예컨대 남성지배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적으로’ 육아와 가사에 관련된 일을 맡기에 적합한 것으로 의미화된다. 기호학은 이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문제 삼음으로써 현실을 낯설게 보여주는 장치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을 ‘거짓말의 이론(theory of the lie)'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호학은 기호로 간주되는 모든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대상과 의미 있게 대체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기호가 될 수 있다. 기호가 특정 대상을 지시할 때 그 대상은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호학은 원칙적으로 거짓말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거짓말에 사용될 수 없다면, 역으로 이것은 진실을 말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이라크와의 전쟁(War with Iraq)’라는 기호는 얼핏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중동의 언론이 사용하는 ‘이라크 침략’이나 ‘이라크 학살’등의 기호와는 달리 ‘전쟁(war)’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이데올로기적 기호다. 그리고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와의(with)’는 ‘~에 대한(against/on)’과는 달리 두 세력의 충돌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처럼 제시한다. 실제로 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
이란 기호를 사용한 반면 알자지라 등 아랍계 언론은
“이라크에 ‘대한’ 전쟁”
이라는 계열체를 사용했다. 하나의 대상이 동시에 ‘민중해방’과 ‘민중학살’이 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구 하나는 에코의 지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진은 말없이도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대중매체의 보도 사진에는 언제나 ‘자상한’ 설명이 따라다닌다. 미디어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사진의 의미를 특정한 방향으로 한정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전쟁을 보도하면서 민간인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미군의 사진을 사용했을 때, 그 신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미군에 대한 특정한 의미와 느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독자들이 사진을 보면서
“미군들이 이라크 민간인들을 거지 취급하고 있다”
거나
“미국이 경제제재로 이라크 민간인들을 굶겨 놓고 이제는 사탕으로 환심을 사려 한다”
는 창의적인 해석을 하기를 원치 않는다. 따라서 신문은 사진의 의미를 차단하기 위해 밑에 글을 달아 그 사진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친절히 설명해 주려 한다.

기호의 둔갑술로 인해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평화의 사도’가 되기도 하고, ‘국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이 둘이 동시에 옳을 수 없다면, 어느 하나는 ‘대상을 갖지 않은 기호’, 즉 ‘거짓말’일 것이다. 기호를 통한 의미의 구성은 언제나 특정 입장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호는 그리 허술하게 자신의 허구성을 폭로하지 않는다. 이렇게 의미체계가 특정 개인 및 집단의 현실적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호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닌 물리적 실체이며 권력 관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기호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우리는 이야기의 세계에 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다루는 뉴스도 예외가 아니다. 뉴스 역시 항상 정해진 순서대로 정해진 이야기의 틀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소설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현실은 결코 그 자체로 이야기의 요소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뉴스가 사건을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하는 것뿐이다. 결국 뉴스란 사건을 이야기체로 내러티브화하는 작업이며, 이 과정에 특정한 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내러티브(narrative)란 항상 특정한 기술자의 입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건이 이미 예측할 수 있는 이약의 형식으로 재구성된다면, 뉴스는 사건보다 앞서 쓰이는 이야기인 셈이다. 뉴스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파업이 ‘불법’이고 ‘과격’하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울 것이라는 사실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익숙한 이야기’란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배이데올로기의 다른 표현이다.

현대사회에서 대중매체들은 이미 우리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기존의 읽고 쓰는 능력을 일컬었던 기존의 ‘리터러시(literacy)’라는 개념에는 이제 이미지에 대한 이해와 판단 능력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의미의 과학인 기호학이다. 사람들이 큰 문제의식 없이 수용하는 미디어의 이미지야말로 가장 효율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보도사진, 자연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처럼 들리는 음향효과, 그리고 영상 뒤에 숨어서 의미를 교묘히 조종하는 음악, 이들보다 더 좋은 거짓말의 도구가 있을까?

기호에 의해 생산되고 순환하는 의미체계는 항상 특정집단의 권력 및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행동을 ‘학살’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해방’으로 만들 것인지의 여부는 추상적인 언어유희가 아니라, 현실적 권력관계의 문제이며 물리적 이해관계의 문제다. 그리고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권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힘이란 곧 다른 사람들에게 듣기를 요구할 수 있는 힘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기호를 유통시킬 수 있는 능력이란 곧 ‘현실’을 이해하는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기호생산자들은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통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호를 통해 현실의 특정 부분을 강조할 수도 있고, 특정부분을 감출 수도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창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현실’이란 ‘저 밖의 세계’가 아니라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생산된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특정기호와 의미를 생산하고 전달한 자들에게만 책임이 있는가?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에 따르면, 기호가 사람들에 의해 해석되기 전까지는 기호가 아니다. 즉, 기호가 의미를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사용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곧 이 기호의 유통을 허락하는 행위인 동시에, 이 기호가 유포하는 의미의 생산과정에 협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특정 기호를 수용하는 것은 곧 이 기호가 제공하는 현실에서 살아가기로 동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매체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을 보자. 한국 사회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판검사는 ‘사실적’이지 못하다. 반면 전라도 사투리는 폭력배들에 의해 사용되면 ‘그럴 듯’하게 들린다. 파출부 아주머니는 충청도 사투리를 써야 제격이며, 연인 관계는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로 구분된 성역할을 재현해야만 로맨틱한 관계, 리얼리즘이 된다. 즉, ‘그럴듯함’이란 객관적 현실이 아닌 지배적 의미체계를 반영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다시 말해 ‘현실’이란 객관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사회에서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지배적 현실감(dominant sense of realism)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남자의 보살핌을 받아야 ‘여자다운 여자’가 되고, 지방색을 벗고 표준어를 써야만 멋진 인텔리가 될 수 있으며 ‘과격한’ 지하철 파업을 근엄하게 꾸짖어야만 ‘온건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라면 우리는 ‘비현실’을 지향해야 한다. ‘현실’이란 지배체제의 자화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현실’을 거부할 때, 사회의 변혁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제기, 즉 ‘의미를 둘러싼 투쟁’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