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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그들이 문 밖에 있습니다


1박2일간. 340여명 정도 되는 지역의 인사들을 인솔하고, 외부 시찰을 다녀오는 행사를 치렀습니다. 말은 인솔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상전 받들듯 모시고 다녀온 셈이죠. 고백건대 이런 일을 한 차례 치를 때마다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끼곤 합니다. 반(反)도스토예프스키적인 딜레마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러 사람들을 인솔하는 행사를 치르다보면 인간의 맨얼굴이 드러나는 기분이 듭니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한 개인을 사랑하고 이해하기는 어렵다는데, 저는 도리어 그 반대란 생각을 종종 합니다. 한 개인을 사랑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집단의 맨얼굴이 더욱 이기적이고 야만적이란 느낌말입니다.

이번 시찰단엔 고급 행정공무원부터 국회의원, 지역의 시민운동가들까지 두루 포함된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 일이다보니 뭐랄까요? 한 지역 사회의 내부가 실제로는 어떤 먹이사슬을 가지고 있고, 그네들이 어떤 의도와 구성을 통해 움직여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C.W. 밀즈의 "파워엘리트"를 책이 아닌 경험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계기라고 해야겠지요. 행정공무원은 국회의원이나 시의회 의원에게, 의원들은 시민운동가들에게, 운동가들은 언론인들에게, 또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직장상사들이나 자본가들에게 자본가들은 다시 행정공무원들에게 돌고 돌아가는 먹이사슬의 연쇄 속에 놓여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사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존공생하는 사슬 속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민운동가들은 행정관료, 정치인들과 적대적 공존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합니다. 입으로는 다들 시민을 말하지만 구체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시민에 대해서 그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입니다. 애초에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도 한 번 먹이의 연쇄 고리에 오른 뒤에는 처음의 의도는 간 곳이 없어지고 여기저기 자신들의 입장이 추가되고, 삭제되는 과정을 통해 마치 원래 이 고기가 어떤 부위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스팸처럼 뭉그러져 있기 십상입니다. 왜 80년 5월 광주가 있었고, 왜 87년 6.10항쟁이 있었는데 정권이 바뀌고, 새 세상이 되었는데도 정작 세상은 변하지 않은 걸까요? 왜? 그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 자체는 변화되지 않았으며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조차 그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민운동가들은 시민운동을 하기 위해 언론을 향해 해바라기하고, 언론은 그들의 주인인 자본가들의 지시에 따라 주목해줄 운동과 그렇지 않은 운동을 구분해줍니다.

뉴스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더군요. 박계동 의원의 몰카 사건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판단과 결정은 개방된 공식 행사가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인 폐쇄된 밤의 문화에 의해 결정됩니다. 밤의 문화에 한 패거리로 합류하지 못하면 낮에 일어나는 사건의 진실을 영구히 알 수 없게 되지요. 그래서 기자들의 중요한 취재의 대부분은 술자리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들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낙종하지 않으려면 술자리를 피하지 말아야하고, 시민운동가들, 정치인들, 자본가들이 낮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은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고, 밤의 술자리에선 이구동성으로 형님, 아우님 하면서 서로 어울립니다. 좋게 말하면 타협이고, 나쁘게 말하면 야합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도 실제로는 이 때인 것이겠지요. 서로가 적절한 수위와 명분을 찾아 조율합니다.

이른바 직업적 NGO들이 체제의 내성을 강화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민주주의라는 절차를 통해 획득한 정치적 정당성을 통해 4년 혹은 5년의 임기 동안 이루어지는 민주독재의 반복은 기존 체제에 늘 도덕성과 권위를 부여합니다. 대외적인 형식은 민주주의이나 내용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민주주의, 그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이며 세계의 대부분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다는 대의 민주주의가 처해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정부의 주인이 국민일 때, 민주주의가 집행된다고 하는 것이지 그것이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이고, 실질적인 내용은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민주주의에 불과하다면 민주주의는 다만 지배를 위한 명분 제공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광양에서 올라오는 길에 평택의 넓은 벌판을 보면서 실시간으로 날아오는 평택 대추리의 소식을 들으며 가슴이 뭉개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땅에서 반미 구호가 나온 지도 어느 새(1980년 12월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 30년이 되어갑니다만, 지역유지들 틈바구니에서 듣는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별반 바뀐 것이 없더군요. 미국은 여전히 세계의 경찰이고, 불량국가들의 핵개발을 미국이 막아주지 않는다면 세계의 평화는 지켜질 수 없다는 인식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그 앞에 썩 나서서 그 개소리를 집어치우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렇게 외치면 도리어 분위기 깨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우리 시대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죠.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하지만 제 느낌에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그 어느 경우에나 비극인 것 같습니다.

군이 투입될 것 같다는 전갈을 듣고, 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현실적인 인간인지라 군 투입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곽 경비 정도의 일이겠지, 실제로 진압 수준으로 강행 처리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정권이라면, 아니 어떤 정신 나간 정권이 광주항쟁이 있었던 5월에, 그것도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런 미친 짓을 하겠냐는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밤사이 군이 투입되고 26년 전 광주도청에서도 있어선 안 될 일이 2006년 5월에 보란 듯 똑같이 자행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의 현실 감각을 교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1987년의 경험은 도대체 무엇이냐? 87년의 경험을 통해 이 땅에서 두 번 다시는 국가에 의해 시민이 학살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군이 정치 일선에 나설 수 없으며, 나서는 일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이라던 우리들의 정치적 믿음은 다 무엇이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실이 미친 것이 아니라면 나의 현실 감각이 미칠 지경입니다. 분명 정부도, 정권도 이런 생각을 했을 텐데 저들이 겁도 없이 저런 일을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만용을 부릴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인기가 바닥을 치고, 도통 인기가 상승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평택 대추리 들판에 철조망을 쳐야할 만큼 절박한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국민보다 더 무서운 상전이 저들에게 있지 않고서야 그런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문 밖에 있습니다.

갈리아를 정복한 로마인들이 가져온 평화와 문명 속에는, 그들이 세운 대규모 공중목욕탕과 수로 밑으로 흐르는 학살당한 아이들과 여성들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세워진 거대한 공중목욕탕을 드나들던 이들은 학살당한 아이의 아버지, 능욕당한 여성의 남편이 아니라 로마인들과 손잡고 흐뭇한 미소를 짓던 갈리아의 유지들이었습니다. 그렇듯, 짓밟힌 땅 한반도에 골프장이 건설되고, 갈리아의 유지들이 로마식 공중목욕탕을 출입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듯, 이 땅의 총리와 국회의원들이 골짜기마다 학살 장소였던 한반도 곳곳에 미국식 골프장을 짓고 회원권을 나눠가지며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갈리아의 유지들이 로마식 목욕탕에 몸을 적시며 그들의 골수까지 로마인이 되었을 때, 이 땅의 지배자들은 한 번씩 라운딩할 때마다 마치 저 멀리 피켓을 들고 골프장 건설 반대 시위하는 이들을 게르만의 어두운 숲에서 반란의 깃발을 들어올린 야만인(바바리안)들처럼 쳐다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갈리아의 족장들이 부족의 젊은이들을 동원해 게르만의 반란을 진압하러 달려가듯, 이 땅의 지배자들은 용역 깡패를 동원해서, 전경을 동원해서, 끝끝내는 군대를 대동해서 대추리 벌판의 농민들을 진압하러 달려갑니다. 이 땅의 지배자들은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 중국 포위 전략의 일환으로 재배치되고 있는 한반도 미군기지 확장 이전 작업을 돕기 위해 대추리에 우리의 젊은 군인들을 동원합니다.

갈리아의 족장들이 비록 몸은 갈리아인의 것이나 마음과 정신은 로마인이었듯, 대추리 작은 분교에 헬기와 군대를 동원하는 그들은 비록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국민의 선택으로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갈리아의 족장들이 그러했듯 그들을 속속들이 지배하는 주인은 로마 아니 미국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조국의 실체는, TV에서 상업자본이 외쳐대는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이 아니라 미국입니다. 아니면 미국과 한몸이 되어 뒹구는 한국을 상상하는지도 모릅니다.

26년 전 광주의 피가 우리에게 알려준 교훈, 저들은 죽지도 않으며, 잠들지도 않으며 언제라도 기회만 있다면 우리의 목덜미를 물어뜯어줄 자세가 되어 있음을 잊은 것은 아닌지요. 87년의 패배로, 정권 교체로, 입으로만 진행되는 민주화로, 이제 그때 87년 항쟁의 주역들이 정권의 핵심이 되었으니까 라며 안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한 줌도 안 되는 기득권을 상실한 것에 분노하여 사학법은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빨갱이 칠을 하기 위해, 학교를 장악하기 위한 술수라고 주장하는 그들이 있고,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유연성을 강화해야 하고, 그것을 실시간으로 생방송해주는 그들이 있습니다. 마치 200여 년 전 산업혁명이 극성에 달했을 때, 농부들을 농촌에서 몰아내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로 전락시켰듯 지금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다시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몰아내 실업자로 내몰고 있습니다. 기술혁명은 산업생산력의 자리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우리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습니다.

나의 이 현실감각이 버르장머리없는 것이라면,
당신들의 그 현실감각은 도대체 어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내게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문 밖에 있습니다.

국민과의 합의 절차도 없이, 국민의 정당한 우려와 항의를 국가공권력을 동원해 자국민을 방패로 찍고,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는데, 국회에서는 한 목소리로 이를 한미안보동맹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추어올리는 이 현실, 나는 자칭 참여정부의 이 놀랍고도 용감한 행동이 그들의 진정한 주인이자 진실로 잘 보이고 싶은 주인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의 현실감각을 교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당신! 당신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미국이 아니냐고, 국민의 참여를 진실로 원한다면 이제 국민의 참여로 당신을 적으로 규정해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직면해 있는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지배자들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그것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의 주인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