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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유하 - 자갈밭을 걸으며

자갈밭을 걸으며

- 유하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재잘거리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밞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터럭만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나는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 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감
으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

나, 그대가 익숙해졌다.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대의 허접한 육신.
풍성한 유방.
작고 귀여운 유두,
굴곡진 허리.
풍만한 엉덩이.
비너스를 닮은 복부의 계곡.
나는 이기적으로 그대의 몸을 짓밟는다.

삶에 대하여 쉼없이 지저귀는 건 참새가 아니라 인간.
내가 그대를 짓밟는 것인지 그대가 나를 짓밟는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해는 이미 저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두려운 것은 낯선 것이 아니다.
낯선 그리하여 날선 세계의 경계가 작두처럼 푸르게 날을 세운.
세운 것이 어디 날 뿐이랴....
날밤을 세우고, 성기를 세우고, 사람들을 줄 세우고

나는 시인의 염치없음. 혹은 그 시를 읽으며 염치없어 하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자갈이 되어주길 꿈꾸었다.
이 시의 맹점은 "서로를 위해"라는 말에 있다.
자갈이 되려거든 혼자 되어라.
아니면 나 그대를 위해 자갈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댈 위해 사뿐히 즈려밟는 꽃이 될 기회를 포기한 이들의 사랑.
현대의 호사스러운 사랑은 더이상 누군가를 위해 일방적인 자갈이 되길
포기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갈이 되길 포기하고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 말한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이 시인이 끝끝내 배반 때리는 순간.
그가 두려운 것은 굳은 살이다.
낯익음.
뻔뻔함.
닳고 닳음.
사랑에 군살이 붙은 것이 결혼일까?
사랑에 굳은 살이 배인 것이 결혼일까?

나 그대를 위해 한 알의 자갈이 되긴 어려워도
나 그대때문에 굳은 살이 배이는 것은 참기 어렵다.
그 굳은 살은 무엇인가?
낯익음, 뻔뻔함, 닳고 닳음.
아니, 그렇지 않다.

그건 철면피하게도 사랑에 대해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다.
시인은 사랑이란 말을 단 한 번 말하지만
그것은 긍정의 사랑이 아니다.
자갈과 자갈이 부대끼며 깨지고 닳고 다는 데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며 깨지고 닳고 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극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두터워진다.

견딜 수 있으면 사랑이 아니다.
견딜 수 없어야 사랑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