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달력(calendar)의 종류와 유래

달력(calendar)의 종류와 유래
달력(曆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는 데 태양력, 태음력, 기상력으로 구분합니다. 이중 태양력과 태음력은 천문력(天文曆)에 해당하고 기상력은 지방에 따라 일어나는 차이가 큰 기후(기상변화)에 따른 것인만큼 일년 365일과 같은 식으로는 사용하는 역법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서기(西紀)력은 다들 아시고 있듯이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구분하여 기원전과 기원후로 말하여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입니다. 기원 0년,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그 날을 기점으로 하여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누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로마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13세가 이전까지 사용되어 오던 율리우스력(흔히 시이저 혹은 케사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율리우스 케사르'를 말하는 것입니다.)을 좀더 역법에 맞게 개량하여 새롭게 한 것으로 아랍(이슬람)지역의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역법(calendar)입니다.

태양력은 태양의 운행을 그 기준으로 만든 역법(曆法)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범람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나일강(江)이 범람할 때면 동쪽 하늘의 일정한 위치에 시리우스(큰개자리 α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냄으로써 생겨난 역법입니다. B.C. 18세기경 이집트인들은 1년을 365일로 하고, 이것을 30일로 이루어진 12달과 연말에 5일을 더하는 식으로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시리우스 별자리와 태양과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관측하여 1년이 365.25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마침 이집트 원정을 떠나온 율리우스 케사르(케사르가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만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에 의해 채용되어 4년마다 1일을 더하는 윤년이 생겼고, 1582년 다시 1년의 평균 길이를 365.2425일로 하는 그레고리우스력에 인계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그레고리우스력에서는 4년마다 윤년을 택하되, 100으로 나뉘는 해는 윤년으로 하지 않고, 다시 400으로 나누었을 때 나뉘는 해는 윤년으로 하는 등 복잡한 역법이 이용된다고 합니다.(복잡한 수학 계산에 약한 바람구두 - 그레고리우스력( Gregorian calendar)이 채택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율리우스력이 365.25일을 1년으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차가 점점 더 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종교적 이유도 컸지요.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초기 시대에는 율리우스력(曆)을 쓰고 있었는데, 율리우스력에서는 오랫동안 누적된 역법상의 오차로 원래는 3월 21일이어야 할 춘분이 달력에서는 3월 11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춘분은 크리스트교에서 부활절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날이었으므로, 이 10일간의 오차는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결국, 교황은 각 교회와 의논한 끝에 1582년 3월 11일부터 20일까지를 건너뛰고, 즉 3월 10일 다음날을 3월 21일로 한다는 새 역법을 공포하였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사용되는 그레고리우스력입니다. 그레고리우스력에서는 윤년은 원칙적으로 4년에 한 번을 두되, 연수가 100의 배수인 때에는 평년으로, 다시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하고 있습니다. -설명하는 저도 헷갈리므로 그래도 잘 이해가 안되시는 분은 다른 분에게 물어봐주세요 - 이런 역법의 개정으로 1년은 약 365.2425일이 되고, 태양년(회귀년)과의 차는 불과 3000년에 하루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역법은, ① 1개월의 길이에 불합리한 차이가 있으며, ② 주(週)와 역일(曆日)을 맺는 법칙이 없고, ③ 연초의 위치가 무의미하며, ④ 윤년을 두는 방법이 번잡하다는 등의 결점이 지적된다고 하는 군요. 그래서 간혹 주변 어르신 중에 음력이 좋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태양력이 태양의 주기를 계산하여 사용하는 역법이라면 태음력은 당연히 달의 삭망(朔望)을 기준으로 하여 만든 역법입니다. 원래 명칭은 태음태양력인데 줄여서 흔히 태음력이라고 합니다. 태음력은 달이 29.53059일(1삭망월)을 주기로 규칙적으로 차고 기우는 데서 자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역법은 태음력으로 출발하여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 또는 태양력으로 변모해 가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런 태음력이 아주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죠.(이유는 농업이나 어업 등에서 긴요하게 사용되는데 그만큼 음력이 자연의 변화주기와는 좀더 잘 부합하는 면이 있습니다.)

중국의 연호와 우리 민족
이런 역법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앞서 말씀드린 서기가 서구의 크리스트교에 의한 달력이라는 종교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거부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 종교를 믿는 민족과 국가들이 그렇고요. 우리도 단군 왕검이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오신 날을 기점으로 삼는 단기(檀紀)가 있고, 부처님 오신 날을 기점으로 삼는 불기(佛紀)가 있지요. 그런데 이와 달리 연호(年號)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이 연호라는 것은 대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나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제 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원호(元號) ·다년호(大年號)라고도 한답니다. 중국에서는 원래 건국기년(建國紀年)이라 하여 그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 기간에 따라서 해를 세었습니다. 초기에는 특별한 명칭의 연호는 없었고, 새 군주가 즉위한 이듬해를 그 원년(元年)으로 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주(周)나라 때인 B.C. 114년에 이르러 이 연호제도가 정비되어 1원을 건원(建元), 2원을 원광(元光), 3원을 원삭(元朔), 4원을 원수(元狩), 5원을 원정(元鼎), 6원을 원봉(元封)이라 하여 이후부터 연호에 의한 기년법이 확립되게 되었습니다.(사마천의 『사기』/정범진 외 옮김/<까치>와 같은 책을 읽을 때 나오는 연도 표기가 그런 것이죠.) 따라서 건원이 최초의 연호가 됩니다.

이전까지는 각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 시기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측은 자신들에게 신속된 나라에게 복종의 의미로 자신들의 이런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지요. 고구려에게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강요하다가 이를 거부당하자 침략한 역사가 있습니다. 아마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 태종 때의 일인 것 같습니다.)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B.C. 391년부터 사용한 ‘영락(永樂)’이 문헌상 최초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신라에서는 B.C. 536년(법흥왕 23)에 건원(建元)을 최초의 연호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한나라 무제가 사용한 것이었고, 그 후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까지는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649년(진덕여왕 3)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게 연호를 따로 사용함은 부당하다고 하여, 650년부터는 당나라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후세인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에 의본한 것이라는 비판이 가능하게 된 이유 중 한가지도 당나라 군대의 힘을 빌린 것뿐만 아니라 이렇듯 중국의 연호를 받아서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편 옛 고구려의 영토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는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699년에 진(震)이라는 국호와 함께 천통(天統)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국호를 발해(渤海)로 고친 뒤 2대 무왕(武王) 이후 멸망할 때까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요새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태봉국(泰封國, 후고구려, 마진 등의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죠.)을 세운 궁예(弓裔)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궁예 자신이 스스로 4차례 개원하였습니다.(TV 드라마에서 '궁예'나 '견훤'에게 황제라는 칭호를 스스럼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이유도 이렇듯 별도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등극하여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4대 광종(光宗)도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말기까지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의 제후국을 자인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다가 청나라가 청 ·일전쟁에 패배하자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고쳐 개국 505년 1월 1일로 쓰면서 독자적으로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듬해 8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면서 동한(東漢:後漢)을 중흥시킨 광무제(光武帝)에 연유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였는데, 1910년(융희 4) 국권피탈과 함께 연호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잠시 동안 단기를 사용했으나 어느 사이엔가 단기도 점점 사라지게 되고 지금은 거의 일반적으로 서기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간혹 역사기행을 다니다보면 이름있는 옛 선인들의 비석이나 고승들의 부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비석이나 부도를 그냥 슬쩍 지나치시지 말고 거기에 새겨진 연호를 한번 확인해보시면 '유당(有唐) 신라(新羅)'이나 '유명(有明)조선(朝鮮)'이란 글귀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당나라에 속한' 혹은 '명나라에 속한' 이란 뜻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읽거나 말할 때마다 드는 생각 중 하나는 과연 '역사왜곡'이란 일본을 비롯한 몇몇 소인배 같은 나라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한국미술 5천년전(?)'이란 전시회가 기획되어 전세계적으로 우리 국보급 미술품이 해외 박물관들을 전전하며 전시되던 행사가 있었습니다. 국보급 보물들이 비행기에 실려 여기저기를 다니며 전시되는 행사는 일면 자랑스런 우리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린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만큼 우리나라가 세계에 알려진 바 적고 다른 나라와 민족들이 우리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사실 우리가 오죽 궁했으면 국보급 미술품들을 이렇게 위험스럽게 비행기에 실어 전세계를 찾아다니며 보여주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뼈아픈 우리의 현실이 있습니다.

저는 얼마전 83년도판 미국 사회교과서(아마도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사회과부도'인 셈인데)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거의 400페이지 이상되는 그 책은 전세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중 우리나라에 대한 내용이 몇 페이지나 있을 것 같습니까? (한 번 맞춰보세요.) 중국에 대해서는 50페이지 정도가 다채로운 사진, 그림과 지도 등으로 꾸며져 있었고, 일본의 경우에도 15페이지 정도가 할애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을 다루는 중에 반페이지 정도 나오더군요. 중국의 개방·개혁 정책 이후 우리 나라의 많은 학자, 지식인들이 동아시아 한·중·일을 논하며 앞으로 세계는 이렇게 동아시아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말들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측에서는 '동아시아'라는 말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시아는 그저 '중국'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극우적인 국수주의자들 말고 진정한 민족주의자가 있다면 현재의 이런 상황을 먼저 타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 이미지 제고'란 말을 요사이 많이 사용하는데 거기에는 바로 위와 같은 이유들때문입니다. '정명훈, 조수미, 정경화' 혹은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88 서울 올림픽'과 같은 것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기죽을 필요 또한 없습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한길사)를 읽으며 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마제국은 B.C. 8세기 무렵 건국되어 서기 476년(서로마제국 멸망)에 멸망하면서 전유럽과 지중해 인근 국가들을 로마화시켰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단순히 로마제국 1,000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로마 제국이 실제로 제국의 힘이 절정에 올라 그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나라들을 로마화시켰던 시기는 불과 몇 백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만(루마니아같은 나라는 국호 자체가 로마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국이란 나라는 비록 여러 국가들이 성립되었다가 멸망하는 흥망성쇠를 거듭하기는 하였으나 민족의 교체없이(몽고족, 만주족, 여진족의 지배는 사실상 지배라 할 수 없으므로) 5,000년 동안 동아시아 일대를 석권한 것입니다. 그 5,000년 역사 동안 점령한 적도 있고, 왕을 붙잡은 적도 있으나(결국 그렇게 잡은 왕 중에서 중국이 죽일 수 있었던 왕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결코 지배하지는 못했던 거의 유일한 나라와 민족이 바로 우리 민족이기 때문이지요.

지금 중국에는 거의 40여 개에 이르는 소수 민족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과거 중국을 지배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티벳과 같은 민족들도 현재는 중국의 사실상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런 점들에 비춰보았을 때도 우리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봅니다.(먼젓번 소식지에서 다룬 <이 한 권의 책; 김산 동지와 님 웨일즈의 아리랑>편을 보시더라도 당시의 중국의 사회주의자조차도 조선에 대한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01.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