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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남주 - 시인은 모름지기

시인은 모름지기

- 김남주

공원이나 학교나 교회
도시의 네거리 같은 데서
흔해빠진 것이 동상이다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나 이날이때까지
왕이라든가 순교자라든가 선비라든가
또 무슨무슨 장군이라든가 하는 것들의 수염 앞에서
칼 앞에서
책 앞에서
가던 길 멈추고 눈을 내리깐 적 없고
고개 들어 우러러본 적 없다
그들이 잘나고 못나고 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만해서도 아니다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삶인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는 돌아와 마을 어귀 같은 데에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의 눈이 쏠렸던 곳은 "시인은 그 따위 권위 앞에서 / 머리를 수그린다거나 허리를 굽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 다소곳해야 할 것은 / 삶인 것이다 "라는 구절이었다. 그만큼 나는 오만했었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여 비난하는 것만이 오만은 아닌 것이다. 나는 열심히 살지 않았는데 열심히 사는 척 했다. 오만이다. 나는 이미 진즉에 패배한 경험이 있었건만 여전히 버티고 서 있는 척 했다. 그것도 오만이다. 결국 다시 이 시를 읽을 때 나의 눈이 쏠렸던 곳은 "늙은 상수리나무로 서 있는 / 주름살과 상처자국투성이의 기구한 삶 앞에서 / 다소곳하게 서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 그것이 비록 도둑놈의 삶일지라도 /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 라는 구절이다.

특히 내 가슴을 송곳처럼 찌르는 구절은 "그것이 비록 패배한 전사의 삶일지라도"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시인은 그것이 비록 도둑놈, 패배자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 다소곳했던 것이다. 나는 과연 언제 다소곳했었던가. 알량한 서푼어치 지식으로 세상을 모두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늘상 알고 있다는 것조차 오만이다. 나는 그야말로 내 가슴 하나 온전히 세울 수 없는 오만덩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