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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오규원 - 한 잎의 女子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의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출전 : 오규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 시인선4. 문학과지성사, 1978>

*

세상의 모든 시는 기본적으로 연애시이고, 연애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소위 참여냐, 비참여냐, 순수냐, 참여냐로 나뉘어지는 시적 구분에서도 매한가지다.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모든 문학 작품은 세상에 말을 거는 행위이며, 말을 건다는 것은 세상의 조짐, 징조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그것은 내 마음 속의 심상을 끄집어내는 행위이고, 그것을 상대에게 건네는 것이다.  세상을 저주한다하더라도 연애하는 마음이 없다면 말을 끄집어낼 이유도 없다. 우리는 발화(發話) 순간에 이미 마음 속으로 모든 사람과 연애를 시작한다.

발화(發話)가 곧 발화((發火)인 셈이다.

시인은 물푸레나무의 한 잎사귀 같은 여자를 사랑했네라고 노래한다. 물푸레나무는 한국에서는 매우 흔한 나무다. 마을 뒷산의 야트막한 언덕에만 올라도 우리는 물푸레나무를 만날 수 있다. (물푸레나무란 이름은 물을 푸르게 만드는 나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나무의 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이 파랗게 변한다고 한다.) 물푸레나무는 북구의 신화에도 등장하는 나무인데, 오딘 신은 물푸레 나무로 남자를 만들고 오리나무로 여자를 만들어 각각 아스케, 엠브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니 나무 자체에서도 뭔가 신령한 기운이 있다고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시인 오규원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라는 이 시의 출전에서 전체적으로 여성의 이미지, '여자'란 말을 각별하게 사용하고 있다. 여자는 단지 성적인 개념으로의 여자만은 아니다. 오규원은 "가장 일상적인 女子가 女子스럽기는 하지만 결코 가장 女子다운 女子가 아니듯이, 가장 여편네다운 女子가 가장 아름다운 女子가 아니듯이, 詩 또한 詩다운 것이 가장 아름답고 생명있는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연하게도 여자를 하나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유독 이 시에서만큼 그런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여성 그 자체에 충실한 듯 보인다.

그것은 이 시가 연시(戀詩)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첫연에서 "~했네"라는 말로 이 여인이 과거의 여인임을 암시한다. 남자의 사랑은 이별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던가? 그럼, 그녀는 어떤 여자였을까? 그녀는 쬐그맣고, 맑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투명한 심성의 순결한 여인이었다(사랑에 빠졌을 때 남자들은 곧잘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환상을 사랑한다. 남성성의 핵심을 이루는 두 단어를 고르라면 난 틀림없이 '나르시즘'과 '피그말리온' 효과를 선택할 것이다).

그 여자는 여자만을 가진 여자인데, 그 여성을 규정하는 단어들은 눈물, 슬픔, 병신, 시집과 같은 것들이다. (아마도 시인은 차였나보다. 병신 같은 여자라니... 흐흐.) 이런 시어들을 통해 여인을 바라보는 시인의 감정이 매우 복합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집 같은 여자라니... 이 어인 뚱딴지 같은 비유일까? 오규원은 <용산에서>라는 시를 통해 "시는 곧 생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그렇다면 시집은 곧 인생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나름대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녀는 내 인생 같은 여자,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한 여인일 것이다.

떠나 보낸 여인에게 남성 시인이, 아니 남성이 할 수 있는 염원이란 어찌보면 고작 그런 것이다. 나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그러므로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인이 되길, 그래서 불행한...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청춘의 어느 시기에 우리는 사랑을 가슴에 품는다. 나이를 먹고, 몇 차례의 연애 감정을 반복하다보면(평생 한 번의 사랑 밖에 한 적 없는 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사랑의 스산함과 반복되는 지루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기지는 마시라. 안다고 좋을 것도 없는 법이니) 사랑이란 감정이 인간의 여러 감정들 중 특별할 것도 없는 감정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물푸레나무가 푸르렀던 시절에 우리가 그것을 알리 없다. 그래서 옛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껍질 벗겨진 물푸레나무의 푸른 기운이 어느새인가 흐르는 물 따라 사라지듯 그렇게 모든 사랑은 빛을 바랜다. 넌 아니라구? 그럼, 오죽하시겠어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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