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면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문학을 아름다운 우리말의 보고(寶庫)이자 보루(堡壘)라고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자어를 쓰고 있구나). 때때로 나는 문학, 특히 시(詩)를 빙산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것은 시라는 문학의 형식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이 바늘 끝처럼 첨예(尖銳)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스콜라학파 신학자들은 '바늘 끝에 과연 몇 명의 천사가 앉을 수 있겠는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하는데, 신학의 산술에 의거한다면 바늘 끝에 백 명의 천사도 앉을 수 있겠으나 시어의 정수리에 앉힐 수 있는 시어들은 시인이 깎고, 또 깎아내어 앉힌 것이므로 백척간두의 그것처럼 위태로운 언어의 세계에 백 마디 말을 앉힐 수는 없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뛰어난 예술이란 한 마디 더 보탤 것도 떼어낼 것도 없는 신의 작품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어의 위태로움이 빚어내는 장관이야말로 바다의 표면에 드러난 빙산의 일부만을 가지고 관객들로 하여 심연 가까이까지 내려앉은 나머지 부분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상업적으로는 오래전에 한계효용에 도달한 시라는 장르가 여전히 여타 문학 장르에 비해 우리들에게 우월한 장르로 인식되어 온 까닭도 사실은 상상의 여백을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시인 정양은 1942년 전북 김제 생이다. 어느덧 환갑도 넘긴 나이임에도 그의 시는 여전히 이제 막 여성의 성징을 띤 어린 소녀의 몸처럼 탱글탱글하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에 대한 그의 사랑이 시인의 몸, 언어로 만들어진 그의 정신을 탱탱하게 긴장시킨다. ‘부러워죽껏다씨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ESY > 한국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상병 - 내가 좋아하는 여자  (0) 2010/11/02
신동엽 - 진달래 산천  (0) 2010/11/01
조정 - 안좌등대  (2) 2010/11/01
김광규 - 달팽이의 사랑  (0) 2010/10/30
장정일 - 충남당진여자  (0) 2010/10/30
정양 - 토막말  (6) 2010/10/30
오규원 - 한 잎의 女子  (0) 2010/10/28
황동규 - 조그만 사랑 노래  (0) 2010/10/28
정현종 - 고통의 축제.2  (0) 2010/10/28
황지우 - 길  (0) 2010/10/27
마종기 - 성년(成年)의 비밀  (0) 2010/10/27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