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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곱씹어 읽는 고전

논어(論語)-<학이(學而)편>08장. 無友不如己者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가 말씀하길 “군자의 몸가짐이 장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지고, 그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논어』의 「학이」편 8장은 「학이」편 6장
“제자들은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하라. 행실을 삼가하고 믿음이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 이를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8장의 군자(君子)는 6장의 제자(弟子), 다시 말해 ‘학문하는 자’를 의미하고, “군자의 몸가짐이 장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어지고, 그 학문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不重則不威 學則不固).”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도록 하라(入則孝 出則弟).”에 해당한다.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主忠信 無友不如己者).”는 “행실을 삼가하고 믿음이 있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하라(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過則勿憚改).”“이를 행하고서 남은 힘이 있으면 글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行有餘力 則以學文).”와 서로 연결된다.

가정의 도리가 효제(孝悌), ‘정이 주가 되고 논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것(情主理從)’이라면 사회의 도리는 충신(忠信), ‘논리가 주가 되고 정이 그 뒤를 따르는 것(理主情從)’이라 할 수 있다.

子曰 主忠信 毋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가 말씀하길 “충성과 신의를 중심으로 행동하며,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 <「자한(子罕)」 24장>

「자한」 24장에서는 없을 무(無)를 말 무(毋)로 바꿔놓았을 뿐 같은 말이 반복된다. 이처럼 앞의 가르침이 뒤에서도 반복되는 경우는 『논어』에서 상당히 많은 편인데 특히 배움의 자세에 대한 공자(孔子)의 각별한 배려와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논어』는 기본적으로 스승인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통한 훈육의 과정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사실 「학이」 8장의 가르침에서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無友不如己者)”이다.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좋은 면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나의 허물을 고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술이(述而)」, 21장>고 했다. 공자는 자기만 못한 자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으니 스승으로 삼도록 가르쳤으나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가까이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공자는 어째서 그렇게 가르쳤던 것일까? 공자가 자기만 못한 자를 벗으로 삼지 말라고 가르친 까닭은 공자가 생각하는 ‘벗’의 의미가 단순히 동학(同學)의 의미가 아니라 동지(同志)의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안연(顔淵)」편 24장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以文會友 以友輔仁).”고 했다. 글이란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고, 뜻이 맞는 이들과 벗을 맺고, 함께 인을 돕는다는 것은 실천행위를 의미한다.

공자는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편(실천의 방식)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강조했다. 그러나 ‘효제충신’이란 것이 개인적인 실천의 방식이라 조금 부족했다고 여긴 탓인지 공자를 계승한 맹자(孟子)는 사회적인 실천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관자(管子)』에게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따온다. 맹자에게 있어 정치란 인(仁)을 실제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므로 유학자들은 당연히 정치인이자 관리였다. 도덕주의적인 담론만으로 통치에 임할 수는 없었기에 맹자는 관자의 구체적인 실천방식도 유학에 도입했다. 예의염치란 본래 관중의 말을 기록한(엄밀하게 말해 『관자』가 관중이 저술한 책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관자』 「목민(牧民)」편에 나오는 국가지도(國家之道)의 사유(四維)에 해당하는 말이다.

사유란 국가를 지탱하는 네 가지 도리란 말인데, 관자는 이 중에서 한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기울고, 두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위태해지며, 세 벼리가 끊어지면 국가가 전복(顚覆)되고, 네 벼리마저 끊어지면 국가는 멸절(滅絶)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첫째가 예(禮)이고, 둘째가 의(義)이며, 셋째가 염(廉)이고, 넷째가 치(恥)인데 이것이 예의염치(禮義廉恥)다. 관자는 예란 절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不踰節), 의란 벼슬(출세)을 쫓아 스스로 나아가지 않는 것(不自進), 염은 악을 숨기지 않는 것(不蔽惡), 치는 굽은(잘못된) 것을 좇지 않는 것(不從枉)을 의미한다. 관자는 물론 맹자 역시 법에 의존한 통치에 앞서 예의염치를 통해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고, 이를 통해 국가기강을 확립하고자 했다.

후세의 유학자들은 유학은 왕도(王道)의 길이고, 관자는 패도(覇道)의 길이므로 관자를 멀리하라 가르치고, 관자를 멀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지만 이것은 배울 수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배우라던 공자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 공자의 제자가 비록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 많은 중국에서 3,000명의 제자는 별로 많은 수가 아니었다. 노나라에서 죄를 짓고 발뒤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왕태(王駘)라는 자를 추종하는 자가 공자의 제자와 맞먹었다고 전해지고, 실존 유무조차 불명확하긴 하지만 공자의 최대 라이벌이었다고 할 수 있는 소정묘(少正卯, ?~BC 496)의 변설에 놀아난 공자의 제자들이 그에게 휩쓸려 안연만 빼놓고 모두 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누구나 차별 없이 가르쳤다. 당시 공자와 경쟁관계에 있던 제자백가(諸子百家)들과 공자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제자백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학설을 중심하여 가르치고 배우도록 하였지만 공자는 제자들에게 각종 서적을 가르쳤고, 각종 과목(六藝)을 널리 배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연은
“글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를 단속해주었다(博我以文, 約我以禮).” <「자한」, 10장>고 했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학파를 넓히려 하기보다 국가와 천하를 위한 인재양성에 본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후세에 이르러 유학(儒學)이 유교(儒敎)로 변모하며 유연함을 잃기는 했지만, 공자의 가르침이 2,500년의 시공을 초월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생한 가르침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기본적으로 그의 가르침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