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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정끝별 - 안개 속 풍경

안개 속 풍경

- 정끝별

깜깜한 식솔들을 한 짐 가득 등에 지고
아버진 이 안개를 어떻게 건너셨어요?
닿는 순간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하는
이 굴젓 같은 막막함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부푼 개의 혀들이 소리없이 컹 컹 거려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발 앞을
위태로이 달려가는 두 살배기는
무섭니? 하면 아니 안 우서워요 하는데요
아버지 난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바람 속에서는 바다와 별과 나무, 당신의 냄새가 묻어 와요
이 안개 너머에는 당신 등허리처럼 넓은
등나무 한 그루 들보처럼 서 있는 거지요?
깜박 깜박 젖은 잠에서 깨어나면
어느덧 안개와 한몸되어 백내장이 된
우우 당신의 따뜻한 눈이 보여요
덜커덩 덜컹 화물열차가 지나가요
그곳엔 당신의 등꽃 푸르게 피어 있는 거지요?
나무가 있으니 길도 있는 거지요?
무섭니? 물어주시면
아니 안 무서워요! 큰 소리로 대답할게요
이 안개 속엔 아직 이름도 모른 채 심어논
내 어린 나무 한 그루가 짠하게 자라는걸요!
나무는 언제나 나무인걸요!

*


시인의 유년시절을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를 찾아 묻고 있는 시는 아리다.

아버지는 경계에 놓인 비석이다.

이승과 저승
이상과 현실
추억과 몽상

성취되지 못한 꿈과 절망 사이에 무진 피어난 안개의 바다 속에 깜박이는 등대.

그것이 아버지다.
책상 깊이 감춰둔 등록금 고지서는 어미에게 들키고 싶지 않고
공책 사이 감춰둔 중간 보다 기말고사를 더 잘 본 성적표는 아비에게 들키고 싶다.
어미에겐 감추고 아비에겐 보여주고 싶은 것들, 그건 우리의 유년에서 언제나 아비가 어미보다 멀리 있던 탓이다.

‘당신에겐 언제나 잘 보이고 싶다’는 욕구는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 탓에 생긴다.
당신에게 위로 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가슴 짠하게...
당신의 부재(absence)를 증명한다.

아버지, 당신은 과거에도 지금도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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