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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해자 - 바람의 경전

바람의 경전

- 김해자


산모퉁이 하나 돌 때마다
앞에서 확 덮치거나 뒤에서 사정없이 밀쳐내는 것
살랑살랑 어루만지다 온몸 미친 듯 흔들어대다
벼랑 끝으로 확 밀어버리는 것
저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애비에미도 없이 집도 절도 없이 광대무변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허공에 무덤을 파는,
영원히 펄럭거릴 것만 같은 무심한 도포자락
영겁을 탕진하고도 한 자도 쓰지 않은 길고긴 두루마리
몽땅 휩쓸고 지나가고도 흔적 없는
저 헛것 나는 늘 그의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출처> 작가들, 2005년 겨울호(통권 15호)

김해자 :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제8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처장 부총장, 노동자잡지 「삶이보이는창」 발행인, 노동문화복지법인 상임이사 등 역임했다. 2007년 현재 중앙대 예술대학원에서 시창작을 강의하며, 장애인, 노동자, 사회운동가들과 더불어 예술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 <축제>가 있다.

*



시를 읽다가 눈을 감아본 것은 참 오랜만이다.
좋아하는 이 아닌 사랑하는 시가 나타난 것도 참 오랜만이다.
눈을 감고 시속으로 풍덩 빠져들기도 참 오랜만이다.
나는 시를 읽다가 문득 그 바람의 길목에 섰다.

저 안을 수 없는 것
저 붙잡을 수도 가둘 수도 없는 것
어디서 언제 기다려야 할 지 기약할 수조차 없는 것

너무나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눈앞에 깃발처럼 펄럭이는 통에
눈을 감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는 시를 만난 건 참 오랜만이다.
이건 내 이야기라고 감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를 만난 건 참으로, 참으로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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