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골국 끓이는 저녁

- 김선우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나를 향해 눈을 끔뻑이고
그러나 나를 보고 있지는 않다


나를 보고 있는 중에도 나만 보지 않고

내 옆과 뒤를 통째로 보면서(오, 질긴 냄새의 눈동자)
아무것도 안 보는 척 멀뚱한 소 눈


찬바람 일어 사골국 소뼈를 고다가

자기의 뼈로 달인 은하물에서
소가 처음으로 정면의 나를 보았다


한 그릇…… 한 그릇

사골국 은하에 밥 말아 네 눈동자 후루룩 삼키고
내 몸속에 들앉아 속속들이 나를 바라볼
너에게 기꺼이 나를 들키겠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몸속의 소


<아시아>, 2007년 봄호


*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

최승자, 허수경, 김선우는 내 연애의 대상이었다. 막노동판을 떠돌 때, 나는 최승자의 목을 비틀어 꺾으면 그 목에서는 이차돈의 흰 젖 같은 피 대신 시가 나오지 않을까 내심 상상했었다. 허수경의 거름이 될 수 있었다면 하는 안타까움도 품어 보았다. 이젠 더 이상 시인의 목을 꺽고 싶지도 않고, 거름이 되고 싶지도 않지만 때때로 김선우의 시를 읽는 일은 여전히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는 기분에 젖게 만든다.


언제부터 시를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읽은 첫 인문학 서적은 루소의 『에밀』이었고(우습고
, 촌스럽게도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읽은 첫(그러니까 본격적인) 문학작품은 김성동의 『만다라』였다. 불경하게도 나는 이 책을 막내 고모가 시집가며 버려둔 책장에서 훔쳐보았다. 『에밀』을 읽은 직후의 일이었다. 『만다라』를 읽으며 특정한 대목에서 내 어린 고추가 빳빳하게 성을 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만다라』에서 내 어린 고추를 성내게 했던 대목들과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들을 내 일기장에 비밀스럽게 옮겨 적었다.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동안 커져서 나오지 않는다. 병도 새도 다치지 않고 꺼낼 수 있을까.”


“정거장에만 오면 난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애. 모두들 목적지가 있는데 난 갈 곳이 없어.”


요즘 나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산문적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음과 양이 있고, 남성과 여성이 있다면 문장에는 운문이 있고, 산문이 있다. 나는 산문적 인간이다. 풀어내고, 풀어내고, 풀어내지만 결국 도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말문이 닫히는 것이 산문의 묘미(妙味)다. 운문, 즉 시가 문(門)이라면 산문은 벽(壁)이다. 모든 문은 닫혀있고, 닫힌 문을 열면 그 문 뒤에는 아무것도(空) 혹은 무언가(或)가 있기 마련이다(동양에서의 공이란 전무(全無)가 아니라 전부(全部)일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산문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동쪽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 가욕관(嘉峪關)까지 끝없이 끝도 없이 이어진 거대한 벽이다. 그 거대한 벽이 빙 둘러 가둔 것이 천하(天下)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벽 자체가 세상일지도 모르는 천하. 산문의 세계는 그러하다. 산문의 그릇에 담긴 것은 어쩌면 세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그릇 혹은 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나무를 쪼개 문을 짜고, 작가는 흙으로 그릇을 빚는다. 작은 그릇은 작은 그릇대로, 큰 그릇은 큰 그릇대로 그에 알맞은 세상을 담는다. 만리장성이란 그릇에 담긴 것이 천하라면, 때로 사골국물은 은하가 된다. 김선우, 그녀는 문을 열어 그것을 보여준다. 기꺼이 들켜준다.


자기의 뼈로 달인 은하물에서

소가 처음으로 정면의 나를 보았다


내가 김선우를, 아니 김선우의 시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잘 녹아들어 있는 시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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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