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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A/Res non verba

낸 골딘(Nan Goldin)



나는 조금 전 긴 복도에서 소독약 뿌리는 사내와 마주쳤다. 그는 긴 복도 회랑에 양철 소독통을 들고 복도의 양 옆 벽에 무색의 소독약을 뿌리며 나와 지나쳤다. 나는 이 글을 씀으로써 그를 잠시동안 기억하겠지만 그는 영국식 검은 군용 스웨터에 짙은 회색 목도리를 칭칭 감고 스쳐간 나를 아마도,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

몇 해전부터 열화당에서 새로운 사진집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시리즈로 열 권의 사진집 중 도로시아 랭과 유진 스미스, 가브리엘레 바질리코 등의 사진집을 새로 출간했다. 포장을 뜯고 집에 들고 가서 읽었다. 옛날 열화당 사진문고 시리즈에 비해서는 월등히 뛰어난 인쇄 질과 판형, 그리고 자세한 캡션들, 비평이 맘에 들었다. 그리고 인쇄잉크 냄새를 킁킁 맡으며 나는 신간들이 풍기는 예리한 냄새, 그것은 마치 추운 날 햇빛에 잘 내어 말린 빨래의 차갑고, 뽀송뽀송한 느낌 같은 것이다. 종이는 아직 손때가 묻지 않아 한국은행에서 갓나온 지폐처럼 빳빳하고,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미지의 사진들이 나의 시선을 교란한다. 

그리고 나는 낸 골딘의, 나는 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이 매우 낯익음에 대해 의아해 한다. 그 낯익음은 파리대왕의 작가. 윌리엄 제랄드 골딩 때문이었다. 이름 뒤에 g자 하나의 차이다. 낸 골딘의 사진집을 들고 복도를 서성이며 그녀의 사진들을 본다. 우선 그 풍부한 디테일에 놀라고, 놀라운 스냅샷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그녀의 포트레이트 사진조차 스냅샷의 기운이 느껴진다. 낸 골딘의 사진집을 보면서 오랫동안 업무 이외에 나의 즐거움을 위한 봉사는 그만 둔 카메라를 꺼내 다시 만지작거린다.


우습지 않은가.

낸 골딘의 사진을 보며 풍성하다는 표현을 하다니..... 친구의 성교 장면, 동성애자, 이성애자, 메마르고 때로 앙상하기 까지 한 인물들의 모습을 담아낸 그녀의 사진에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디테일을 말한다. 사진에서 드러나는 육신은 이미 인간의 몸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피사체.................. 사진이 만약 인간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면 사진은 다만 인간의 앙상한 육신을 담아 올린 요리 접시가 아닐까. 그녀의 사진이 풍성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영혼이 혹은 감정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진과 그녀의 인생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자살한 언니. 히피 생활. 나도 그런 생활을 염두에 둬 본 적이 있다. 되는 대로 자라난 수염과 빡빡 민 머리. 사람들은 거친 미소에 흠칫 놀라 뒤로 한 발씩 물러난다. 아니 그들은 물러나는 것이지만 내게는 그들이 밀려나는 것으로 혹은 물리치는 것으로 보인다. 높은 성은 그 높음, 위세당당함으로 인해 늘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공격 본능을 자극하지만 바닥에 푹 퍼진 더러운 오물의 진창은 그 낮음으로 인해 늘 사람들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방어하도록 만든다.

사람에게는 과연 희망이 필요한가? 아니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 아니라 환상인가? 환상이 필요한 사람은 환상이 허구임을 깨닫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것은 라 그랑드 일루젼이다. 인간은 필요하기 때문에 환상을 만들어간다.나는 환상이 깨질 때 비통해 하는 인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환상이 깨졌다고 자살하는 인간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는 또다른 환상을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또다른 환상을 따라 함께 뭉친다.

환상을 만드는 인간들이란 대개 간교하고 세속적이다. 그들은 잠시도 고통을 참지 못하기 때문에 늘 환상에서 다른 환상으로 끊임없이 이동해 간다. 마치 세렝게티 평원을 달리는 누 떼처럼..... 환상은 누떼가 생존본능을 따라 이동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생존본능이다. 그래서 희망은 늘 곤란하다. 그래서 희망에 환상이 덧 대어지면 종교가 된다. 그런데 소독약을 뿌리고 지나간 사람은 날 기억할까?

 


낸 골딘(Nan Goldin)은 뉴 다큐멘터리(new documentary) 사진으로 매우 유명한 사진가이지만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번이 사실상 거의 처음인 것으로 안다. 그녀의 사진에서 풍겨나오는 풍성함이란 사진 속의 피사체들과 하나의 삶 속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피사체는 그녀를 포토그래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하나의 풍경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사진이 담고 있는 풍경은 황량하나 그녀의 사진에서 인물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소독약을 뿌리고 지나친 사내는 날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그와 함께 십년째 소독약을 뿌리고 한집에서 거주하고  그의 생활 속 깊은 일부가 된다면 나는 그를, 그는 나를 기억할 것이다. 낸 골딘의 사진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