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2001)


『계몽의 변증법』은 인간을 계몽되지 못한 신화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도록 한 ‘이성(理性)의 힘이 왜 오늘날 도리어 야만상태로 인류를 몰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정리한 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 M.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어렵다는 평을 듣기는 하지만, 한 때 유행했던 포스트모던한 난해함과는 다른 성격의 어려움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읽는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첫째는 T. W. 아도르노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과 싸워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책을 읽는 것 못지않게 문장 하나를 읽은 뒤 요구되는 사유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어려움은 첨단 유행을 따지는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트렌드)와 싸우고, 두 번째는 한 차례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차분하게 띄엄띄엄 되새김질하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전으로 인정받는 대개의 책들이 그러하듯 『계몽의 변증법』 역시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읽기에 따라 사전지식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다. 내 나름대로의 독서체험에 따르면 신화학에 대한 공부가 사전에 어느 정도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이 책이 쓰이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종종 잊기 쉬운 『계몽의 변증법』 읽기의 한 방법이다. 오늘날 아도르노의 생각 혹은 아도르노에 대한 생각이란 점에서 후학들의 평가는 상이한 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난 2년간 이 책을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읽어야 하는 경험을 했다. 한 번은 신화학적인 입장에서, 다른 한 번은 문화연구(cultural study)적 입장에서, 다시 한 번은 문화경제(cultural economy)적 입장에서(이 책의 2장에 수록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에 대한 견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읽었다.

 

아도르노에 대한 평가의 변화 역시 우리 사회의 빈약한 지적 풍토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이는 이제 시대의 조류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 반대로 그의 중요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확실한 건 이렇든 저렇든 그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가이며 특히 문화를 학문적 틀 속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결절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1947년에 쓰인 이 저작이 현재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 이 한 권의 책을 두고도 후대의 학자들 - 노명우,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 아도르노와 쇤베르크』(문학과지성사, 2002년), 권용선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그린비, 2003년), 이순예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 계몽의 변증법에서 미학이론까지 아도르노 새롭게 읽기』(풀빛, 2005년) 등 - 은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서들을 펴내고 있으리라. 흔히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나치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끝에 펴낸 책이라고들 하는데, 그것이 옳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책의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하게 지적하는 부분 중 상당수는 그들이 미국 망명 생활 중 경험한,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중과 문화산업에 의한 대중문화에 기인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을 나치즘 못지않게 위험한 대중선동, 세뇌 장치로 인식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1920~1940년대 러시아 혁명 이후 출현한 소련의 스탈린과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등 비이성적인 전체주의 세력이 유럽 전역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념적 좌우를 막론한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전체주의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고,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나 좌파적 노동운동은 비이성적 세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노동자계급(대중)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하였고, 원자화된 대중사회는 결국 전체주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라는 용어는 마치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문화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위험 때문에, 그것을 대신하는 용어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문화 연구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에 걸쳐 주로 이루어졌는데 오락산업의 융성, 매스미디어의 급속한 발전,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문화조작, 미국에서의 영화산업과 음반 산업의 급속한 발전 등이 당시 문화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포만, 교만, 멸망을 의미하는 말로 코로스(kopos), 휘브리스(hybris), 아데(ate)란 말이 있다. 이 세 낱말의 사전적 의미는 코로스는 ‘죄가 많다', 휘브리스는 ’난폭하다', 아데는 ‘파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욕망을 추구할 때 저지르게 되는 죄가 휘브리스, 즉 ‘오만'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신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휘브리스를 범하는 자는 항상 가혹한 벌을 받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게 된다. 개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완전히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이 본질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주체(主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휘브리스(hybris)인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였지만 결국은 신들이 정한 운명에 따른 결과가 되어 버렸다. 성서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따른다고 지나치게 자신하고 있을 때, 신들이 애써 경고한 메시지를 거부할 때, 신들에 의한 운명은 역습을 가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만물의 근원은 신(神)에 의한 것이며, 신들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애니미즘이 사물을 정령화 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고 말한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목표를 추구해왔다. 노아의 홍수라는 자연 혹은 신의 징벌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간은 바벨탑을 세우려 했고,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죽음의 신 타르타로스를 쇠사슬로 묶었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혜택을 망각하고, 끊임없이 숲을 개간하고, 자연으로부터 얻은 사랑(자원과 기술)을 망각하고 욕보였다. 지식의 목표는 ‘방법’,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고 좀 더 많은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으로 변질되었다.

 

신성이 깃든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아주 멀리, 아주 높이 날아올랐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지혜를 얻고, 무리를 지어 기술을 전수했으나 이것은 자연과 더불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사회를 일구고, 자연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계몽의 합리성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인간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부정하는 탈신화화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어쩌면 계몽의 제물이 된 신화도 이미 계몽의 산물이었다. 신화는 모든 가르침의 출발이었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의 원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하늘 아래 더 이상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었던 인간은 자신들의 이성을 통해 이미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우쳤고,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으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신화가 죽은 것을 산 것과 동일시한다면 계몽은 산 것을 죽은 것과 동일화한다.(신화의 세계, 자연, 사물을 생명을 지닌 대상으로 취급한다면 계몽은 자연을 죽은 것으로 취급하여 이용과 정복의 대상으로 대한다.) 나는 아도르노의 이런 문제의식이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entropy)』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지리와의 합일을 도모하여 여기서 얻는 만족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적인 해방감을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400여 년 전 베이컨과 데카르트, 뉴턴에 의해 구축된 ‘객관적 지식이 있으면 인간은 자연계를 지배할 수 있다.’세계관(패러다임)을 통해 산업혁명이 가능했고, 끊임없는 성장과  한계 없는 진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리프킨은 문명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것을 제의한다.

 

“세상은 갈수록 혼돈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어서 여기저기서 끝없는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몰아 붙여 탓해 보아도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정치권의 리더나 누구 대단한 사상가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붕괴로 몰고 가는 냉혹한 기운이 세계를 잠식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세계관에 대해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세상을 병들게 하고 그 속의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바로 우리들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가한 이성에 대한 비판은, 신화에 대한 계몽이 그 자체로 신화가 되어버린 상황(파시즘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계몽에 대한 재계몽의 기획으로서의 비판(이론)이다. 비록 그가 제시한 사유 방식은 어둡기 그지없으나 우리가 그 길을 외면하는 것은 빛(enlightenment)을 보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아도르노,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사용하기 시작한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는 앞서 말했듯 대중문화의 생산 과정을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이전 세대의 연구자들은 문화를, 산업과는 별개의 혹은 산업과는 완전히 대립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산업이란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고도의 도구적 합리성과 관료제화한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된 물질적 기반을 그들 나름대로 분석하고, 이해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질화할 수 없는 것까지 시장 기능에 의해 사물화(reification)한다. 사용가치(소비자가 상품에서 얻는 효율성)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변형하고, 왜곡시키는 데 기여한다. 당시 출현하기 시작한 라디오와 인쇄매체 등의 매스 미디어와 광고의 결합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태(lifestyle)을 만들어냈고, 결국 자본주의 초기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자율성과 주체성은 상실되어 버렸거나 자본주의적(에 적합한) 주체성으로 변질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주장하는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문화의 상품화, 예술이 대량 상품화됨으로써 예술의 탈예술화, 즉 예술만의 고유한 자율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주장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이나 『예술의 비인간화』 등에서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하의 문화산업은 ‘교환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예술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완전히 대체해 버렸다. 문화산업은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따라 항상 동일한 것을 대량으로 제공한다. 그것은 계획, 통제되고, 예견 가능하며 계산 가능한 상품들만을 생산한다.

 

두 사람은 결국 예술이 문화산업의 메커니즘에 구속당함으로써 관리되는 사회의 총체적인 물화에 빠져든다고 보았다. 문화산업의 메커니즘 속에서 대량생산된 작품 아닌 열등한 상품들은 이전의 고유한 진정성을 지닌 예술 작품들을 모방함(이 과정에서 대량생산에 적합하도록 규격화)으로써 사회적 위계질서에 대한 복종을 조장하고, 이를 은폐한다(부자도, 빈민도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는다). 문화산업은 대중들을 사회의 총체성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기만하는 술책이며,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도록 길들인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이 현대의 대중문화가 지닌 도구적 합리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이 대중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자본주의의 허위의식을 주입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게 만든다고 본 비판엔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비판이론과 자율예술은 대중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들을 결집시킬 수도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논리는 반대중적 엘리트주의란 비판을 받게 된다. 이들이 바라보는 대중은 근본적으로 조작의 대상일 뿐이지 혁명을 추동할 수 있는 동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를 살다가 불운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발터 벤야민에게서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벤야민은 아도르노가 주목했던 문화산업에 의해 대량 생산된 복제품에 의해 상실된 진정성(authenticity), 아우라(aura)의 상실이 도리어 문화적 민주주의를 부추기는 기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스스로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문화산업을 통해 생산된 산출물에는 진정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가 예술작품으로부터 느낀다고 하는 진정성 역시 과거로부터 주어진 것(교육받은 것)이 아닌가? 대중문화에는 자율적인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가? 실제로 도시화와 대중문화로 인해 도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질서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창조되지 않았는가(E.P.톰슨)?

 

대중은 단순히 문화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며 그들 나름의 문화적 해독능력을 갖추고 있고, 우리들의 해독능력 역시 증가하고 있다. 즉, 창과 방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우리는 아직까지는 아도르노의 비관과 벤야민의 낙관 사이를 오가며 의지의 낙관에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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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