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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오세영 - 연(鳶)

연(鳶)

- 오세영

위로 위로 오르고자 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바람을 타야 한다.
그러나 새처럼, 벌처럼, 나비처럼 지상으로
돌아오길 원치 않는다면
항상
끈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
양력(揚力)과 인력(引力)이 주는 긴장과 화해
그 끈을 끊고
위로 위로 바람을 타고 오른 것들의 행방을
나는 모른다.
다만 볼 수 있었던 것,
갈기갈기 찢겨져 마른 나뭇가지에 걸린
연, 혹은 지상에 나뒹구는 풍선의 파편들,
확실한 정체는 모르지만
이름들은 많았다
마파람, 샛바람, 하늬 바람, 된 바람, 회오리, 용오름……

이름이 많은 것들을 믿지 마라.
바람난 남자와 바람난 여자가 바람을 타고
아슬아슬
허공에 짓던 집의 실체를 나 오늘
추락한 연에서 본다

출처 : 『학산문학』, 2008년 가을호(통권 61호)

*


오세영 선생의 시(詩)는 겉보기엔 늘 평범(平凡)하다. 어려운 시어(詩語) 선택이나 꼬여있는 비유가 없으므로 평범하다. 그러나 그 평범 속에는 늘 범접하기 어려운 비범(非凡)함이 숨겨져 있다. ‘연’이라는 누구나 볼 수 있었고, 어린 시절 경험해보았을 지극히 평범한 대상에서 끌어내는 성찰의 힘이다.


시가 늘 계몽의 서사나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이 평범한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가운데 얻어낸 성찰은 선사의 죽비처럼 날카롭게 정수리를 겨냥한다. 선생의 시 <연>의 깨달음을 한 마디로 응축한 말이 있다면 아마도 “滿而不溢”일 것이다.

居上不驕 高而不危(거상불교 고이불위)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높은 자리라도 위태롭지 않다.
制節謹度 滿而不溢(제절근도 만이불일)
스스로 절제하고 삼가하여 도를 넘지 않는다면
高而不危 所以長守貴也(고이불위 소이장수귀야)
높은 지위라도 위태롭지 않고 비로소 오래도록 존귀함을 유지하게 된다.
滿而不溢 所以長守富也(만이불일 소이장수부야)
채우되 넘치지 않도록 한다면 오래도록 부를 지켜나갈 수 있다.
富貴不離其身 然後(부귀불리기신 연후)
스스로를 귀하고 부유하게 만든 뒤에라야
能保其社稷 而和其民人(능보기사직 이화기민인)
능히 사직을 보전하고 만백성을 평안케 할 수 있는 것이다.
『효경(孝經)』, 제후(諸侯)편

“채우되 넘치지 않도록 한다”는 “滿而不溢”의 정신은 유교의 가르침에서 매우 중하게 여기는 것이라 주희가 그의 제자들과 편찬한 어린이 교육용 도서인 『소학(小學)』 내편(內篇) 명륜 장에도 실려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도 간다”는 속담처럼 어린 시절의 깨달음이 평생을 간다고 했는데 그 시절 유아교육을 받았을 숱한 유학자들도 결국 이 가르침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여 자신의 삶을 망친 것을 보면 “채우되 넘치지 않는다”는 자기 절제와 중용의 미덕은 그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공자(孔子)조차 “吾未見好德 如好色者也(내가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는 것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추락한 연의 잔해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위로 위로 오르고자 한 가닥 남은 줄마저 끊어내려 하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