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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곱씹어 읽는 고전

논어(論語)-<학이(學而)편>13장. 信近於義 言可復也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가 말하길 “믿음을 지키는 것이 의에 가까우면 말이 바뀌지 않을 것이며 공손함이 예에 가깝다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까운 이를 잃지 않는다면 가히 존경할 만하다.”

신영복 선생은 『논어』를 인간관계론의 보고라고 하였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어 인(人)이란 말 자체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에서 온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인간(人間)이란 한자어 자체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사람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며 혼자라는 것은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라는 영화가 있었다. 한동안 한국의 역대 흥행 영화 랭킹 1위를 할 만큼 당시로는 최고의 흥행성적을 올린 영화였다. 험난한 근현대사를 거친 탓인지 자본주의의 물질만능주의 한구석에서 숨 쉴 틈을 찾고자 했던 대중의 욕망 탓인지 몰라도 어느 때인가부터 조직폭력배(조폭)가 ‘의리(義理)’의 대명사처럼 떠올랐다. 전도된 가치는 전도된 언어를 만들어 내는 법이다.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의리와 조직폭력배의 의리 사이에는 사실 어떤 상관관계도 찾을 수 없으며 실제로는 정반대의 의미 체계를 지녔지만 남성중심 사회의 가치관, 군사문화의 폭력성에 잔인하게 오래도록 노출된 사회에서 의리란 자신과 친한 사람의 뒷배를 보아주는 일 정도로 오도되었다.

『중용(中庸)』 20장에 나오는 말이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義者宣也 尊賢爲大, 親親之殺 尊賢之等 禮所生也.

어짊이란 사람이다. 따라서 친한 사람(친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으뜸이고, 의리란 마땅함이니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이 으뜸이다. 친한 이와의 관계나 어진 사람을 높이는 데 있어서 순서를 정하는 것이 예가 생겨나는 바탕이다.

위의 말을 다시 풀어보면 어질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가까운 이들부터 시작해 주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그러나 어질다보면 자칫 인정에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인정이 아니라 마땅함을 추구해야 할 때가 있다. 인정에 이끌리지 않고, 그 어짊을 끊어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짊을 끊어내고 마땅함을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의리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았을 때 조직폭력배나 자신이 속한 집단에만 충성하여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도리에 눈감는 것은 의리가 아니란 말이 된다.

유자의 말은 벗 사이에 혹은 인간관계에 있어 믿음(信賴)란 이 같은 의(義)에 바탕을 둘 때에만 비로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며 자신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禮)법에 따라 부족하게도, 과도하게도 하지 않으려 한다면 스스로를 욕보이거나 상대를 욕보이는 일이 없을 것이란 말이다.

「학이」 13장은 사실 이처럼 어려운 구절이 없지만 생각 밖으로 마음을 정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내 입장에선 어차피 한학(漢學)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다른 이들의 뜻풀이를 참고하여 거기에 내 나름의 공부 결과를 덧붙이는, 말 그대로 ‘述而不作(술이부작)’하는 처지에 불과한데 거기에서 마음을 정하는 것이 무엇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역시 고집스런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다.

애 먹인 구절은
“因不失其親 亦可宗也”란 구절인데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인(因)’을 ‘의지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그러할 연(然)’과 같은 뜻으로 풀어서 이해할지의 문제와 ‘종(宗)’을 받들어 모시는 것으로 할지 아니면 으뜸이라는 식으로 풀어야 할지에 대해 입장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因’을 의지하는 것으로 풀면 ‘의탁함에 있어 친함을 잃지 아니하면 또한 받들어 모실 수 있다.’라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정도로 해석하면 앞서의 풀이로 볼 수 있다. 한자 해석 자체의 본래 뜻은 어차피 내 몫은 아닌 듯한데, 전체적으로 뜻이 무난하게 잘 통하는 것은 ‘因’을 의지하는 것으로 보는 것보다 어조사 정도로 생각하여 푸는 것이 낫다 싶어 저렇게 풀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