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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발은 피곤하지만 내 영혼은 편안하다 - 로사 파크스


영어사전에서 'black'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신 적이 있는지요. '검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black'은
'음산한, 침울한, 화가 난, 험악한, 심사가 고약한, 사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등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 'black'이 접두사로 사용되거나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용례까지 살펴보면 'black'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 중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white'의 의미는 '희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결백한, 순진한, 오점이 없는, 악의가 없는, 정직한, 공정한, 훌륭한' 등의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 같은 이는 "화이트와 블랙은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선(善)과 악(惡), 희망과 절망의 상징이었습니다."라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로사 파크스는 미국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 번화가에 있는 법원 광장에서 버스에 올랐다. 백화점 양복 코너에서 일하는 로사 파크스(Rosa Parks, 당시 42세)는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고, 이제 막 퇴근하는 길이었다. 그녀의 다리는 퉁퉁 붓고, 잔뜩 지친 몸으로 버스에 올랐다. 알라바마주의 모든 대중 교통 수단에는 백인 전용 좌석과 유색인종 전용 좌석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로사 파크스는 서 있는 백인이 없을 때 흑인들이 앉을 수 있는 중간 줄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로사 파크스는 밀려오는 피곤함을 견디지 못해 자리에 앉자마자 금세 잠이 들었다.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로사 파크스는 자신을 깨우는 거친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떠야 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백인들이 올라탔고, 백인 좌석이 모두 차서 백인 남자 하나가 서 있어야 했다. 운전사 제임스 블레이크는 파크스가 앉은 줄의 흑인 네 명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가라고 말했다.
깜짝 놀라 눈을 뜬 로사 파크스가 주위를 둘러보니 백인 전용석이 이미 꽉 차 있는 가운데 백인 한 명이 자리를 잡지 못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백인 버스 운전사가 파크스를 쳐다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어이, 깜둥이! 어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란 말이야!"

운전사의 욕설이나 다름없는 고함소리를 들은 파크스의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고,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로사 파크스가 당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리라 생각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 몽고메리에 거주하고 있는 흑인들에겐 매일매일이 시련이었다. 버스 뒷자리를 강요당하는 것쯤은 모욕의 범주에도 들 수 없는 것이었고,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추가요금을 내야했다. 그리고 버스 앞문으로 요금을 내고는 다시 내려서 뒷문으로 올라타야 했다. 악질적인 버스 운전사는 그렇게 요금을 내고 뒷문으로 올라타려는 흑인 승객을 버려 두고 출발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로사 파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하기 불과 며칠 전에도 버스 운전사가 맹인인 흑인 남자를 문에 끼운 채 거리를 끌고 다닌 일도 있었다. 운전사들은 흑인들에게 종종 폭력을 행사했고, 사소한 말다툼 끝에 흑인 승객에게 총을 쏜 경우도 있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파크스는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크스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파크스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자, 분노한 운전사는 버스를 경찰서 앞에 세웠다. 버스에 올라온 경찰관들은 로사 파크스가 '인종분리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한다.


로사 파크스가 '인종분리법' 위반 혐의로 체포 구금되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수많은 흑인들에게 옮겨졌다. 남북전쟁을 통해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흑인들에게 찾아온  변화란 것은 농장 노예로부터 사회의 저임금노동자로의 변화 이외의 아무런 권리도 얻지 못했다. 파크스는 전국흑인지위향상협회의 회원이었고, 자신의 법정 소송을 통해 흑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문제를 공론화하려는 용기를 냈다. 로사 파크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나의 존엄함은 그 어떤 법보다 중요하다"라고 외쳤다. 그녀에겐 또 하나의 죄목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법정모독죄'였다. 흑인들은 다음날부터 버스를 타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리 먼길이라도 걸어 다녔다. 그 때문에 자가용을 갖지 못했던 흑인들을 주요 대상으로 해서 영업을 해왔던 버스 회사들은 수익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상대로 더욱 심한 탄압을 계속했다. 하지만 흑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흑인들의 버스 승차 거부운동을 이끌며 명성을 높이게 된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그는 27세로 당시 몽고메리주 덱스터 침례교회의 목사로 있었다.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해 몽고메리시의 유력한 흑인 목사 19명이 모여 로사 파크스의 공판일이었던 12월 5일부터 버스 보이콧을 전개하자는 성명서를 냈다.

"우리는 마침내 굴욕적인 태도로 버스를 타느니 존엄을 지키며 걸어 다니는 것이 훨씬 훌륭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혼을 혹사하느니 다리를 혹사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우리는 몽고메리 시내를 걸어 다니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쇠약해진 불의의 벽은 밀려드는 정의의 망치에 두들겨 맞아 허물어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흑인들이 이 호소에 응해 버스 승차를 거부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12월 5일 월요일 아침. 버스가 여느 때처럼 정류장에 멈춰 섰지만 흑인 중 버스에 올라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계획했던 이들조차 기껏해야 60% 정도가 응해주면 성공이라고 예상했지만 거의 100%가 버스 승차 거부 운동에 동참해준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걸어서 출근했고, 학교에 갔다. 거리는 걸어 다니는 흑인들로 가득했다. 이런 흑인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놀란 알라바마 법원 당국은 파크스의 즉결 재판에서 시가 조례로 정한 '인종분리법'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하고 벌금 10달러와 재판비용 2달러를 지불하라는 가벼운 판결을 내렸지만 파크스는 이를 거부하고 항소를 제기했다. 파크스는 결코 굴복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1955년 12월 5일부터 시작된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은 단지 그날 하루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일 걸어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흑인들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차량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목적지까지 운송하는 방식으로 카풀제를 만들어냈다. 직장이 같은 방향인 사람들을 태웠고, 하루종일 카풀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카풀을 이용하기보다는 걸어다녔다. 자신들이 항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56년 11월 흑인들은 여전히 버스 승차를 거부하고 있었고, 카풀 제도는 흑인들의 충실한 발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11월 13일 법원은 카풀 제도를 금지한다는 임시 명령을 승인해주었고, 흑인들은 더 이상 카풀제도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12월 20일. 마침내 버스 내 인종분리 정책을 금지하는 명령이 미 연방 최고 법원의 판결로 확정되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382일간 계속되었던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의 결실이 거두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흑인들의 승리는 단지 버스 내 인종분리 정책이 금지되었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버스 승차 거부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켰고, 승차 거부 운동의 목표가 달성되는 그날까지 자신들이 일사분란하게 조직적인 집단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미국 내 백인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에게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일주일에 5달러도 못 버는 사람들이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1달러씩의 성금을 냈다. 이 운동에 동참했던 머더 폴라드는 이렇게 말했다.
 
"발은 피곤하지만, 내 영혼은 편안하다."
<2002/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