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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A/문화망명지의 테마

대문 - 2003.11.26.


어느새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어쩌면 실제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들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핵폭탄 하나쯤, 핵미사일 하나쯤 이미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화가 이현세가 겉으로는 반군국주의를 표방하며 발표했던 "남벌(南伐)"이 1994년, 이때 이미 우리들은 마음속으로 일본을 핵공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이현세는 일본에게 모두 12조의 항복문서를 받는다. 그 중 일부만 소개해보면 "<제8조> 독도와 그 반경 200해리를 완전한 한국영토로 인정한다. <제10조> 경도 130도에서 140도상, 위도 345도상의 바다를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할 것을 명문화하고 이를 전세계에 통보한다. <제11조> 방어적 개념 외의 자위대 군사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일 년에 한 번씩 한국 측의 공식 사찰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남북한이 합동으로 일본을 공격(공격의 내용 중에는 핵공격도 포함되어 있다)해 항복을 받아낸다는 만화의 내용은 심정적 좌우익을 막론하고 대중의 혐일 감정에 편승해 화제가 되었고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만화가 이두호 선생은 "상처 입은 우리 민족에 대한 비틀림을 바로 잡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고, 김태흥(독도수호 및 일본교과서 왜곡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추천사를 통해 "청소년들에게는 자부심과 희망을 주고, 다시금 침략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에게는 준엄한 경고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보다 조금 앞서 1993년엔 이휘소 박사의 이야기를 드릴러물로 변부한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3백만부가 팔려나갔다. 이 소설의 내용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을 돕던 천재적인 재미 핵물리학자가 미첩보국의 음모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국립묘지에 묻히지만 한 기자의 끈질긴 추적으로 10여 년만에 전모가 밝혀진다는 내용이다.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는 일본에 의해 한반도가 공격당하고, 그에 맞서 남북한이 일본에 핵공격을 가한다는 내용이 다뤄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곳에서 핵폭탄은 이미 개발완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북한의 민족주의가 대동단결하여 성취한 유일한 결과는 독재와 핵개발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가장 소중한 이데올로기일까? 나는 그것이 이데올로기 시장에서 가장 값싸게 팔리는 박리다매 상품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는 누가 팔아먹든 잘 팔린다. 마치 닌텐도 DS의 작동법과 게임 내용이 단순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처럼...

* 당시 대문 이미지에 사용된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의 판화 작품이다. 국제앰네스티에서 사용하는 것을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