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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상처 입은 벗에게…

상처 입은 벗에게…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요즘 『논어』를 읽고 있다. 사실 『논어』를 이제 처음 읽는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 마흔에 지리산 종주는 못하더라도 내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대학』, 『논어』, 『맹자』, 『중용』 같은 동양고전을 일람(一覽)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시작한 일이다.


나는 『논어』를 잘 읽기 위해 『천자문』을 다시 읽었고, 신영복의 『강의』를, 중국사와 중국철학사를 읽었고, 작년에 『대학』을 읽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책읽기와 같은 일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순서를 정하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바 그대로 차곡차곡 진행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요즘 나는 새로운 책을 구입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그동안 내가 구입한 책들의 순서를 정해 잘 읽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직업(職業)이 있고, 생업(生業)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직업은 책을 만드는 일이고, 나의 생업은 책을 읽고 생각하며 살아온 흔적을 글로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업과 생업의 차이가 크지 않은 듯 보이나 직업은 말 그대로 직분을 가지고 삶을 꾸려가는 돈벌이 일이니 맡은 바 소임을 등한히 할 수는 없다.

나에게 생업이란 직업에 충실하고 남은 시간을 꾸려가는 일이기도 하다. 남들은 취미라고 하는 일을 나는 그저 생업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생업이란 평생을 두고 돈벌이와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뜻한 바를 정해 해나가야 할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이에겐 조선팔도 명승을 찾아다니는 일이 생업일 수 있고, 어떤 이는 바리스타도 찾아내지 못한 커피 맛의 진경(眞境)을 찾아 즐기는 일이 생업일 수 있다. 직업만 있고, 생업이 없는 사람들은 평생 노동만 하고 즐기지 못하는 셈이니 삶의 재미를 즐기지 못하는 셈이다. 나는 한 인간이 세상에 나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적고, 작다고 생각한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삶 이후의 세계를 지탱해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남길 평판, 어떤 이는 그것을 역사의 심판이라 할지도 모르겠으나 한낱 필부(匹夫),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한 사람에게 역사란 천국과 지옥만큼이나 먼 이야기다. 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인데 수업시간 중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삶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슈바이처는 자신의 삶을 타인을 돕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고, 그것을 위해 살았으니 그의 이타주의는 사실 이기주의, 쾌락주의의 발로가 아니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쉽게 답을 해주지 못했다.

아마 당신에게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토론이었으므로 우리들 중에 누군가는 그에 상응하는 답을 내놓길 기다리셨던 것 같다. 그 질문을 한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그것이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것을 긍정해야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자기 하나를 위해 삶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지만 위대한 인간이란 남을 돕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 설령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쾌락을 공동체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에 합일시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말했었다.

언젠가 역사기행을 갔다가 임경업 장군의 묘소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는 호국의 위대한 인물이었을까? 사대주의에 충실한 시대착오적인 인물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평가도 시대에 따라, 시절에 따라 변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한 인간이 온전히 위대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했다. 공자도, 예수도, 석가모니에 대해서도 호불호(好不好)가 있는데 그대와 나 같은 자들에게야 두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나 홀로 가는 길이어도 나 자신이 우물에 갇힌 자라 늘 좁은 하늘만 보고 사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그걸로 족하다.

어쩌면 『논어』를 읽기로 결심하면서 내 삶의 마무리 수순의 전(前) 단계를 예비할 시점이란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모양이다. 앞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이 전과 같지 않을 것이며 이젠 나의 즐거움이나 호기심만을 위해 읽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 남길 수 있는 작업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이 항상 책의 형태는 아니겠으나 어차피 내가 생업으로 택했던 일들이 돈이 되거나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즐겁게 해나갈 생각이다. 생각의 한편으로 나는 비록 어려서 삶이 힘들긴 했으나 그 이후 현재에 이르는 삶은 나름 큰 고비 없이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아직 젊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평생 돈을 쫓은 바 없고, 명성을 누리기 위해 애달아 한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 적은 돈이라도 밥벌이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밥벌이가 나의 생업이나 내가 살아가는 동안 양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범주 안에 있도록 하려고 애써왔다. 삶이란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기 마련이라는 것은 살아오면서 깨달은 교훈이었다.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나도 족히 10년은 되는 세월 동안 세상과 인간에 대한 냉소로 일관한 적이 있었다. 내 마음의 살갗이 너무나 메말라서 작은 접촉만으로도 불꽃이 일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냉소를 현실주의와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현실은 항상 이상과 엇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언젠가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냉소주의와 현실주의는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냉소주의는 아무런 해결책도 궁구하지 않지만 현실주의는 실현가능한 적절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냉소는 매우 멋있는 포즈이긴 하지만 실천이 없다는 점에서 자기 학대와 모멸의 상처 이외에 실패의 깨달음도, 무모한 도전의 보람조차도 남기지 못한다.

나는 운(運)과 인연(因緣)이란 것을 믿는다. 이 말은 세상에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일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불가항력의 세계를 인정하는 까닭은 인간을 긍정하기 위해서다. 역설적이지만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그가 소설 속의 인물처럼 살 수 없기 때문이며 지식인이 책을 쓰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대안을 현실에 정책으로 반영하지 못한 반증이다. 나는 인연에서 인(因)이란 과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연(緣)이란 현재로부터 비롯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만날 운이었던 것이 인이라면 너와 내가 현재 쌓아가는 우정이 연인 셈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말없이 남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주는 것인지 그대가 나의 손을 잡아주는 것인지 모를 만큼 메마른 세상이다. 너의 삶이니, 그대가 가장 잘 아는 일이다. 나는 그저 묵묵히 너의 가는 길을 보아주마. 잘 했으면 잘 했다 하고, 못 했으면 못 했다 할 것이지만 오래도록 공경하며 보아주마.

마지막으로 법정 스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구나.

내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이 살다가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군자는 이름이 없는 법(君子無名)이라고 하는데 필부로 이름 없이 살아가는 일조차 이다지도 어려운 시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