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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현실보다 무서운 교육은 없다 - <경향신문>(2008년 12월 11일)

현실보다 무서운 교육은 없다


나는 고등학교 때 데모를 했다. 대단한 운동권이었던 적도, 민주화시위를 열심히 하기는커녕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기도 힘든데 나중에 들어보니 정보과 형사가 집까지 찾아와 학생이 요즘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후일담이긴 하지만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등골이 오싹했다. 주민등록증에 빨간 두 줄이 그어지는 악몽까지 꿨으니 말이다.

나는 남들보다 특별할 것 없는 고교 시절을 보냈지만 그 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은 국민윤리 시간에 선생님 얼굴을 벌겋게 달아오르게 해서 교무실까지 끌려간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겁이 없었거나 눈치 없는 학생이었다. 국민윤리 수업 시간 중에 남북한의 통일 방안에 대해 공부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에 제의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보다 북한이 제시한 고려연방제가 통일 방안으로 좀더 적합해 보인다며 선생님께 되물어 봤기 때문이다.

배운지 오래되어 지금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지만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은 인구 비례로 투표해서 단일국가를 이루자는 통일방식이고, 북한의 고려연방제는 남북한이 일단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여 느슨한 연방제 방식으로 갔다가 나중에 통일하자는 주장이라고 내 나름대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국민윤리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 그렇게 단순화시켜 외웠었다. 선생님께 되물어 봤던 이유도 대단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순히 그런 의도였을 뿐인데 선생님은 귓불까지 붉게 달아오르더니 버럭 성질을 냈다. 아마도 그 무렵 대학생들이 선량한 고등학생들까지 부추겨 이념투쟁의 도구로 삼는다는 신문 보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성질을 내자 아이들이 덩달아 선생님께 야유를 보냈고, 아이들의 눈치 없는 호응 덕분으로 나는 수업 중에 교무실까지 끌려 내려갔다. 교무실을 박차듯 들어간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도 들으라는 듯 ‘이 녀석이 고려연방제가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보다 낫다고 내 수업 중에 그렇게 말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도 당시는 1988년이었고, 교무실에서는 올림픽 축구 중계가 한창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축구 중계 중에 벌어진 불상사에 대해 별로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고, 2학년 때 윤리과목을 담당했던 다른 선생님이 ‘쟤는 그런 애 아니에요.’라고 말해준 덕분에 그 일은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나만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학년별, 학급별로 나뉘어 음악실로 모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어두컴컴한 음악실의 불편한 의자에 줄줄이 앉자 잠시 후 불이 꺼지면서 동영상이 나왔다. 아마도 제목이 ‘삼민투(三民鬪)의 정체와 위험’이란 관제홍보물이었던 것 같은데, 영상이 끝나자 우리 학교 선생님이 아닌 외부강사가 나와서 ‘민족통일, 민중해방, 민주쟁취’라는 삼민투의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한참동안 매우 열띤 강의를 토해냈다.

고3인데 대학진학은 영 어려울 것 같았던 나와 몇몇 친구들은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우느라 고생하는 범생이 친구들과 달리 그 강연을 매우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우리들끼리는 삼민투의 이념이 꽤나 그럴 듯하고 심지어는 멋있기까지 하다고 여겼다. 마치 조선 시대 활빈당이 부활한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그 강연을 졸지 않고 열심히 들었던 나 같은 아이들은 죄다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시간마저 아껴가며 졸았던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재수한답시고 순대국밥 집에서 소주만 축내던 시절, 고등학교 때 4.19는 의거고, 5.16은 혁명이며, 광주는 사태라고 달달 외우던 아이들, 내가 역사교과서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책이라며 권해주던 금서(禁書)들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며 거들떠도 보지 않던 친구들이 대학에 가자마자 모두 운동권이 되어 나타났다. 요즘 문제가 되는 좌편향 역사교과서 논쟁이나 이념강연 논란을 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그 시절이 생각났다. 뉴라이트들은 너무 일찍 연로해져서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인데 이념교육이든 의식화학습이든 현실보다 무서운 교육은 없다.

출처 : <경향신문>(2008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