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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WORK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체 - <경향신문>(2009.01.08.)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정체



신문을 펼쳐보니 새해 벽두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순으로 살벌한 기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대중문화의 복고열풍이 거센 탓인지 신문마다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기사들이 줄지어 실려 있다. 그중 하나가 90년대만 하더라도 자신의 소신대로 수사하는 강직한 검사 이미지로 존경받아왔던 임채진 검찰총장의 발언이다. 얼마 전 그는 검찰의 ‘신년 다짐회’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인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경제난 타개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 말했다.


요즘 들어 자주 보게 되고, 볼 때마다 불쾌해지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운운하며 국민들을 윽박지르는 광경이다. 언제부터인가 ‘반공’을 대신하여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시인양 울려 퍼지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란 말의 정체가 무엇일까.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은 헌법에 기초하고,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권’이 핵심

독재 권력과의 힘겨운 투쟁 끝에 얻어낸 자유이고 민주주의이기에 오늘날 대한민국 시민 대부분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장 소중한 정치적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며 헌법 제1조를 목 놓아 외치는 일이 생기는가. 왜 다른 한 편에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읊조리는 것일까. 국민의 소통과 통합을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이제라도 제헌정신으로 돌아가 그것을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민주주의의 어원이 그리스어로 ‘다수의 지배’를 뜻하는 말이란 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동안 민주주의란 말이 너무 흔해진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민주주의를 대신해 국시 행세를 하던 ‘반공’의 약발이 냉전 해체 이후 다했다고 여겨진 탓인지 부지불식간에 반공을 대신해 ‘자유민주주의’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의 ‘자유’란 당연히 자유주의의 자유를 뜻한다. 사실 헌법에도 나오지 않는 자유민주주의란 말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자유민주주의란 개념이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국민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이념이라는 뜻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항상 시장경제와 쌍을 이뤄 등장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독재와 싸우며 시민 대다수가 쟁취하고자 했던 표현과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만을 수식해주는 형용사에 불과하다고 느껴진다.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자유일까? 자유주의란 본래 전제왕정에 대항하는 도시의 시민들이 군주로부터 자신의 사유재산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 운동이 발전된 개념이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사회주의이거나 공산주의가 아닌 것처럼 민주주의가 곧 자유주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하는 터무니없는 사례는 현실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20세기의 수많은 독재국가들이 시민적 자유권을 억압하면서도 재산의 매매와 투자처럼 시장에서 통용되는 권리를 잘 보호해온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국가들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물론 자유주의가 옹호하는 핵심적 자유권 없이 민주사회의 존립을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다른 개념이며, 민주주의를 곧 자유주의, 엄밀하게 말해 시장의 무한 자유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와 의도적으로 혼동시킬 때 시민사회의 건강한 정치성, 다수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본질은 주변으로 밀려나버리게 된다.

‘시장의 자유’로만 착각한 정부

시민의 정치적 자유보다 우선하는 시장의 자유를 자유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만약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크게 훼손하는 세력이므로 먼저 이들을 발본색원해야 한다. 검찰총장이 하고자 했던 말의 원래 의도는 그런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 <경향신문>(2009.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