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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선우 - 시체놀이

시체놀이

- 김선우


배롱나무 아래 나무 벤치
내 발 소리 들었는지
딱정벌레 한 마리 죽은 척한다
나도 가만 죽은 척한다 바람 한 소끔 지나가자
딱정벌레가 살살 더듬이를 움직인다
눈꺼풀에 덮인 허물을 떼어내듯 어설픈 움직임
어라, 얘 좀 봐. 잠깐 죽은 척했던 게 분명한데
정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딱정벌레 앞에서
죽은 척 했던 나는 어떡한담?
햇빛이 부서지며 그림자가 일렁인다
아이참, 체면 구기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새로 태어나는 척한다
햇빛 처음 본 아기처럼 초승달 눈을 만들어 하늘을 본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은 척하게 되는 거란 걸!

나의 부음 후 얼마 지나 새로 돋는 올리브 잎새라든지
나팔꽃 오이 넝쿨 물새 알 산새 알 같은 게 껍질을 깰 때
내 옆에 있던 기척들이 소곤댈 거라는 걸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출처 : <문학과 사회>, 2009. 여름(통권 86호)

*

김선우 시인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 혹은 우정의 근거 중 상당 부분은 우선 동갑내기라는 점에 기인한다.(그 점에서는 손택수 시인도 매일반이니 내가 별나게, 아름다운 여성 시인에 대해 편애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좀 곤란하겠지만 뭐,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은 없다. 내가 이 두 시인을 별나게 좋아하는 이유는 동갑내기란 것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 느끼는 공감이 우선이지 성별, 동갑은 나중 일이기 때문이다.) 김선우 시인의 시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시인의 시가 지니고 있던 천연덕(天然德)스러운 건강함에 있었다.

김선우 시인의 초기 시작들에서는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상당히 진하게 엿보이는데 읽는 사람의 입장(특히, 남성)에서 그것이 공세적으로 느껴지거나 마녀를 가장한 기이함(그로테스크), 음울한 정조, 피해자로서의 자의식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김선우 시인이 여성으로서의 성정체성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다만 시인의 작품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으로 읽히기 전에 먼저 독자로 하여금 무장해제하게 만든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다가와 언제 찔렸는지 눈치채기 전에 이미 부드럽게 심장을 파고든 비수처럼 시어는 담백하고, 표현은 유연하다.

그런데 이번 시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느껴진다. 과거의 시들이 천연덕스러웠다면 지금의 시는 천진난만(天眞爛漫)하다는 느낌이다. "아, 문득 누가 날 치고 간다"고 시인은 말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 부분을 '눙치고 간다'고 읽게 된다. 시어나 구성된 국면들은 천연덕스러움을 넘어 천진난만하여 동시풍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시가 풍기는 향기는 '패랭이꽃'에서 '국화'로 진화해간다. 소녀는 나이를 먹어 아가씨가 되고,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지만 여성이고, 시인은 여전히 시인이다. 세월이 흐르고 있다.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 이 한 편의 시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시인은 한 발 더 나아가 좀더 깊어진다.

"어라, 얘, 새로 태어나는 척하는 것 좀 봐!"

동갑내기 시인은 얼마나 더 깊어질까? 친구처럼 시인의 성숙을 함께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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