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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인물/평전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로버트 카파 | 우태정 옮김 | 필맥(2006)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Slightly Out of Focus) - 로버트 카파 | 우태정 옮김 | 필맥(2006)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진다. 사진기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키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카파는 대상을 두고 어떻게 보고, 어떻게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전쟁 그 자체를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격정의 끝없는 확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밖에 있는 것을 찍어 그 격정을 표현한다. 그는 한 아이의 얼굴 속에서 그 민중 전체의 공포를 나타낸다.  - 존 스타인벡

 

포토저널리즘의 짧았던 전성기를 열고 닫은 최초의 영웅이자 사실상 마지막 영웅이었던 로버트 카파. 그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친구 집에서 우연히 라이프 세계사와 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사를 본 것이 나로 하여금 로버트 카파의 세계, 포토저널리즘이란 것을 처음으로 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후로 오랫동안 특파원을 꿈꾼 적이 있었다. 이 책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원제는 Sightly Out of Focus, 1947)"는 오랫동안 보도사진계에서 활동해온 민영식 선생의 번역이다. 카파에 대한 책, 혹은 사진가에 대한 책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나온 책이므로 이 책의 군데군데 보이는 번역상의 문제나 오탈자를 시비삼지는 말자. 그런 것쯤 크게 거슬리지도 않을 뿐더러 워낙에 재미있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로버트 카파이고, 내 홈페이지(http://windshoes.new21.org)에서 로버트 카파를 다루는 별도의 글을 쓴 적이 있으므로 그의 생애나 작품 세계를 다루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두절미토록하겠다. 이 책은 로버트 카파 자신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그는 헝가리 출신의 유태계 사회주의자였다. 이 말을 요새 우리 식으로 바꿔보면 '비정규직외국인여성이주불법노동자'쯤 되는 거다) 프랑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서 생활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서 미국이 참전하게 되고 그가 보도사진가로, 전선기자로 활동하게 되는 1942년 여름의 어느 아침으로부터 출발해서 유럽 전선에서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이야기를 스스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일종의 전선취재록인 셈이다. 첫장의 제목이 '운명의 아침 - 1942년 여름'으로 시작해 마지막 장은 '이제 아침이 되어도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다.'로 끝난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긴 했지만 시계조차 없어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나에게는 시간 같은 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돈이래야 고작 25센트 동전 한 닢뿐. 전화벨이라도 울려 누군가가 점심에 불러주던가, 일거리 얘기라도 하던가, 더우기는 돈을 꾸어주겠다는 얘기 같은 게 없는 한 침대를 떠날 이유는 없었다.

 

따분하고 지겨운 가난한 망명자 신분이었던 로버트 카파 앞으로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커리어즈>지의 전선보도사진기자로 채용한다는 내용이었고, 긴급히 특파원으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거금 1,500불을 동봉했으니 카파로서는 고민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트 카파는 당시로서는 적성국인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의 국민이었으므로 당연히 취업을 할 수가 없었고, 미국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갈 수도 없었다. 그는 극적인 행운을 거머쥐고도 오도가도 못할 형편이었다. 다행히도 그를 도와준 사람들 덕분에 영국행 여객선을 잡아 탈 수 있었고,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면면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늘 그렇지만 실화는 픽션을 능가하는 재미와 감동을 주는 법이다.

 

이 책에 다루지 않는 내용인, 1942년 이전의 로버트 카파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진이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아이젠슈타트의 암실에서 조수로 일하며 사진을 배웠고, 히틀러가 등장하자 독일을 떠나 스페인 시민전쟁에 인민전선 의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사랑 겔다 타로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란 사진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후퇴해온 아군 전차에 애인 겔다 타로가 깔려 숨지는 사건을 겪은 뒤 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았다(물론 연애는 많이 했지만).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라이프Life」지에 게재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종종 사진작품의 진위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곤 하는데 카파의 이 작품도 진짜다, 가짜다 해서 말이 많았다. 어떻게 총탄을 맞는 병사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느냐는 것부터 사진에 다른 병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 등등부터해서 어떤 영국 기자는 그 당시 로버트 카파는 호텔에서 놀고 있었다고 증언을 하면서 이 사진은 가짜라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 사진 속 병사의 이름이 페데리코 보렐 가르시아고, 1936년 9월 5일 세로 무리아노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카파의 사진을 둘러싼 의혹이 드디어 풀리게 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어쨌든 스페인 시민전쟁이 인민전선파의 패배로 막을 내리면서 그는 유럽 땅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고, 결국 미국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한 사진, 죽음의 공포와 엄청난 전쟁의 화염으로 인해 그때 카파의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핀트도 맞지 않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욱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이 이 책의 표지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들, 전쟁이 끝난 뒤 로버트 카파는 1945년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947년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매그넘>을 결성한다. 이 무렵 그는 존 스타인벡과 함께 소련에 촬영여행을 가고, 1949년과 51년에는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는 잠깐이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였고 1954년 풍물사진 촬영차 일본에 가 있던 중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게 된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의 한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러나 <매그넘> 회원인 친구 잔 모리스가 뉴욕에서 그를 불렀다. <라이프>지에서 베트남 전세가 긴박해지자 카파에게 그곳에 가줄 것을 화급히 간청한 것이다. 카파는 베트남 행을 말리는 친구에게,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는 41살의 젊은 나이에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1954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그가 이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그 자신이 전선기자로서 활동하고자 했던 마음 때문이었겠으나 다른 일면도 존재한다. 매카시즘에 사로잡힌 미국이 그를 반미활동가로 간주하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 카파는 미국을 떠나 있어야 했고,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너무 이르고 극적인 죽음은 그를 전선기자의 신화가 되도록 했다.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앞에 드러내 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라는 카파의 이상, 전선기자들의 이상은 오늘날 거대다국적 기업에 의해 장악된 거대 매스미디어 그룹과 언론통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정부 권력에의해 심각하게 훼손당하고 있지만, 오늘날에도 전선기자를 꿈꾸는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이 책은 오랫동안 바이블로 남을 것이다. 전선기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때라도 자신을 지배하려드는 매스 미디어와 정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려 들었고, 그것이 바로 카파이즘(Capaism)이었다. 역대 전쟁에서 죽은 종군기자를 보면 제1차 대전에서 2명,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66명의 종군기자가 사망했고, 한국전쟁에서 17명, 베트남전에서 65명, 1994년 르완다내전, 보스니아 내전, 알제리 내전 등에서 157명, 1999년 발칸, 시에라리온, 콜롬비아 내전 등에서 활동하던 종군기자 중 87명, 2001년 아프간 전쟁, 나이지리아 내전 등에서 취재보조원을 포함해 95명의 기자가 사망했다. 수많은 기자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오늘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