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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1

나는야 세컨드1


-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 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쉿, 나의 세컨드는 - 김경미 시집
김경미 (지은이) | 문학동네



*

간혹 아깝게 놓치는 시집이 있는데, 김경미 시인의 "쉿, 나의 세컨드는"는 꼭 갖고 싶은 시집이었는데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지금은 구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세컨드'란 표현이 한국에만 있는 건지 외국에서도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는 말인 건 확실하다. '날 얼만큼 사랑해?'라고 묻는 말의 배후에는 '네가 제일이야!'란 말이 도사리고 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탓인지 아이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제 형제들과 먼저 경쟁을 벌이려고 한다. 첫째가 둘째를 시기하고, 둘째는 셋째로부터 위아래로 치고받힌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말씀들 하시지만 당하는 당사자로서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생각해보면 난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첫 번째가 되어 본 기억이 없다. 우리 집안의 장남의 자식이므로 장손으로서의 책무나 부담감은 백배지만, 든든한 배경이 되었어야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편이고, 아버지는 요절한 탓에 좋은 건 하나도 없고, 부담만 턱살처럼 늘어진다. 그래서 나는 시기와 질투를 숨기는 법을 어려서부터 익혀야 했다. 사실 이제는 그런 감정으로부터 어느 정도 초연해지기도 했다. 승자독식사회니까, 첫째가 된다. 1등이 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자원을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승자가 된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고금의 진리가 증명하는 건, 물질적 자원의 풍요와 행복은 기초생활 보장의 차원을 떠나면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김경미 시인이 말하는 세컨드의 의미도 그것이다. 당당하게 나는 세컨드, 하류인생이라 말할 것...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하며 씨익 웃어줄 것...

나는 당신과 이 사회의 세컨드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이나 이 사회를 질투할 것 같은가? 천만에 말씀, 변방에도 행복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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