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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도종환 - 책꽂이를 치우며

책꽂이를 치우며

- 도종환

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 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나는 도종환 시인의 이 시가 머리로 꾸민 시가 아니라 정말 일상에서 시인이 직접 대면한 그 순간의 일부를 시로 옮긴 것이라 생각한다. 신혼 살림을 13평 짜리 방 두개의 작은 연립에서 시작했다. 방 하나는 부부 침실,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책창고였다. 우리 부부가 가장 먼저 생각한 혼수는 책꽂이였는데, 좋은 책장을 들일 수 없어 동네 가구점에 부탁해서 책장 여섯 개를 맞췄다. 책장 여섯 개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니 작은 유리창 하나도 허락할 수 없으리만치 책으로 가득해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가난한 우리 부부에게는 최대한의 사치였는데 욕심껏 책장을 맞춘 것까지는 좋았지만 책장 여섯 개로는 택도 없이 부족한 우리 집 책이 문제였다. 결국 책장 한 칸에 책 두 줄씩 포개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책장의 가로대가 모조리 휘어버리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다. 결혼 생활 10년에 지금껏 이사를 세 번했는데,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의 갖은 원성을 들으며 남들보다 더 많은 이사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지금은 방 3칸 짜리 삼십평형 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지금도 부부 침실을 제외하곤 방 2개 모두 유리창을 허용할 수 없는 서재가 되어 버렸고, 거실마저 책꽂이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어둔 길 책을 읽어 불 밝힐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지만 도종환 선생도 내가 당신의 시집을 정리하여 내다버리길 바라진 않을 거란 심정으로 이사다닐 때마다 꽁꽁 싸매고 다닌다. 어떤 사람에겐 빛이 더 많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겐 천만근 무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람구두이고, 그런고로 천만 근 무게로 내리 누르지 않는다면 언제고 이 세상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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