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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공광규 -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공광규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들짐승과 날새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결 속에
화도 안 내고 칭찬도 안하는
참 한심한 수백 나한들

나도 이 바람 속에서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논산 영주사에 가본 적이 있던가?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논산에 있는 견훤의 묘까지 기어올라간 기억은 있는데 영주사 다녀온 기억은 없다. 공광규 시인의 시는 불교적이라기 보다는 장자 풍이다. 난 장자가 세상에서 말을 제일 잘하는 인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예수랑 장자는 말 잘하기로 치면 동서양의 대표쯤 될 거 같다. 시인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로운 바위 벼랑 위에 앉아있는 수백 나한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어떤 이들은 그 앞에서 영험을 바라며 머리숙여, 무릎꿇어 절을 하지만 그가 보건데 영험은 커녕 지저분한 정한수, 자기 몫으로 놓아준 과일을 들쥐가 파먹어도 쫓아내지도 못하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찍 갈겨줘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못한다. 불륜남녀가 놀러와 합장을 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자빠져도 맥 없이 쓰러져 있을 뿐이다.

화도 안 내고 칭찬도 안 하는 ... 수백 나한들...

그런데 단 한 마디, 시인은 "나도 이 바람 속에서//한심하게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한심하게 산다는 거...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한 세월 보내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