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ESY/한국시

고정희 - 아파서 몸져 누운 날은

아파서 몸져 누운 날은

- 고정희

오월의 융융한 햇빛을 차단하고 아파서 몸져누운 날은
악귀를 쫓아내듯 신열과 싸우며 집 안에 가득한 정적을
밀어내며 당신이 오셨으면 하다 잠이 듭니다

기적이겠지... 기적이겠지...

모두가 톱니바퀴처럼 제자리로 돌아간 이 대낮에,
이심전심이나 텔레파시도 없는 이 대낮에,
당신이 내 집 문지방을 들어선다면 나는 아마 생의 최후 같은
오 분을 만나고 말거야. 나도 최후의 오 분을 셋으로 나눌까
그 이 분은 당신을 위해서 쓰고 또 이 분간은 이 지상의 운명을
위해서 쓰고 나머지 일 분간은 내 생을 뒤돌아보는 일에 쓸까
그러다가 정말 당신이 들어선다면 나는 칠성판에서라도
벌떡 일어날거야 그게 나의 마음이니까 그게 나의 희망사항이니까...
하며 왼손가락으로 편지를 쓰다가
고요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잠이 듭니다.

흔들림이 끝난 그 무엇처럼.

*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작사: 류근, 작곡: 김광석)>이란 노래를 잘 듣지 않는다. 어쩌다가라도 듣게 되면 재빠르게 다음 곡으로 넘겨버리곤 한다. 고정희 이 시 <아파서 몸져 누운 날은>이란 시도 나에겐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몸마저 아파 몸져 누워본 적이 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마음이 몸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내 삶이 가장 아름다웠다. 그 이후 나는 늘 몸이 마음을 지배하는 삶을 살았다.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꿨던 즐거운 인생이었지만 내 생애 마지막 연애가 끝나버린 뒤 내게 남은 것은 앞으로 오래도록 지쳐가야 할 시간들만 남았다는 회한이다.

흔들림이 끝난 삶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