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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황지우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지금보다 어렸을 때... 이 시를 읽으며 나는 황순원의 단편 어느맨가에 나오는 겉늙어버린 동리 형처럼 끼룩끼룩대며 웃었다. 이상하게 세상을 다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생리적 연령이 어리거나 마음이 어리다. 나도 그랬다.

어느 날엔가 나는 갑자기 고등학교 3학년생에게 메일 한 통을 받았었다. 미술을 하는 여학생이었는데 세상의 바닥까지 보아버린 어투였다. 그런 어투의 편지를 받으면 마음 한 켠이 싸아하면서도 흐뭇해진다. 그건 삶에 대해 진지하다는 반증이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세상을, 삶을 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매우 중요했다. 그건 내가 기르고 있는 내 속의 작은 괴물들에 대해 당신들도 알아달라는 까탈이었으므로...

정작 세상을 안다는 건... 세상이 나에 대해 얼마나 무심하며 내가 세상을 알고 모르고 조차 전혀 상관없어 한다는 건데 그걸 몰랐으므로 온통 반항이었다. 따지고보면 그때도 그걸 알았지만,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왜 모두가 일어나겠는가. 일부는 그에 대항하느라, 뭐 국가주의니,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 같은 고상한 까닭 같은 거 없어도 그저 싫어서 못 일어나겠다고
개기는 마음, 왜 없겠나...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렇게 세상을 뜨는 흰 새떼들은 그렇게 자기들끼리 끼룩대면서 다른 어디론가 날아간다. 이 세상 밖 어디론가...그러나 세상은 그들이 떼어 맨 등 위에 있고, 그들이 떼어 맨 무거운 날개짓 안에 있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세상을 뜨는 존재들은 아무도 없다. 황지우의 열패감... 그것이 이 시의 매력이다. 오줌 누고 일어나면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속옷 어딘가엔 지린내가 배기 마련이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싶지만... 세상은 우리의 양어깨를 내리누르며 말한다. 자신이 똥 눈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히며..."길이 보전하세로..."

내가 처음 알았던 무렵 싱싱한 포도송이 같던 계집 아이들이 이제 그 포도송이를 닮은 눈매를 가진 아이들의 어미가 되었음을 확인하며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