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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시

최치원 - 추야우중(秋夜雨中)과 두 편의 현대 우중시(雨中詩)

추야우중(秋夜雨中)

- 최치원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가을 바람에 오직 괴로운 마음으로 시를 읊으니
세상에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
창밖에 밤 깊도록 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는 만 리 고향을 향한 마음만이 서성이네.




우중행(雨中行)


- 박용래



비가 오고 있다
안개 속에서
가고 있다
비, 안개, 하루살이가
뒤범벅되어
이내가 되어
덫이 되어

(며칠째)
내 목양말은
젖고 있다.

출처 : 박용래, 먼바다-박용래 시전집, 창비, 1984


*

박용래 시인의 "우중행(雨中行)"에는 최치원의 한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의 심상이나 정조와는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최치원의 雨中이 창 밖의 광경이고, 시인은 등불 앞에 있어 젖지 않는 것에 비해 박용래의 雨中은 며칠째 목양말을 젖게 하는 비입니다. 그럼에도 박용래의 비는 최치원의 비보다 훨씬 멀리서 내리는 비처럼 느껴집니다. 목양말이 젖는 빗 속에 있는 시인의 비보다 최치원의 비가 더 가까이에서 내리는 비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박용래 시인이 최치원처럼 내리는 비에 마음을 싣지 않고, 관조하는 시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최치원보다 박용래가 빗 속에서 더 외로와 보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혹시 어렸을 때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띄워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 전의 나는 분명 나인데, 현재의 내가 10년 전의 내가 보낸 편지를 읽는 동안 과거의 나란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 도통 알 수 없거나 낯설게 느껴질 때...

박용래 시인의 시가 내가 나에게 말을 거는 독백과 같다면, 최치원의 시는 한탄(恨嘆)이기 때문입니다. 최치원은 비록 "세상에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이 적구나."라고 노래하지만, 이것은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박용래 시인의 시에서 시인은 그런 대상조차 상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슬픕니다, 아니 슬프다는 감정조차 맑게 정제된 평온함입니다.

비가 옵니다, 안개 속에서 비는 오는 듯, 가는 듯 합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비를 시인은 멍하게 바라봅니다.
비와 안개와 하루살이가 범벅이 됩니다.
어쩌면 시인은 보안등이 매달린 남의 집 처마 끝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갈 곳이 없는 건지, 어디로 가야할 지조차 생각하지 않으며...

슬픔도, 절망도, 비탄도 느끼지 못하는 슬픔이, 절망이, 비탄이 그리고 외로운 평온함이 덫이 되어 (며칠째) 오도가도 못하며 목양말이 젖습니다. 최치원의 시에서 시인의 물리적 위치는 등불 앞에 고정되어 있는 대신 마음이 서성인다면, 박용래 시인의 시에서 시인은 어디론가 가고자 하지만 가지 못한 채 정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 기형도는 시 "雨中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라고 이야기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雨中의 나이
-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기형도
  

1

미스 한, 여태껏 여기에 혼자 앉아 있었어? 대단한 폭우라구.
알고 있어요. 여기서도 선명한 빗소리가 들려요. 다행이군. 비 오는 밤은 눅눅해요. 늘 샤워를 하곤 하죠. 샤워. 물이 떨어져 요. 우산을 접으세요. 나프타린처럼 조그맣게 접히는 정열? 커 피 드세요. 고맙군. 그런데 지금까지 내 생을 스푼질해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시한 소리예요. 기형도 씨 무얼했죠? 집을 지 으려 했어. 누구의 집? 글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허물었어 요? 아예 짓지를 않았지. 예? 아니, 뭐. 그저…… 치사한 감정 이나 무상 정도로, 껌 씹을 때처럼.


2
등사 잉크 가득 찬 밤이다. 나는 근래 들어 예전에 안 꾸던 악 몽에 시달리곤 한다. 시간의 간유리. 안개. 이렇게 빗소리 속에 앉아 눈을 감으면 내 흘러온 짧은 거리 여기저기서 출렁거리는 습습한 생의 경사들이 피난민들처럼 아우성치며 떠내려가는 것 이 보인다. 간혹씩 모래사장 위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건조한 물 고기 알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그런 식으로 또 나의 일년은 마취약처럼 은밀히 지나가리라. 술래를 피해 숨죽여 지나가듯. 보인다. 내 남은 일생 곳곳에 미리 숨어 기다리고 있을 숱한 폭우들과 나무 들의 짧은 부르짖음이여.
  

3
고양일 한 마리 들여놨어요. 발톱이 앙증맞죠? 봐요. 이렇게 신 기하게 휘어져요. 파스텔같이. 힘없이 털이 빠지는 꼴이란……
앗, 아파요. 할퀴었어요. 조심해야지. 정지해 있는 것은 언제나 독을 품고 있는 법이야.
  

4
시험지가 다 젖었을 것이다. 위험 수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충분한 숙면. 물보다 더욱 가볍게 떠오르기. 하얗게 씻겨 더욱 찬란히 빛나는 삽날의 꿈. 당신의 꿈은?


5
지난 봄엔 애인이 하나 있었지. 떠났어요? 없어졌을 뿐이야. 빛 의 명멸. 멀미 일으키며 침입해오던 여름 노을의 기억뿐이야. 사랑해보라구? 사랑해봐. 비가 안 오는 여름을 상상할 수 있겠 어? 비 때문은 아녜요. 그렇군. 그런데 뭐 먹을 것이 없을까?


6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묻는다면. 미스 한. 혼자 앉아서 이젠 무 엇을 할래? 집을 짓죠. 누구의 집? 그건 비밀. 그래. 우리에게 어떤 운명적인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품었던 우리들 꿈 의 방정식을 각자의 공식대로 풀어가는 것일 터이니. 빗소리. 속의 빗소리. 밖은 여전히 폭우겠죠? 언제나 폭우. 아. 그러면 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논리…… 300원의 논리. 여름엔 여름 옷을 입고 겨울엔 겨울 옷을 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