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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정해종 - 엑스트라

엑스트라

- 정해종



그냥 지나가야 한다
말 걸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가장 해야 한다
누군가 지나간 것 같지만
누구였던가 관심두지 않도록
슬쩍 지나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죽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선
몇 번을 죽을 수 있지만
처절하거나 장엄하지 않게
삶에 미련 두지 말고
되도록 짧게 죽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의 생이 더욱
빛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배당받는 것이다
주어진 생에 대한 열정과 저주,
모든 의심과 질문들을 반납하고
익명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세상을 한번, 휙..
사소하게 지나가야 한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끝끝내
우리는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출처 : 정해종, <내 안의 열대우림>, 생각의나무(2002)

*


어제 영화 <캐쉬백(Cashback)>을 보다가 실연 당한 젊은이가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말하며 여분의 시간(extra hour)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갑자기 정해종 시인의 <엑스트라>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주인공인줄 여기며 살지만 실은 '여분'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우리 자신이 더 잘 안다.  

기억해줄 사람 하나 없이 배경으로 살아간다는 걸... 그대 떠난 뒤 홀로 남겨진 블로그에 몰래 도둑처럼 스며들어 갈 때마다 느끼곤 한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주인을 기억하며 사람들은 가끔씩 와서 그대의 안부를 묻고, 안부보다 더 많은 스팸들이 쌓여간다. 그렇게 서서히 세월의 더께가 쌓여가겠지만, 그대의 흔적이 화석이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언젠가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서버의 부하량을 핑계로 포털사이트가 그대의 블로그를 영영 허공으로 날려보낼 테니까. 그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 모두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아마 우주의 반짝이는 별들을 위한 배경이 될 것이다. 영원한 암흑 속에서 널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우주 속에 여전히 암흑으로 칠해지지 않은 여백이 될까.

절대 잉여들의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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