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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공광규 - 얼굴 반찬

얼굴 반찬


- 공광규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출처 : 공광규, "말똥 한 덩이", 실천문학(2008)

*

오랫동안 혼자서 밥 먹던 세월이 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면 좁은 방 정면으로 전신 거울이 보였습니다. 무심결에 혼자 밥먹고 있는 나를 바라보니 정내미가 떨어졌습니다. 좁은 방 안에 거울을 치워둘 마땅한 곳도 없어 거울을 등지고 옷장을 바라보며 밥을 먹습니다. 이제 거울은 홀로 밥 먹고 있는 사내의 등을 비추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등지느러미가 시큰하게 저려옵니다. 오랫동안 혼자서 밥 먹어 버릇하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와 마주보며 밥을 먹으니 마주한 이가 밥을 어찌 먹나 물끄러미 바라보게 됩니다. 젓가락 가는 곳마다 눈동자가 저절로 따라나섭니다. 밥 먹는 사람을 보니 신기합니다. 오물조물거리는 입술을 오래도록 쳐다봅니다. 오른쪽 발가락으로 왼쪽 발등을 꼬집어 봅니다.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시간입니다. 생시(生時)입니다. 밥 먹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흐뭇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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