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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천양희 - 사라진 것들의 목록

사라진 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
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


누구 노래였더라. '총 맞은 것처럼' 총을 맞아본 적이 없으니 솔직히 감각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총 맞은 것처럼'이란 직설적인 표현엔 힘이 있다. 천양희 시인과 나는 연배 차가 제법 있다. 그래서 시인이 말한 것 중 절반쯤은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지 실제 경험해본 것은 아니다. 나는 '총 맞은 것처럼' 시인이 하는 말을 고스란히 감각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내 주변에도 사라진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내 곁에서 사라진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본다. 정말 큰 구멍은 없을까? 알고 보니 내가 구멍이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

사라진것들의 목록.

-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목포댁 재봉틀소리
사라졌다 마당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지고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늘의
뒷켠으로 사라진 것들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런데 왜 옛날은
사라지는게 아니라 스며드는것일까 어느
끈이 그렇게 길까 우린 언제를 위해 지금을
살고 있는지 잠시 백기를 드는 기분으로
사라진것들을 생각하네 내가 나에게서
사라진다는 것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을것이네

#
몰랐는데... 몇달 전에 나온 시집에서는 또 처음 발표 때와 다르게 3연을 시집내면서 대폭 손 봤나 봅니다.
(1연에 '수선집'이라는 단어도 빠지고)
아래 어떤분의 질문이 있어서 참고될까 싶어서 다시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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