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
조홍섭 옮겨엮음 / 한길사 / 1984년 1월



조홍섭 선생이 옮기고 엮은 이 책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해방"은 지금의 세태로 보면 다소 촌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는 "민중을 위한 과학기술론"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이 지난 1984년의 일임을 상기해보면 촌스럽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이전에도 첨단을 달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사회적 접근이 필요하단 생각을 계속 해왔으나 최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소동을 겪으며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내 아는 어떤 이는 황우석 박사 덕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온국민들이 오랫동안 손놓아왔던 생물 공부는 이참에 충분하게 했으니 그것만은 황우석 박사의 공적이 크다고 할 수 있다며 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책은 현재로서는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나 역시 이 책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하게 되었다. 아마 황우석 박사 사건이 없었다면 이 책과 내가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나역시 그의 덕을 입긴 입은 셈이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문화사회론을 주장하여 문화연구자들과 생태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비교적 잘 알려진 "앙드레 고르"의 글 "에콜로지스트 선언"이 "미셸 보스케"란 이름(필명)으로 이 책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힐러리 로즈, 스티븐 로즈의 "과학의 중립성에 관한 신화"란 글도 수록되어 있다.

이책의 편역자인 조홍섭 선생 자신도 우리 사회에서 과학분야 전문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해 왔으며 환경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필자들 중 한 명이다. <과학동아>로부터 <한겨레> 생활과학부 기자, 부장으로 오랫동안 환경과 과학분야를 취재하고 보도해왔고, 2005년 현재 환경기자클럽 회장, 한국과학기술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그가 지은 책 가운데 <이곳만은 지키자> 등은 나도 읽어 보았고, 가지고 있는 책 중 하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저명한 순수과학자 47명으로 구성된 미국의 제이슨 연구단은 '이글루 화이트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3년 동안 3억 달러를 들여 진행된 이 사업의 주요 내용은, 고속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호지명 루트 위에 고성능의 음향탐지기와 지진탐지기를 배치하는 것이었다. 열대식물로 위장된 안테나를 제외하고는 땅에 묻힌 이 정교한 탐지기는 미세한 진동과 소리를 탐지하여 정찰기로 송신하고, 이것은 다시 타일랜드에 있는 컴퓨터 센터에 전송되어 B52 폭격기의 출격으로 연결된다. 이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미국은 지상에 단 한 명의 군인도 출동시키지 않고서도 남하하는 병력의 80%(대략 1만 2천 대의 트럭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베트남군)를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어렸을 적 우리들은 대개 한 번쯤 과학자를 꿈꾼다. 대중문화를 통해 표상되는 과학자들은 대개 정의로운 인물들이거나 비록 현재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할지라도 나름대로는 과학을 통해 인류 문명의 증진을 위해 노력해온 인물들로 그려진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과학자에 대한 꿈, 로봇 공학자, 유전 공학자의 꿈을 꾸어왔다. 또한 과학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오랫동안 과학이 순수하게 그 자체를 위해서만 추구되는,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이상적 상태"를 꿈꾸고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은 결혼이나 가족, 사랑이 그러하듯 한 번도 순수해본 적이 없으며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행위였음을, 과학의 역사가 잘 증명하고 있다.

훼엘에 의해 1840년 처음으로 과학자(scientist)란 말이 등장한 이래 과학자들은 의사와 마찬가지로 점점 전문화된 직업으로 분화되어 왔으며, "인간을 위한 지식에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다", 과학은 "신의 위대한 영광과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며 찬미되거나 혹은 관념론에 기초한 수구세력들에게는 위협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과학과 지식이 보편적으로 확산되면 이 세계에서 가장 잘 구성된 정부라도 곧 전복될 것"이라는 영국과학진흥협회의 논쟁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노동자계급의 과학교육을 위한 운동, 과학적 사고가 갖는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체제측의 공포와 자본주의  사회가 보다 숙련된 노동자를 요구한다는 깨달음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을 반영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 중 한 권을 찰스 다윈에게 기증하려 했으나 다윈이 이를 정중히 거절했던 일화는 사회주의가 과학을 그들의 편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순수과학은 이렇듯 우파에게도 좌파로부터도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인 포섭과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이 국가기구 내로 포섭되기 전에 일어난 막간극에 불과하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과학은 더이상 순수한 민간 차원의 연구로 머물 수 없게 되었고, 과학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지급받게 되었다. 그 연구들의 대부분은 전쟁(혹은 국가방위)에 대한 급료였다. 앙드레 고르는 솔직하게 말하자면서 과학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이면서도 "과학을 공부하게 되면 흥미롭고, 높은 급료를 받으며, 안전하고 존경받는 지위를 얻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대부분은 내재적으로 과학에 대해 엘리트 의식 - 지식을 가진 사람은 소수이고 소수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의식 - 을 가졌거나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과학은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우월한 전문지식이라는 것이고, 지배 계급의 아카데미 문화 속에서 체계화되고, 통합될 수 있는 지식만을 '과학'의 이름으로 인정하려 든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 속에서 습득한 의학 지식만이 과학적이고, 전래의 전통적인 의학은  비과학적인 사이비 과학으로 치부하려 드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과학은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습득하고, 우리들은 교육을 통해 과학에 대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된다.

또한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생산 관계에 통합될 수 없고, 자본주의를 위해 아무런 쓸모도, 가치도 없는 따라서 교육제도 안에서 가르치지 않는 기법(혹은 지식)에 대해서는 '과학', '과학적'이라는 칭호를 수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학교 교육의 정규과정을 통하여 전달되고 학교에서 수여하는 졸업장으로 인정받는 개념과 기법만으로 과학적이라 부르고 스스로 터득한 지식은 아무리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지배적 문화의 틀 속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자본주의제 성장에 기여한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적 윤리의식은 과학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사업가처럼 금욕적이며 무감각하고, 따라서 '비인간적'(이 말을 오해하지 마시라)이어야 하며, 그래야만 과학적인 사고를, 합리적인 사고를 지닌 과학자일 수 있다는 의식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하듯 이론과 실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전문가와 대중 사이에 전례없이 먼 격차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황우석 박사 사건 혹은 우리 사회의 전 분야가 그러하지만 특히 과학 분야에서 촉발된 이 사태의 책임(당장은 논문조작 사건만을)을 황우석 박사 일개인에게 묻는 것은 편리한 책임회피의 방식이다. 우리 사회는 당장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생산성을 향상하는 기술, 차세대 국가경제 성장의 동력으로서의 과학, 유전공학을 지목했고, 젊은 순수과학도들에게 지급되었어야 할 연구비까지 차용해 특정 과학 분야에 지원하는 경박함을 보였다. 무엇보다 진리를 추구해야 할 과학적 성과에 대해, 진실 규명보다 국익이 앞선다는 명분으로 온 사회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작금의 상황을 놓고도 우리는 그 근본적인 대책과 반성에 앞서 여전히 내 탓 네 탓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책의 속표지에 누군가 이렇게 적어놓았다. "오늘 햇빛 이렇게 화사한 마을/ 빵 한 조각을 먹는다/ 아 부끄러워라/ 나는 왜 사나/ 벚꽃 - 이외수" 이 책을 처음 구입한 사람은 무슨 마음이 들어 저렇게 적어놓았을까. 이 책을 읽으며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헌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시거든 조금의 주저도 하지 말고 집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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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