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잘난 척을 조금하자면 나는 루소의 『에밀』이란 책을 초등학교 4학년 때 완독했다. ‘을유’던가 ‘동서’던가하는 출판사의 깨알 같은 활자의 세로줄 문고판이었는데 이건 말 그대로 그냥 자랑이지 천재라서 내용을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후로 『에밀』을 다시 한 번 꼼꼼이 읽어 봐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한 번 읽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어릴 적 읽을 때 너무 어렵게 봤던 탓에 다시 읽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아직까지 재도전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뜻도 모르는 『에밀』을 꾸역꾸역 읽어낸 까닭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첫 문장의 위력 때문이었다.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 모든 것은 선했지만, 인간의 손 안에서 모든 것은 타락한다.”

『에밀』의 첫 문장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물론 책 말미의 해제에 나온 루소의 생애(아이들을 낳는 족족 고아원에 보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책과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냐는 적잖은 실망을 품기도 했다.

2.
내가 쓴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의 첫 문장은 “우리는 자유로이 살기위해 무엇에 맞서 싸우고 있을까? 우리는 과거의 전통이나 망령 혹은 외부의 억압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이루는 존재와 싸우고 있다”로 시작한다. 원래 처음에 썼던 서문의 첫 문장은 이보다 훨씬 더 밋밋하고 무미건조한 문장이었는데 <인물과사상사>의 내 담당편집자인 문 선생이 “선생님! 저는 책의 첫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첫 문장이 독자를 확 사로잡아야 하거든요”라고 충고했기 때문에 고심 끝에 문장은 물론 서문 전체를 새롭게 다듬었다.

아마 그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아도 재미없는 책이 훨씬 더 재미(임팩트)없는 책이 될 뻔 했으리라. 비슷한 맥락에서 본문4쪽 그러니까 서문의 속표지가 시작하는 부분과 뒷 표지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보이는 세계도 지배하게 된다”는 카피 역시 본래는 서문의 본문에 들어있던, 어쩌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을 문장이었는데 이 역시 담당편집자의 눈썰미 덕을 본 문장이다. 내가 썼는데도 편집자가 이 문장을 뽑아낸 것을 보고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약간의 ‘자뻑’을 섞자면 '내가 이런 문장을?' 하고 말이다).

3.
먼 길을 돌아왔지만(이래서 난 짧은 글들, 컬럼 류의 글들이 쓰기 힘들고 싫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내 화법이 에둘러 말하기인데 그런 방식의 글쓰기를 할 수 없으니까)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빅토르 위고’에 대한 것이다.

중학생 무렵 학교에서 유행하던 놀이 중 하나가 <30문 30답>이란 것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궁금해 하는 여러 문항들을 30개씩 한 종이에 적은 뒤에 롤링페이퍼처럼 돌려가며 서로에 대해 묻고 알게 되는, 내 생각엔 제법 유익한 놀이였다. 그런데 내가 만든 <30문 30답> 문항은 질문이 좀 까다로웠던 탓인지 내 질문에 모두 답한 친구가 거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좀 억울한 것이 내 질문이 그렇게까지 어려웠던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작가, 시인, 영화, 영화감독, 역사 속의 위인,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 작곡가, 지휘자, 연주자 같은 평범한 물음이었는데 말이다(음, 적다 보니 이거야 말로 잘난 척으로 비춰질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군. 중학생 수준에 다소 까다로울 법한 질문들이었나). 어쨌든 나는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빅토르 위고’를 손꼽았었다.

나중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좀더 많은 작가들을 접하게 되었고, 당시 고교생 문사 그룹에서는 서양 작가를, 그것도 고전에 해당하는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약간 쪽팔린 분위기였던 터라 자신 있게 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 탓에 ‘빅토르 위고’를 말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 무렵 그 친구들이 내세웠던 작가들은 외국 작가로는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 정도였고, 약간 머리가 깨었다는 친구들은 막심 고리키,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을 주워섬겼다(국내 작가로는 박완서, 이청준 정도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그렇게 말한 녀석들이나 그걸 듣고 같이 아는 체 했던 나 같은 녀석들이나 서로 내심으로는 그 작가의 작품을 과연 얼마나 실제로 읽었겠는가 하는 의심은 있었으리라.

빅토르 위고가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만 못한 작가였다기보다는 우리에게 빅토르 위고가 소비되는 방식이 아이들이나 읽는 『장발장』의 작가쯤으로 여겨졌던 탓이 크리라.

4.

그래도 『레미제라블』은 고1무렵까지는 내게 최고의 작품이었다(물론 나는 『장발장』이 아니라 당시 완역되었다고 했던 『레미제라블』을 읽었는데, 지금처럼 전5권 박스 포장본이 아니라 한 권짜리였다). 그런 까닭에 지금 사람들이 소설이 아닌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 열광하는 것에 이의를 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다만, 소설이 아닌 영화, 그것도 뮤지컬 영화 한 편의 대박을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들과 결부시켜 해석하려 드는 것은 다소 경박한 해프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작품을 쓰고 있던 빅토르 위고도 그랬을 테고, 또 뮤지컬 영화로 재창조한 감독 톰 후퍼 역시 이전에 제작되었던 영화 <레미제라블>들에 비해 혁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묘사들을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고, 그만큼 자본과 권력에 의해 긴박당하고 있는 현재의 시대상황을 비유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에 비해 우리의 호들갑(과잉해석)은 약간 지나쳐 보인다. 그렇게 보고 있는 내 시선의 다른 한 축은 분명 한때 문학을 전공했고, 문학을 꿈꾸었던 사람으로서 이제 와서 문학작품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재조명되는 『레미제라블』과 『빅토르 위고』에 대한 관심과 열광이 아쉬운 탓도 있을 것이고, 이 열기가 고스란히 문학과 작가의 삶에 대한 진지한 재조명으로 연결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레미제라블』이 소개된 역사는 제법 길다. 얼마 전 출간된 박숙자 선생의 『속물 교양의 탄생』에서도 잘 다루고 있지만 일제시대 조선 문사의 대명사였던 춘원 이광수가 추천했던 책 가운데 이미 『레미제라블』과 『테스』가 있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빅토르 위고와 레미제라블’이 그저 시류를 쫓는 한 순간의 트렌드에 그치기보다 이 지점에서 그의 대표작들을 통해 혁명이 혁명을 배반하고, 다시 혁명이 혁명을 배반하던 당시 프랑스와 유럽의 역사, 그 시대를 살아갔던 민중들에 대해 뜨거운 사랑과 열정을 보냈던 작가의 시선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함께 읽어보는 건 어떨까?

5.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집필하기 시작한지 16년 만에 탈고했는데 이 작품을 출간하기 까지 다시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작품을 탈고한 뒤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친구에게 “창문 너머로 비쳐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마침내 끝냈다네. 이제 죽어도 좋아”라고 편지를 썼다. 대문호가 그처럼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으므로 영화로, 뮤지컬로 매체가 바뀌어도 그토록 오랜 시간 사랑 받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앞서 나는 첫 문장이 주는 감동에 대해 말했는데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마지막 문장이 주는 감동에 대해 말하고 싶다.

“It is nothing to die. It is horrible not to live. 죽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진정으로 무서운 건 제대로 살지 못한 것이지.”

* 이왕 빅토르 위고를 제대로 읽어내고 싶다면 작가 스스로 가장 뛰어난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은 『웃는 남자』도 권하고 싶다. 이 작품은 빅토르 위고의 망명시절에 쓰인 작품으로 『웃는 남자』에 등장하는 주인공 ‘웃는 남자’의 캐릭터는 이후(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영화 <배트맨>의 ‘조커’와 <공각기동대>의 ‘웃는 남자’(공각기동대의 여러 시리즈들은 J.D.셀린저의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 중에서 <웃는 남자>는 셀린저의 『아홉 개의 짧은 이야기』 중 하나인 동명의 단편에서 따온 것이지만)'의 원형질을 이루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국내에는 『레미제라블』이나 『노트르담의 꼽추』에 비해 거의 알려져 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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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