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대학시험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한 젊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뭐라 특별히 해줄 이야기도 없고 하여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내 경험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대부분 별다른 장애 없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도합 12년을 학교에 다닌다. TV광고에서 할머니가 축구 선수 박지성을 '학생!'하고 호명하자 그가 웃으며 돌아서던 것(물론 젊음을 강조하려던 거지만 학생과 젊음은 이음동의어이기도 하다)처럼 '학생'이란 호칭에는 많은 것이 녹아있다. 비록 그 시절엔 학생 신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미처 잘 깨닫지 못할 수도(물론 '학생'이란 신분이 노예처럼 인권을 접어두고 살아가야 하는 한때가 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망각하지는 말자) 있지만 원튼 원치 않든 우리는 12년을 '학생'이란 신분적 외피를, 학교라는 조직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이 신분적 껍데기 혹은 번데기를 탈피하고 성인이 되는 한국의 성인식이 대학입시다. 실업계 고교의 경우엔 취업을 통해 좀더 일찍 그 시기를 맞이하지만 대학생이란 신분이 이들에 비해 약간 유보적인 입장이긴 하더라도 말이다. 슬프게도 대한민국의 애벌레들은 애벌레 시절에 자신이 어떤 나비가 될지, 되고 싶은지에 대해 거의 전혀 고민해볼 시간이 없거나 그와 반대로 너무 일찌감치 날개를 접어야 한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낀다. 교육 문제가 워낙 갈등이 첨예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교육 문제에 쏠린 관심의 대부분이 빈곤계층 혹은 강남 부유층에만 집중되는 것 역시 문제다. 마치 맨 앞줄에 앉아 선생님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공부 잘하는 녀석들과 맨 뒷줄에 앉아 학주(학생주임)의 감시대상이 되는 녀석들 사이에 있는 아이들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건지 잊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조용하게 잊혀진 아이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키우는 내 자식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사실은 곧잘 망각된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아이들 이야기다. 내버려둬도 부모 세대의 부를 대물림하여 걱정 없을 친구들, 부모의 직업이 지닌 유용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그 길을 향해 가리라 결심한 다소 영악한 친구들 말고, 적당적당한 부모의 재산과 적당적당한 관심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에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해 별반 고민해보지 못한 아이들 말이다. 사실 내가 대학원을 다녔던 성공회대에 진학한 친구들 중에 그런 친구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특출나게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히 모나지도 않아 점수대로 '인서울(in seoul)'하긴 했는데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자신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왜 공부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별로 없는 친구들 말이다.

나라고 해서 이런 친구들에 대해 뭐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다만 한 가지는 오래 전부터 고민해왔는데 우리 아이들에게 국민윤리 말고 제대로 된 철학공부를 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대학에서조차 철학과가 점점 사라지는 마당에 이게 무슨 꿩소리냐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서점에 나가 아이들 교재를 살피다보면 나도 모르게 놀랄 때가 참 많다. 아이들 논술교재의 질이 높고, 때로는 나도 읽어보지 못한 책들에 대해 이 친구들이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할 때가 있다.  간혹 어린 나이에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친구들을 보면서 이 친구들이 이런 공부를 해서 생각의 깊이가 남다른 데가 있구나 할 때가 있었는데, 다른 한 편으로 그 시대가 선택한 양질의 고전(정전)을 다이제스트로 읽어서 상식을 넓히는 것 못지 않게(이런 독서에 폐단이 많다는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이런 독서법 자체가 무용하다고 말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독서에 있어서도 많은 방황이 그만큼 많은 걸 알게 해주고 살찌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때 프랑스의 고교생들이 공부한다는 바깔로레아(Baccalauréat)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냥 그 책 몇 권을 읽는 것보다 실제 수업을 통해 그와 같은 주제로 친구들과 토론하는 수업을 진행해 보는 것이 몇 배의 도움을 준다.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신의 삶에 대해, 삶의 목적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건 방황을 줄여주자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좀더 많이 방황하고, 좀더 많은 걸 느끼게 해줄 필요에 대해 말하는 거다.

'고향'이란 마을공동체(Gemeinschaft)를 상실한 현대의 인간에게 '소속'이란 냉정한 사회(Gesellschaft)로부터 자신(소속감은 물론 자아정체성까지)을 보호해주는 든든한 외피이자 갑옷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입시 실패란 개인에게는 단지 대학 입학의 실패 혹은 대학 입학의 1년 유보가 아니라 학생이란 신분과 학교란 집단에 대한 귀속감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박탈당하는) 것이 된다. 작게는 십수년간 당연히 받아오던 학생 할인 혜택이 사라지는 소소한 변화로부터 크게는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오랫동안 몸에 잘 맞는 유니폼을 입고 있다가 혼자 헐벗은 채, 허허벌판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내가 그랬다.


photographed by Walker Evans : depression fashion floyd burroughs working boots

 

12세기의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자였던 수도사 휴고 오브 세인트 빅토르(1096~1141)는 "자신의 고장을 달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심약한 초심자이리라. 어디를 가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건한 사람이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온 세상을 낯선 곳처럼 느끼는 사람이리라. 심약한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세상의 한 곳에만 고정시킨다. 강건한 사람은 그 사랑을 모든 장소로 넓힌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그 사랑 자체를 끊어버린다."라고 했던가. 자신감이란 자기를 믿고 신뢰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때의 자기란 모든 점에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완벽하지 않고,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신뢰하고 거기서부터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자신감이다.

학교 교육이 직업 교육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지만, 직업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에 대한 고민의 대부분을 채울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교육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일 때가 많다. 예전에 어느 선생님께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게서 교사란 직함을 떼버리고 나서도 과연 아이들이 내게 배울 것이 있을까?" 마찬가지 의미에서 우리는 과연 판사에게서 그 법복을 벗겨버리고 났을 때도 과연 그의 심판이 공정할 것이라 믿을 수 있을까? 때로 우리는 가장 중요한 '나'를 어떻게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고 싶으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잊어버리고,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고, 그저 남들처럼, 남들보다, 남만 못하게 살지 않기 위해 헉헉대며 여기까지 아무 생각 없이 와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허허벌판에서 홀로 헐벗은 채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 앞으로 10년 후 나는 어디에 서 있게 될까? 난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그런 마음과 기대를 품고 살았다. 내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재산 따위가 아니라 내가 어떤 인간일지 그것을 궁금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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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