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論語』先進篇) - 공자

내일 세상이 멸망하는데 당신에게 그것을 막을 힘이 있음에도 그리 하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을 비겁하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아서 그리 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내일 세상이 멸망할리도 없고, 당신에게 그것을 막을 힘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내일 갑자기 모두 사라질리 없고, 그와 반대로 당신이 내일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서도 안되겠다.

나는 공자의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란 말의 무심함, 요즘 말로 그 시크함을 좋아한다. 언젠가 군주(왕조)의 삶과 민중의 삶은 다른 것이고 다른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군주(왕조) 혹은 창업자의 삶은 '나 아니면 안 되는 삶'이지만 민중의 삶은 '우공(愚公)의 삶'이기 때문이다. 옛날 북산에 살았던 90세 노인이 태행산과 왕옥산을 평지로 만들려 했을 때 모두가 그를 비웃자 우공은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이 있고 내 자식이 죽으면 내 손자가 있고 손자가 또 자식을 낳는데, 산은 언제고 불어나지 않으니 어찌 평지로 만들지 못할 까닭이 있는가"라고 답했다.

나는 한때나마 혁명을 꿈꾼 적이 있는데, 그뒤 꽤 오랫동안 좌절해 있던 기억이 있다. 거의 10년여의 방황이 있었고, 부끄럽지만 그 후 정신을 차린 뒤에도 틈틈이 방황하여 실수와 실패를 산처럼 쌓아올린 인간이다. 그런 나를 구원한 것은 우공의 삶이었다. 그것이 꼭 내 자식이 아니어도 좋다. 억압이 있는 곳에 해방이 움트듯 비록 지금의 세상이 내 마음에 들지 않고, 이 세상이 과연 바뀌겠는가 절망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지금의 나는 그것을 하지 못할 지라도 언젠가 누군가는 내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일들을 또 하려고 나서지 않겠는가.

왕조의 역사, 창업자의 역사란 '내가 아니면' 그렇게 무너지고 허망하게 망가지는 것이지만 우공의 역사는 그렇게 꾸준하게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신에게 현장에서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현장을,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공부를 하라. 당신이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부채를 의식하고 있는 동안에는 당신은 오늘의 고통을 담보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싸우는 사람들의 싸움 역시 내일을 위한 것이듯 말이다.

다만 당신이 오늘 몰두하는 그 공부가 보다 나은 내일의 우리를 위한 일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내일 당신의 삶으로 증명하면 될 일이다. 고독하고 힘든 일이겠으나 오늘 여러 현장에서 우리를 이끄는 지식인들의 목소리 상당수는 과거 현장에는 없었던 이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 시절, 그 자리,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그 부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많은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오늘 후회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누구도 당신을 비겁하다 하지 않을 것이다.


2. 어떻게 하면 소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押丁解牛(포정해우) 중국 전국시대에 소를 잡는 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포정(丁)’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포정이 궁정 잔치에 쓰일 소를 잡고 있었다. 마침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왕이 그의 솜씨를 보고 감탄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소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은 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으려고 했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지 3년이 지나니 어느새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19년이 흐른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소의 살과 뼈, 근육 사이의 틈새를 봅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칼이 지나가게 합니다. 이런 기술로 단 한 번도 칼이 살이나 뼈와 부딪히는 실수를 한 적이 없습니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 이유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백정은 칼을 가지고 소의 살을 베기 때문에 1년 만에 칼을 바꾼다. 그렇지만 포정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았다.

소의 뼈와 근육 사이에는 어쨌든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그 틈새로 칼날을 집어 넣어 소를 잡기 때문에 칼날이 전혀 무뎌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를 오래도록 하다 보면 이치에 도달하는 법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오래도록 상대하다보면 아이들의 꿍꿍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보면 그 꿍꿍이, 그 마음 속을 헤아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혹은 낙천적으로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산더미인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가령, 나는 아직도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고, 그 서슬에 놀라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슬퍼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면 가슴이 벌렁이는 이유를 알 수 없고, 바다의 푸르딩딩한 표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야 알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어느 순간의 나는, 내가 도통 아는 것이 없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일투성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 한다.

가령, 나는 하늘이 푸른 까닭이 과학적으로야 빛의 산란에 의한 반사가 주로 푸른빛의 파장에 가깝게 일어나기 때문에 가을의 하늘이 그토록 높고 푸르게 빛남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일 뿐 그것이 정녕 푸르게 빛나야 할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촛불이 불타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으나 그 빛을 보면서 사람들이 오만가지 생각과 상징을 댈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재간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자신의 평생 반려로 삼고자 노력하는 이유,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에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등 지장이 없음을 깨닫는다.

때로 종교의 효용성을 되묻는 이들에게 나는 종교를 이렇게 정의해 대답하리라 마음먹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종교란 것은 죽음(혹은 내가 타인을 위해 나의 이익과 욕망을 희생하는 이유)에 대해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인간의 정신이 창조해낸 부산물이다. 이런 멋대가리 없는 이유밖에 만들어낼 수 없는 내 생각의 한계가 몹시 부끄럽지만 그런 까닭에 나는 낙엽 지는 가을 창가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갈 때 가슴이 벌렁거리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인생의 깊은 의미는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는 걸 안다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 나머지는 세상의 순리에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세상은 나 없이도 어제처럼 내일도 그렇게 흘러갈 테니까. 누군들 그 이유를 다 알고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비록 이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마음으로 이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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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