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는 괴물과 살아가기 위하여....


솔직히 침잠(沈潛)해 있고 싶었습니다. 그간 너무 많은 말들을 대책 없이 쏟아냈다는 생각과 나의 말들이 굳건하게 서 있는 무감무심(無感無心)한 벽 어느 한 자락에 더러운 오물도 되지 못한다는 참담한 부끄러움이 말을 망설이게 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 다른 이들을 이끌고 시내를 건너고 계곡을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전쟁에서 정의로운 전쟁과 부당한 전쟁의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막연하게 정당하지 못한 어떤 폭력에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게 되는 폭력은 그나마 정당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내 집에 침입해서 내 일가족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노리는 도적 떼에게는 저항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미약한 인식일 겁니다.

우리가 배워 온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인식이란 대략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기에 가족을 만들고, 그 가족들이 모여서 부족이 되고, 민족이 되고, 그들 나름의 영토와 주권을 가진 국가를 만들어서 그들 자신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려 했다는 순진한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하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그 안에서 행해지는 가정 폭력도 존재하고,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는 범죄는 연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은 어쩌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민족이란 관념은 근대의 산물이라고들 합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내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길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도 나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씨족의 족보엔가는 올려지고,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경로가 정해집니다. 마치 통조림 공장의 통조림이 일정한 유통경로를 지니고 만들어져 유통기한이 지나면서 폐기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도 여러 가지 규정에 의해 이미 통제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제가 이 모든 것들을 부인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엔 저란 사람의 그릇이 너무 작지요.

조국은 당신의 피와 땀을 요구한다, 들어줄 것인가?

김선일 씨의 피납 소식이 알려져서 인터넷이 시끄럽던 지지난 주 화요일에 편집회의가 있었습니다. 아랍의 위성방송인 알자지라를 통해 김선일 씨 피납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부 당국이 직접 협상에 나선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편집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견도 대체로 낙관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저는 속으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 가운데서도 속으로는 저처럼 생각했지만 차마 한 사람의 목숨을 두고 이러느니 저러느니 말하는 일 자체가 불경스럽단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김선일 씨의 “살고 싶다”는 절규를 들었고, 그가 군인도, 정부 요원도 아니고, 평화활동가로 자청해서 그곳에 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만 먹고 살기 위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엔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남들처럼 아니, 우리들 자신처럼 누리고 싶었던 사람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방송을 비롯한 매스미디어에서 떠드는 것처럼 그가 별나게 성실하고, 특별히 더 착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회사에서 만난 동료, 내 학교 선배, 우연히 오다가다 마주쳤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 바로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이죠.

저는 김선일 씨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여러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국가란 나에게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정보 없이 제게 암기되어 술술 나오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타이핑하면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귀가 내 안의 마인드맵에 이렇게 잘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태어나 교육이란 것을 받는 바로 그 첫날부터 아무런 고민 없이, 셀 수 없이 행해진 이 의식(儀式)들이 내 의식(意識)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국가가 무엇이기에, 민족이 무엇이기에 나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해야 하고,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인지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국가는, 민족은 내게 조국의 아들, 민족의 딸이 되길 요구하는 것인지요.

조갑제(월간 조선 편집장) 씨 같은 경우라면 저의 이런 반국가적 사고방식을 규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한 개인이 사라지면 내 안의 우주뿐만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던 우주도 사라집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남기 위한 욕망을 지녔고, 그것을 추구할 당연한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타인도, 그것이 설령 나를 이 세상에 내보내준 부모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시 거둬들일 권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국가와 민족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나가서 죽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타인을 위해 혹은 사회를 위해,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결심을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의에 의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국가는 이런 개개인의 목숨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와 민족을, 나의 가족 혹은 나의 생명과 동일할 것으로 아니 그 이상의 어떤 존재로 생각하도록 세뇌 받았습니다. 나의 생명과 안위를 곧장 국가와 동일시하게 되었지요. 저는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리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그런 인식을 강요했던 국가주의자들은 정작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은 국가나 민족을 위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들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생각하라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생각하기에 앞서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생각하라는 케네디의 말은 최소한 대한민국에서는 허구입니다. 일제의 잔인한 식민 통치에 저항하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던 독립운동가들은 우리가 독립한 몇 년 뒤 그들을 감옥에 가뒀던 일제의 주구들이 다시 대로를 활보하면서 자신들을 다시 감옥에 가두는 경험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얼마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수도 서울을 사흘 만에 포기하고 달아나면서도 서울 시민들에겐 정부가 끝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할 것이란 대통령 이승만의 녹음 방송을 돌렸습니다. 서울 수복 이후엔 도강파와 비도강파로 나눠 정부의 방침과 방송을 믿었던(정부를 의심하고 피난한 이들과 비교하자면 도리어 애국 시민인) 시민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형하거나 옥에 가뒀습니다. 이후에도 전쟁 기간 동안 북에 의해 전쟁포로로 잡혔던 이들의 송환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대북첩보사업에 임했던 이들의 생사는 물론, 명예 회복 애초에 약속했던 보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냉전 기간 동안 납북되었던 어부의 송환 문제는 물론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북하여 주중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납북 어부임을 밝히고 한국으로의 귀환을 요청하는 국민에 대해 한국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기관인 대사관 직원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며, 국가를 생각해야지 당신이 세금냈냐고 오히려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수지 김은 한국 국적을 가진 평범한 국민이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살았던 여인이었지만 남편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그녀를 간첩으로 몰았고, 우리 정부는 자세한 조사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리어 정권 안보 차원에서 그녀를 간첩으로 규정하고, 그 유가족들을 억압했습니다. 남편은 그동안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며 벤처사업가로 행세했고, 그런 일련의 공작을 추진했던 안기부장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었지요. 그런 중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백화점이 무너져 죽고, 성수대교가 끊겨서 죽고, 유람선이 불타서 죽고, 사람들은 지하철에 갇혀 오도가도 못 하고 죽거나 이제 유치원, 어린이집에 갓 입학한 어린 생명들이 밤사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건사고가 잇달아 일어날 때마다 정부는 재발방지를 약속했고, 그것은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서도 매일반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 개혁과 참여를 기치로 한 노무현 대통령은 다르리란 기대를 했었습니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희?제마 부대의 이라크 파병 결정을 내릴 때조차 여당이 소수인 상태에서 미국과 수구보수세력의 힘에 의한 강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다고 믿었고,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것이 현실정치의 한계라고 여겨주었습니다. 그러다 대통령이 탄핵당했고, 잇따른 총선에서 소수 정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여당이자 원내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이라크 추가 파병 원칙을 재천명했고, 그 다음날 우리 김선일 씨가 참수당했습니다. 정부와 청와대,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물론 주무 부서인 외무부 어디에서도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서로가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 이 사태를 두루뭉수리하게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AP통신에서는 이미 사전에 김선일 씨 관련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해 이를 한국 정부에 문의했으나 한국 정부는 피납자가 없다며 이를 부인했고, 우리는 알 자지라 방송이 있기 전까지는 “살고 싶다, 살려 달라”는 김선일 씨의 피 끓는 절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고립당한 채 홀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처절하게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었습니다. 그는 병역의 의무도 다했고, 세금도 냈고,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특별한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이고, 국민이었습니다. 저 자신과 동갑내기였습니다.

국가의 3요소 - 국민, 주권, 영토에 우선하는 안보는 누굴 위한 것인가

우리의 민족주의는 김구 선생이 이야기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우리들의 이익, 우리들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부당함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김선일 씨 본인조차 피납되기전 친구에게 보낸 이 메일에서 미군의 학살에 대한 증거 사진이 있다고 말합니다. 김선일 씨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더 잘 알려질 것이라 믿는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우리는 공감을 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선일 씨의 죽음이 공허한 분노의 메아리로 돌아와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는 대한민국이 힘이 없어서 그런 일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힘은 이미 충분합니다. 강대국 미국민도 이라크에서 죽었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에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죽은 것도 아니고, 오무전자의 노동자들이 죽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죽은 원인은 분노와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안타까운 마지막 숨을 거두던 날 미군은 팔루자를 폭격해 이라크 민간인 20여명이 숨졌습니다. 미군은 우리의 광주 5.18 무렵 이라크 팔루자를 포위 공격해 800여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라크인들은 오랫동안 평화를 원했으나 사담 후세인의 독재정권 밑에서 그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애국 게임에 희생당해 왔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 끌려 나갔고, 쿠웨이트 침공에 끌려 나갔고, 걸프전에 이은 미국의 침공으로 세기를 넘기며 수십년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평화는 이라크인들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그들의 힘으로 국가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평화와 재건을 목적으로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한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들이 원하지 않는, 미국의 요구에 의한 이라크 파병이란 사실은 우리들 자신부터 잘 알고 있은 일입니다. 김선일 씨는 왜 이역만리 먼 타국에서 목이 잘려 숨져야 했습니까? 그건 그의 조국이 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라크에 파병하는 나라 한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는 전쟁에 병사를 내보내는 나라 대한민국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의 조국이 국민 한 사람의 희생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 그런 정권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사회 시간에 국가의 3요소를 배웠습니다. 국민, 영토, 주권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국가안보란 말 앞에서 침묵할 것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요? 정권을 위한 안보인가요? 국민을 위한 안보인가요? 어떤 이들은 제게 되묻고 싶을 겁니다. 네가 이라크인들의 손에 죽은 김선일 씨가 아니지 않느냐? 그가 이라크 근무할 때 이라크 사람들을 진심으로 생각했는지, 그가 그들 손에 죽임을 당한 뒤에도 여전히 이라크인들이 미국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계속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이죠. 김선일 씨의 부모님도 파병에 찬성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김선일 씨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듣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이유는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우리도 언제 그런 일을 당할지 아니, 이미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통해서도 보았지만 우리도 이미 그런 일들을 당했었고,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 중 누가 그런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의 가족이었습니다. 스페인 열차 테러 사건이 있을 당시 집권 여당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여당은 그 사실을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으로 규정하려 들었습니다. 스페인의 새로운 집권당은 이라크에서 철군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테러로 죽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이라크에 또다시 대규모 전투 병력을 파견하자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노에 분노로 대응하려고 합니다. 이라크의 테러리스트를 상대하기 위해 우리도 테러로 맞서야 합니까?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를 빌려 쓰고 있는가?

저는 가끔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이 과연 우리나라 사람인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나라가 자기 조국이고, 자기 자식들도 계속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은가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 자식들도 살아가야 하는 이 땅을 마치 세든 사람처럼 험하게 다루고, 그들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아이들을 위험 속에 방치해둘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이 나라 위정자들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이 땅을 잠시 빌려 쓰는 사람처럼 군다고 생각되곤 합니다. 어느 순간엔가는 이 땅을 버리고 모두 외국으로 떠나버릴 사람들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안보 없이 국가 없고 국가 없이 국민 없다”는 구호를 들을 때마다 저는 이런 구호를 만들어 낸 사람의 머리 속을 구경해보고 싶어지곤 합니다. 국가의 3요소란 국가가 존속되기 위해 필요한 3가지를 말합니다. 그 3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국가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안보를 가장 위에 둡니다. 안보가 필요한 이유도, 국가가 필요한 이유도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도, 국민도 안보를 위해 존재합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듭니다. 국가안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파병에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조차 입에 침도 마르기 전에 말을 바꿉니다. 당연히 국민들이 테러 대상이 될 줄 알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으면서 국민의 희생이 어느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이때의 국가 안보에 국민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세워진 합법적 정부란 사실을 인정합니다. 정부의 권위도 인정합니다. 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무현 정부를 지지해본 적은 없지만 그 절차와 과정의 합법적인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김선일 씨의 사망 과정과 은폐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지닌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고민해본 결과 저는 이 사건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종철 군이 독재 정부의 국가폭력에 의해 직접적으로 살해당한 사건이라면 김선일 씨의 죽음은 국가권력이 그들 정권의 안보를 위해 한 국민이 타국에서 살해당하도록 방치해둠으로써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는 점에서 결국 국가권력에 의한 살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독재권력이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 중 하나인 박종철을 강제 연행하고 결국 죽였다면, 지금 합법적 국가권력은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파병을 강행했고, 그 와중에 자신들이 구할 수도 있었던 한 개인을 죽도록 버려두었다는 겁니다. 국민들이 그토록 분노하고 있는 까닭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며 그 희생자가 우리들 중 누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때 국민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도망친 정부에서 한 발짝도 더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배타적 타자의 존재와 가위바위보 게임

근대국민국가란 것은 그 자체로 배타적 타자의 존재를 내포합니다. 즉, 우리와 다른 타 민족국가의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타국으로부터의 침입을 전제하여 군대를 양성하지요. 몽고메리는 전쟁의 여러 이유 중 하나, 특히나 현대전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빈번한 전쟁에 대한 또 다른 근본적 이유로 집단에 소속하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을 들 수 있다. 한 사회 안에서 충성심이나 집단의 주체의식, 애국심과 같은 것이 발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웃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적대적이게 된다. 라틴어 hostis가 '이방인'과 '적'을 동시에 뜻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상의 다양한 민족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남다른 문화에 강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문화와 군사제도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국민국가의 존재 자체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됩니다. 마치 “가위 바위 보 게임”에서 서로 가위를 내기로 약속했으나 상대방이 날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모두가 주먹을 내는 게임처럼 입으로는 늘 평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상대방이 언제 날 공격할지 모른다는 의심으로 군대를 양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 제국주의 혹은 일본 제국주의, 중국의 제국주의를 입으로는 비판하면서도 그것은 남의 나라가 제국주의를 하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일 뿐 우리 안에서 제국주의는 절대악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그런 제국이 되지 못한 욕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김선일 씨의 죽음과 같은 사건을 겪을 때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국가는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권위이며 최종 심판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탓에 독재정권 시절 반국가사범으로 분류되던 사람들조차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저항하다 받은 피해와 자신이 행한 투쟁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으려 합니다. 민주화운동 보상이 그것이죠. 우리는 마치 교회 혹은 절, 성직자 혹은 승려를 비난하면서도 예수님과 부처님은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정부와 정권, 정치인은 비판하면서도 국가에 대해서는 무심합니다. 우리 국가가 우리 국민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암암리에 내면화했습니다. 한국전쟁과 냉전 기간의 폭압적인 독재권력 밑에서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제 살 길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나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단속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국가주의는 알고 보면 그런 개인주의의 연장입니다. 작게는 나만 잘 살면 되고, 좀더 크게는 우리 가족, 좀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 우리나라만 잘 살면 되는 식으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에 대해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합니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하면서도 이라크 어린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이런 마음들은 때로 효순이 미선이를 조국의 딸로, 민족의 숭고한 희생자로 숭앙하게 만들면서 그들이 일반적인 여학생들이었고, 그저 집에 가던 길이었다는 사실을 망각시킵니다. 효순이, 미선이 아니 김선일도 조국의 아들과 딸로서 죽지 않았는데, 우리들은 그들을 한 개인의 죽음으로는 슬퍼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그네들에게 민족이나 조국의 아들딸이라는 빛 잃은 휘호를 드리워주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걸까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거나 “예술에는 국적이 없지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표현은 얼핏 들으면 매우 일리있는 말인 듯싶지만 이것은 인류 보편의 가치인 과학과 예술을 국민국가의 영역 속으로 포섭하기 위한 욕망을 숨기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 그리고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민족주의의 태생적 정당성을 기반으로 한 "반외세적, 배타적 자세는 반미 = 세계화 반대/ 민중생존권 투쟁 = 민족적 정체성 강화" 같은 도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라지는 것이죠. 정치적 민주화만으로 국가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그 어떤 국가의 역사에도 자국민을 학살해보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국민 각 개인의 기본권 보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상과 신앙, 표현의 자유는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지, 권력자들이 필요에 따라 "인정한다, 그러나"라며 개인의 기본권을 규제할 수 있다면 국가가 괴물로 돌변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미국이 괴물이냐, 이라크가 괴물이냐, 다른 어떤 나라가 괴물이냐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란 본디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류의 가치를 위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빌미가 되었던 9.11테러 사건이 일어난 뒤에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결국 미국도 당했다”였을 겁니다. 그리고 각종 방송 매체를 비롯해 언론 기관은 앞 다퉈 테러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미국에 대한 비통한 염려와 심심한 위로를 보냈지요. 그러나 연이어 일어난 미국의 아프간 공격 당시 우리 언론들은 아프간 민간인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미국의 9.11테러 때와는 확연히 다른 보도 자세를 보입니다.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공습이고, 테러범들의 공격은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오직 하나 미국은 국가이고, 테러범들은 국가가 아니기 때문인 거죠. 우리는 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희생당한 것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프간의 평범한 시민들이 희생당한 것에도 비통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정부는 김선일 씨의 참수 동영상이 담긴 파일의 유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법적인 근거도 없지만 희생자의 죽음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부는 그보다 먼저 희생당한 미국인 노동자의 참수 동영상의 유포에 대해서는 일체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희생자의 국적이 다를 뿐 잔혹하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그걸 법의 잣대로 삼는다면 당연히 둘 다 금지되었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 정부는 그렇게 원칙도, 철학도 없는 정부란 사실을 자인하고 있습니다.

김선일 씨의 죽음 이후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라크 파병 요구가 강해졌다고 합니다만 저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극히 일부의 정보만을 편향적으로 전달하고 싶어하는 이 땅의 파워엘리트들이 만들어낸 여론 조작의 결과라 생각합니다. 무려 40%가 넘는 네티즌들이 이라크에 전투 병력을 중심으로 파병하라하고, 신임 총리로 지명된 이해찬은 전투력을 보강한 군대를 파병할 계획이라고 천명하고 나섰습니다. 저는 이런 사태를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김선일 씨를 죽게 내버려 둔 사람들이 이제는 더욱 많은 피를 이라크에서 흘리게 하라고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한반도에서 효순이,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것을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광화문에는 수많은 촛불들이 양심을 밝히며 이 땅에서 미군이 나가줄 것을 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한 마디가 삭풍이 되어 그 많은 촛불을 꺼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공을 반대하는 반전평화 촛불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때 광화문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여서 촛불을 밝혔습니다. 한국과 이라크는 먼 나라이지만 생명의 소중함에 경중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미 대한민국 외무부는 극구 부인하던 사실 - “APTN으로부터 피납된 한국인이 있는가?”하는 질의를 받았던 사실 - 을 인정했습니다. 김천호 사장의 행적을 비롯해 이번 사건과 관련한 수많은 의혹들이 있고, 그 의혹들이 비록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그 배후에 미국과 대한민국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국과 우리 정부는 이라크 현지에 나가 있는 우리 정부의 대사관 직원은 물론, 국정원 요원들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김선일 씨 피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에 따라 김선일 씨의 희생에 대해 우리 정부와 미국의 책임이 전무하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드러나고 있는 사실들은 그런 의혹들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설령 그들의 주장대로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책임의 경중을 의미하는 걸뿐 살해당한 김선일 씨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돌아가는 여러 상황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언론은 물론 우리가 진보적이라 믿어왔던 여러 매체들조차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제대로 접근하고 있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록그룹 “U2”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And through the walls we hear the city groan
Outside it's America
Outside it's America

벽을 통해 우린 도시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미국이 밖에 있다.
미국이 밖에 있다.


그렇다면 김선일 씨의 죽음은 단지 미국과 한국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기 위한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빚어진 결과이기만 했을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르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겨 두는 동안, 우리는 개처럼 전쟁터로 끌려 나갈 겁니다. 우리는 김선일 씨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수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첫 번째 기회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고, 두 번째 기회는 이라크 전쟁에 서희/제마부대를 파병할 때였고, 세 번째 기회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노무현 대통령이 결정하려고 들 때였고, 네 번째 기회는 김선일 씨가 수십여일 동안 홀로 고독하게 죽음의 공포와 대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제 우리들 중 누구에게든 테러와 죽음의 공포와 홀로 맞서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국가 안보란 국민을 볼모로 삼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지금 파병 반대를 해야만 하는 이유. 그것은 단지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민간인들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외견상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회가 더 이상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하여, 한 개인의 죽음이 곧 한 우주의 소멸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심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반대말을 죽음이라 생각하지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자연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입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합니다. 자연이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그날까지 타의에 의해 죽임당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전쟁은 죽임입니다. 전쟁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인류는 언제나 전쟁에 반대하다고 말하면서 어째서 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까? 그들은 충성심이나 집단의 주체의식, 애국심과 같은 것으로 포장하지만, 결국 전쟁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이들, 아니 전쟁과는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고, 의약품이 없고, 총에 맞고, 폭격으로 죽어가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즐거운 나의 집"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누가 파병을 주장하나요? 누가 전쟁을 말하나요? 바로 그들이 전쟁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국가의 최상층부에서 피 한 방울 묻힐 일 없이 살아가는 그들이 바로 전쟁을 말합니다.  전쟁은 그 자체로서 비참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란 극한 상황 속에 잠재해 있는 우리들의 야만이 우리들의 삶의 본성을 굴절시키기 때문에 비참한 것입니다. 전쟁이란 잔인한 게임은 우리들이 보호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을 먼저 죽이고, 그들의 삶과 피를 먹이 삼아 살아가도록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전쟁에 반대합시다. 이라크에서 우리 군대를 철수시킵시다. <200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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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