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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판결을 바라보며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의 제정에서 좌초까지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자료를 찾기 위해 "신행정수도건설 홈페이지(http://www.newcapital.go.kr)"을 찾았더니 어느새 다음과 같은 짧은 안내문과 함께 폐쇄되어있었다.

알려드립니다.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2004.1.16 법률 제7062호)'에 대한 위헌판결에 따라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홈페이지의 운영이 중단됩니다.
또한 예정되었던 '국가균형발전과 신행정수도건설 대학생 에세이 현상공모전'도 취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공모전을 준비하셨던 대학(원)생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신행정수도건설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
2004. 10. 21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작년말 국회를 통과해 지난 1월 16일 공포된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이로써 10개월여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뒷 이야기를 남겨놓고 사라졌지만, 이 법안을 둘러싼 그간의 진행과정과 헌재에 의해 위헌 판결이 나기까지 그리고 판결 이후의 사태가 불러올 파장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면 이 법안의 진행과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 법안에 관심이 있던 이들은 익히 알고 있었을 사실이지만,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논의는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던 이야기이다. 1977년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는 국회를 통해 '임시행정수도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아버지 박정희가 염원했던 행정수도 이전을 딸 박근혜가 뒤엎은 셈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감상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지난 대선 선거운동과정에서 노무현 후보는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해 청와대와 정부 중앙부처부터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민주당 선대위 출정식(2002. 9. 30)에서 밝혔다. 같은 해 12월 15일 서울시는 "수도 이전 비용은 최소 54조원이 소요될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고, 이틀 뒤인 17일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노 후보의 서울 이전 공약은 충청인을 속이려는 무책임한 졸속공약"이라고 충남도청에서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사실 노 후보의 수도 이전 공약은 이 후보측에서도 사전에 연구되었던 것으로 노 후보가 이를 선점하자 고민 끝에 포기하고 이를 공격했다는 후일담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선거에서 승리한 노 후보는 이를 지난 2003년 4월 14일 신행정수도 건설추진기획단 및 지원단을 발족시키고, 6월 21일에는 신행정수도 공식 홈페이지를 개설하며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4일 뒤인 25일엔 신행정수도 건설추진 조사단을 구성하고, 다음달인 7월 21일엔 신행정수도특별법안을 입법 예고한다. 입법 예고 바로 다음날인 22일엔 특별법안을 놓고 공청회를 개최하고, 10월 15일엔 특별법안을 국무회의에 제출 심의 의결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0월 21일 특별법안은 국회에 제출된다. 이 법안은 12월 17일 법사위 의결을 거쳐 12월 29일 국회에서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이란 이름으로 찬성 167표, 반대13표, 기권14표라는 우리 국회 사상 드문 표차로 통과된다. 이듬해 1월 16일 특별법이, 4월 10일에는 특별법 시행령이 공포된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4월 17일엔 특별법 및 시행령이 시행된다. 여기까지 '특별법'은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여야 합의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4월 30일 수도이전반대국민포럼은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폐지'를 요청하는 국회청원을 내고, 6월 2일엔 이석연 변호사 주도로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 헌법소원" 추진하겠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이런 움직임과 상관없이 신행정수도 후보지 평가결과를 발표(7.5)했고, 예상했던 대로 '연기, 공주지구'가 1등이었다. 이틀 뒤인 7월 8일 대통령은 행정수도이전 반대 움직임을 놓고, 이를 자신에 대한 불신임, 퇴진 운동처럼 느껴진다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의 이런 발언과 상관없이 7월 12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과 가처분신청이 접수되었다. 그리고 짧은 논쟁 끝에 헌재는 지난 10월 21일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수도 이전이란 일장춘몽(一場春夢)을 놓고 행해진 이전투구(泥田鬪狗)

신행정수도건설 혹은 수도이전, 더 줄여서 왕조적 표현이랄 수 있는 '천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이를 구분해보면 다음의 세 가지 층위로 압축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수도 이전을 찬성하는 시선이다. 찬성하는 측에서는 수도 이전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중앙집중식 행정체계와 경제구조를 개편해 지역간 균등발전과 국토의 균형발전을 꾀한다. 두 번째는 이를 반대하는 것으로 경제문제를 비롯해 국가적으로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제쳐두고 신행정수도 건설이란 문제를 일으켜 국력을 분산시키고, 수도 이전과 관련한 문제는 통일 이후를 대비했을 때,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행정수도 이전 문제는 행정적이든, 정치적이든 필요하다면 하면 될 일이고, 안된다고 하면 안하면 그만이다라는 시선인데, 이는 앞서 둘의 논리가 명분을 놓고 싸우는 일종의 당연논리임에 비해 상당히 유보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당연논리와 당연논리가 부딪쳤을 때 사회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한 예를 들어 독일의 통일과정과 그 뒤에 일어난 수도 이전 문제를 놓고 서독의 수도였던 "본"을 지지하는 측과 과거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을 놓고 독일 역시 수개월간 많은 논쟁과 토론이 벌어졌다. 본을 지지하는 측은 수도 이전과 관련한 경제비용 발생과 더불어 베를린이 과거 프로이센과 나치 제3제국의 이미지를 연상시킴으로 새로운 독일의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베를린을 수도로 주장하는 측은 베를린이 독일의 심장부로서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갖춘 도시로서 통일된 독일의 수도로서 이보다 적합한 도시를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팽팽하게 맞섰다. 전자의 경우든, 후자의 경우든 명분만 가지고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배후에는 서로의 이득에 따른 이해타산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독일은 수많은 논쟁과 토론 과정을 거치며 수렴된 국민 여론을 바탕으로 독일 의회에서 표결에 들어갔고, 근소한 표 차이로 베를린이 수도로 결정되었다. 이후 독일에서 이 문제를 놓고 다시 토론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앞서의 두 가지 당연논리를 이번에는 배제한 체 이번 글을 쓰고 싶다. 수도가 공주연기지역이 되어야 옳은지, 그냥 현재의 서울을 수도로 결정하는지에 대해 상대방을 설득할 자신도 없고, 솔직히 지금까지의 내 입장은 다른 시민단체들이 그러했듯 유보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뒷부분에서 별도로 밝히도록 하겠다.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문제를 살펴보자.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시절 충청권의 신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공약했다. 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후보 시절의 공약이 액면 그대로 정책으로 입안되는 경우도 드물지만, 대통령 선출에 있어서 내건 공약 사항 하나를 국민 대다수의 지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여러 공약 사항 중에서 특정한 사안에 대한 지지만으로 대통령에 선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선거와 공약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대체적인 추세이다.

다시 말해 대통령 선거로 표출된 노무현 후보에 대한 국민의 지지 사유가 그의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지지로 연결될 수 있는가? 라고 했을 때 이 두 사안은 별개의 문제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공약도 법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국회의 인준 절차를 거쳐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행정수도 건설 정략인가? 정치인가?
- 박근혜는 노무현의 복이다.


만약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해 반대한다면 국회에서 논의하고, 이를 의결과정을 거쳐 반대하면 된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이 법안은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아  법안으로 통과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국회에서 합법적으로 통과되었고, 그들 자신도 찬성했던 법안에 대해 막상 정부가 이를 시행하려 들자 찬성했던 야당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반대를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예에서 알 수 있듯 합의의 정신을 위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이 이렇듯 극적인 태도 변화를 가져온 과정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앞서 우리는 행정 수도 이전과 관련한 과정을 일지 형태로 살펴본 바가 있다. 이번엔 대통령 탄핵심판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자. 지난 2004년 3월 9일 국회에서는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고, 3월 12일엔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그리고 즉시 소추의결서를 헌법재판소에 접수했다. 우리 사회는 대통령 탄핵이란 사상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며 여론이 들끓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나올 만큼 심각한 사태를 맞이했다.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은 2004년 4월 15일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지 한달 뒤인 5월 14일 탄핵심판 최종선고에서 탄핵을 각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기간 동안 대통령의 모든 권한이 중지되었다.

법안이 국회 법사위에서 심의과정을 거치고, 국회에서 의결된 것이 12월 29일이고, 대통령 탄핵소추가 가결된 것이 다음해 3월 12일의 일로 기간만 놓고 보자면 2개월 보름 남짓한 기간 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탄핵역풍을 맞아 총선에서 패배한 뒤부터 일어난 일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숨겨진 뜻은 한나라당이 이 법안에 대해 졸속으로, 총선을 앞두고 충청권 민심을 잡기 위해 정략적으로 찬성했다는 혐의를 부인할 수 없다. 헌재의 위헌 판결이 난 뒤 한나라당이 이를 두고 사과하는 촌극을 벌인 것은 사실상 이를 자인한 것이다.

나는 한나라당이 이를 열린우리당의 장기집권계획의 일환으로 본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수도 이전 찬성을 둘러싼 여러 명분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행정수도 건설에 아무런 정치적 의도 혹은 정략적 의도가 완전히 배제된 순수한 행정적 발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를 정략으로 보았든, 정치적 포석으로 보았든 이를 찬성한 것은 한나라당이다. 이는 상대의 정략을 거부하지 못할 만큼 비겁했거나 혹은 무능했다는 비판,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 역시 정략적이고, 정치적 의도를 가졌다는 지적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래서는 한나라당이 곤란하다. 지금같이 해 가지고는 그네들 표현대로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아무리 바닥을 친다한들 다음 대선에서 한나라당에 표를 줄 국민들이 불안해서 어디 밀어줄 수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박근혜는 노무현의 복이라 말하고 싶다. 아무런 대안도, 개혁 의지도 없이 헌재의 판결에만 기대어 의기양양 4대 개혁입법마저 악법이라 몰아붙이며 힘으로만 해결하려드는 전근대적 야당이 있는 한 열린우리당의 다음 대선은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래서야 박근혜는 노무현의 복덩어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선언정치와 이중의 소외 사이에서

열린우리당과 대통령은 아무 문제가 없었을까?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대통령의 발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발언들을 살펴보면, 노무현식 발전 이데올로기가 제3공화국 시절 박정희의 발전 이데올로기 내지는 그 모델들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잇따른 발언들은 수도 이전을 통한 "정부의 국토균형발전, 지방분권, 수도권 과밀해소"라는 명분과 전혀 상관없는 지점에서 새로운 전선들이 잇따라 만들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발언이 "수도권 기득권 세력" 운운하는 발언이었다.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개혁세력이든, 진보세력이든 이 지점에서 깊이 생각해볼 문제는 대통령의 선언정치가 주는 폐해이다.

정확한 예는 못되겠지만 "성매매특별법"을 보자. 이 법안이 제정된 것은 지난 3월 22일의 일이었고, 이 법안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9월 22일의 일이었다. 내 기억이 빈약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법안이 발의되고, 통과되는 동안 이와 관련해서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발의에서 시행까지 걸린 6개월의 시간 동안 이 법안이 시행될 경우 일어날 사회의 제문제에 대해 정부가 대안을 마련했다는 이야기 역시 듣지 못했다. 물론, 이 법안에 대한 나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찬성이고, 이런 법안인 경우엔 일단 법률로 제정해 시행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지켜보며 보완하거나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유의미하다고 본다.

그만큼 성매매와 관련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후진적인 탓에 이런 법안의 경우엔 먼저 법안을 통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사회적 논의의 활성화란 측면에서 보탬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창가 포주들이 기획한 시위이든, 그곳의 매매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시위이든 상관없이 실제 우리 사회의 여성들에게 허용된 경제행위의 폭이 극히 협소하다는 문제의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궁극적으로 공창제를 시행하든, 성매매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든 성매매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본질 가운데 하나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여성의 성에 대한 인식 전환과 우리 사회의 성문화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비록 논란의 여지, 문제는 많으나 그 첫 단추로 실시된 법 시행만큼은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 법안의 제정되고 실시되기 까지 정부 차원에서 보여준 홍보나 설득의 문제, 대안 모색의 불철저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으며, 이런 여러 시행착오들이 신행정수도 건설의 좌초라는 결과물로 드러난다. 결국 성매매특별법의 시행이라는 취지는 좋으나 그간 사회의 음지에서 소외되어왔던 여성들이 또다시 소외되고 마는 결과가 되었듯, 신행정수도특별법의 좌초는 그간 소외되어 왔던 충청권 시민들의 또 다른 피해를 불러온 결과가 되었다. 노 대통령의 선언이 잘 먹혀들 때도 있지만, 종종 전선을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하거나 너무 많은 적들을 만들어내는 지나친 명분론이 문제가 될 때도 있다.

헌재의 결정에 대한 예측과 실패

행정 수도 이전을 둘러싼 논의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그간 사회적 이슈에 대해 조목조목 나섰던 시민사회단체들의 발언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거나 발언의 내용 역시 어느 일방을 편드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찬반을 둘러싼 당연논리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계산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 만큼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거나 양자의 의견이 모두 나름대로 일리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헌재의 위헌 판결 이후 강금실 전 법무무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위헌 판결이 날 수도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는 것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는 수도이전을 찬성하는 측의 주장대로 헌재의 보수성을 판사 출신인 강금실 전 장관이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나라든 헌법재판소나 사법부는 다른 권력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비록 답답해 보이더라도 법조문에 의거한 심판이라는 사법부의 존재양식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사법부는 사회가 일반적으로 도달한 상식 수준이라는 한정된(그것이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범위 안에서 판결함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법률의 조항에 의거해 판단을 내리는 원칙은 그렇기에 더욱 중요하다.

다시 말해 나는 헌재가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이를 “위헌”이라고 판결하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있다. 수도 이전과 같은 국가적 중대사가 헌법재판소에서 합헌성 심사를 받고, 이것이 좌절된 것은 나름대로 그간 권위주의(군사독재) 정부 시절 무시되어 온 헌법에 의한 지배가 이제는 뿌리를 내리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헌재가 어째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관슴 헌법을 근거로 삼았는가? 하는 것과 구태여 판결을 내리지 않아도 될 것을 자신들 소관 삼아 판결을 내렸는가? 하는 것이다.

수도 이전 문제로 헌재가 내릴 수 있는 판결에 대해 나는 크게 세 가지로 추측하고 있었는데, 대단한 상식은 아니나 나의 상식이나 추측에서 완전히 어긋나 버리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내가 추측하고 있던 첫 번째는 합헌 결정이고, 두 번째는 헌재에서 심사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반려하는 경우, 세 번째는 절차상의 이유를 들어 국민투표 과정을 거치는 것을 전제로 한 위헌 판결이었다. 이 경우 첫 번째는 논외로 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결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리 헌법에서 수도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으므로 이에 대해 헌법 차원에서 논의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려 국회에서 재논의 하도록 권고하는 수준에서 심판을 반려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헌법 규정으로 수도를 정하고 있는 나라는 많지 않으며 설령 그런 나라들이 있는 경우를 살펴보면 대개 과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과 같이 권위주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규정이란 점을 지적하고 싶다. 또 한 가지는 앞서 독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행정 수도 이전 같은 문제는 정치적 절차에 따라 규정되고, 해소될 문제들이 해소되지 못하고, 헌법 재판이라는 사법적 절차에 의해 판단되는 것은 가뜩이나 불구를 면치 못하는 한국 정치의 비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삼권 분립의 원칙에서 행정과 입법, 사법은 서로의 위치를 지켜야 하고,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사안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마땅하다.

세 번째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을 전제로 한 위헌 판결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은 있다. 왜냐하면 국민투표의 실시 대상으로 규정된 것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인데 수도 이전을 국가안위와 관련한 사안인지 판단하는 주체, 즉, 이를 국민투표로 물을 것인지 결정하는 주체는 대통령의 재량에 맡기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헌법 정신에 입각한 대통령의 의무로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수도 이전 문제를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 경우 국가의 중요 정책 결정 사안이 있을 때마다 국민투표 주장이 불거져 나올 우려가 있다. 이런 우려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리인 대의민주주의와 의회주의에 대한 훼손, 즉 국회무용론으로 이어진다.

국민의 대표권자인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결정한 사안에 대해서도 일반인이나 집단이 헌재에 위헌소를 제기할 때마다 국회의 결정은 헌재에 의해 부정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느 것이 국가 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인지 확실히 명문화되어 있지 않은 경우엔 언제라도 국민투표에 붙이자는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는 헌재가 어째서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더라도 과도한 법해석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판결을 내려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브레이크 없는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중립기관인가?

1997년 6월 26일 미 연방 대법원은 21세기 인터넷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법안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1년 가까이 끌어온 법안은 ‘통신품위유지법(CDA)'이었다. 이 법안의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인터넷에 명백히 외설스러운 내용(즉, 포르노)를 올리는 사람이나 기업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5만 달러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를 위헌이라 판결한 것이다. 평균 연령이 63세를 넘는 미 대법원의 원로 판사들은 이 사건을 단순한 외설물 규제 법안으로 보지 않았다.

당시 주심 판사이자 대법원 최고령자(77세)였던 스티븐스 대법관이 집필한 판결문에 따르면 미연방 대법원은 인터넷을 하나의 공원이라고 보았다. 휴일이 되면 사람들이 공원으로 삼삼오오 몰려나와 휴식을 즐기고, 평소 못 나눴던 세상 이야기를 나누는데, 인터넷 역시 가상의 공간에 만들어진 공원과 같다. 그런 공간이라면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당연하고, 그 구석에 펜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를 판매하는 가판대가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 가판대가 있다고 해서 공원 자체가 불법 공간이 되지 않으므로, 인터넷 공간을 검열하는 것은 위헌이란 것이다. 대법원은 도리어 인터넷은 성, 인종이나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광장이라면서 정부가 포르노를 제물로 인터넷의 언론 자유를 통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지난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전국 득표율에서 뒤진 조지 부시의 당선을 ‘결정’한 것 역시 미 연방대법원이었다. 앨 고어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논란이 많았던 플로리아주의 무효표에 대한 수작업 재개표를 요구했지만 연방대법원은 ‘시간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이에 대해 5 대 4로 위헌판결을 내렸다. 우리의 헌법재판관들은 국가 중대사안과 관련한 법률의 위헌 여부를 판결한다는 점에서 미 연방대법원과 마찬가지로 영향력이 막대하다. 그러나 미국이 연방대법원 판사를 인준하기 위해 인준절차를 거치는 것과 반대로 우리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3인, 국회가 3인, 사법부가 3인을 선정하도록 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 대법관 임명은 대통령이 관련단체인 미국변호사협회의 의견을 들어 후보를 지명한 뒤 상원의 인준을 받도록 하고 있다. 대법관 임명을 위한 인준청문회는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청문회 가운데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이는 대법관의 판결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법관 한명의 정치성향이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했던 뉴딜 정책과 이와 관련한 12개의 법률안에 대해 미 연방대법원은 위헌으로 판결했다. 이에 대해 당시 천만표 차이로 재선된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방대법원이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보여준 뉴딜정책에 대한 지지를 가로 막고 있다면서 대법관의 70세 정년제(원래는 종신제) 도입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대법관 중 6명이 70살이 넘었으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대법원이 친 민주당계로 바뀔 것을 우려한 휴즈 대법원장은 결국 사회보장법과 노동관계법 등 뉴딜관련 법안들에 대해 5 : 4 합헌판결을 내리도록 이끌었다. 1950~60년대 미 연방대법원을 이끈 얼 워런 대법원장은 원래 공화당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세 번 연임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졌다. 그는 당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인 아이젠하워에 의해 대법원장이 되었는데, 이후 공공학교의 흑백 인종 분리교육을 위헌으로 판결하고, 선거구 조정 문제, 형사 피의자의 권리장전으로 유명한 미란다 원칙 등에 대한 거듭되는 진보적 판결을 통해 미국 민권운동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 워런 대법원장에 대해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그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이 대통령 재직시절의 최대 실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렇듯 미 연방대법원의 판사들에 대해서도 그들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불편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대법원 판사들을 인준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심사 과정을 엄격하게 실시하는 것이다. 한편 일본의 경우 미국의 연방대법원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는 최고재판소는 재판관(대법관)의 정년(70살)만 있을 뿐 별도의 임기는 두지 않고 있다. 대신 일본에서는 ‘국민심사’라는 견제장치를 두고 있다. 대법관 임명권한은 내각에 있지만 임명 이후 첫 중의원 선거 때 국민의 신임을 붇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투표자의 과반수가 재판관에 대해 반대하면 이 대법관은 파면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10년마다 실시되는 중의원 선거 때마다 재판관에 대한 중간평가 역시 치러지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 헌법재판소는 그 권위와 막강한 영향력에 비해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갖지 못한 형국이다. 이제라도 헌법재판소를 견제할 수 있는 브레이크를 준비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심상찮은 판결 - 3권 분립이 위태롭다.

헌재의 위헌판결은 이해할 수 있지만, 느닷없이 관습헌법의 존재를 들고 나온 것은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성문헌법에 근거한 우리의 법률 체계는 물론 앞으로 헌법재판소가 내릴 판결들이 아무런 견제 장치 없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될 것이란 두려움에 기인한다. 그런데 난 이걸 뭐 피하려다 뭐 밟았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성문헌법을 가진 나라에서 관습헌법이라니 그것도 경국대전까지 거슬러 올라 이를 위헌이라고 판결 내린 것은 헌재의 결정이 궁색하게 보이는 대목이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헌재에 묻도록 한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가 합리적으로 갈등을 해소할 수단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진행된 논쟁을 살펴보면 어느 하나도 합의된 결론을 끌어내지 못했고 첨예한 대립을 반복한다. 사회적 입장과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해결해야하는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아니 문제 해소는커녕 도리어 새로운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각자의 이해관계가 대화나 타협으로 해소되지 못할 때 최후의 수단으로 법률의 판단을 맡기게 되는 것처럼, 정치권에서 해결하지 못하게 되자 이를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문제는 앞으로 헌재 역시 사사건건 이런 식의 현안들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하는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고, 헌재의 판결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논쟁거리로 화할 것이란 점이다. 여러모로 나는 헌재의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 왜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려고 하는 걸까?

여기까지 나는 되도록 상식선에서 헌재의 위헌 판결을 바라보려고 애쓴 것이다. 앞서 나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나의 상식에 의거했을 때 헌재는 이를 합헌으로 판결하거나 자신들 소관이 아니므로 행정수도 이전 판결에 대해 판결을 반려하여 되돌려 보내거나, 위헌 판결을 내리더라도 그것은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국민투표를 붙이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헌재가 내린 결정은 헌법을 개정하기 전에는 수도 이전과 관련한 어떤 논의도 완전히 불가능하도록 못 박아버린다. 회심의 일격인 셈이다. 나는 헌재의 이번 판결을 과도한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헌재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반대하고자 했다면 앞서 이야기했던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확고하게 노무현 정부의 정당한 통치행위에 대해 못을 박아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 탄핵 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총선 이전에 결과가 나오지 않은 점이 그랬고, 탄핵에 대해 무효라고 결정하면서도 법에 의한 대통령 탄핵 사유가 이유 없다고만 밝혀도 되었을 판결문에 굳이 대통령에게 충고하는 내용을 담은 까닭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나는 그것을 헌재의 대법관들이 지닌 정치적 보수성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복잡하고 다원적인 사회로 진화해가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각 집단과 개인의 이해관계가 걸린 무수한 현안들이 노출될 것이다. 이를 둘러싼 갑론을박도 무수히 많아질 것이다. 이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부를 바라보게 된다. 복잡한 사회,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1차적 역할은 물론 정부의 몫이다. 그러나 최근의 수도 이전 문제를 바라보아도 알 수 있듯 지방자치와 민주화의 혜택으로 중앙정부의 역할은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축소되었으나 바라는 기대치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것에 못지않다. 모든 사회적 의제들을 더 이상 정부가 독점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입법권을 지닌 국회, 최종심판권을 지닌 사법부, 정부의 정책을 객관적으로 혹은 당파적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양식은 지켜야 하는 민주주의의 제4부라 할 수 있는 언론의 집단 뭇매 속에서 정부의 정책들은 하나둘 좌초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여당 내부의 보수주의자들까지 준동해 그나마 축소된 개혁법안을 흔드는 것이다.

그에 힘을 얻은 탓인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께서는 4대 개혁입법 모두를 악법으로 몰아 이를 헌재에 회부하겠다고 주장한다. 도박판에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게 있다고 한다. 상대방이 어떤 패를 가지고 있는지 미리 짐작하거나 은근히 보여주면서 같은 패끼리 밀어주고 상대방은 그걸 받아 치는 걸 말한다.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해 나는 명확한 입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패를 보여주면서 짜고 치는 고스톱에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빚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설사란 것이 있어, 밀어준 패를 먹고 다음 장을 열어보니 같은 패가 또 나와 결국 아무 것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에서는 어쨌든 헌재가 이겼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대 개혁입법 마저 좌초시킨다면, 그땐 아마 헌재도, 한나라당도 예상할 수 없는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그러니 제발 부탁이다. 정치는 도박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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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는 지난 10월 28일 '2002년 최저생계비결정고시'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헌법이 보장한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하고 있고 장애인이기 때문에 드는 추가지출에 대한 배려가 없어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장애인 이승연 씨 가족이 청구한 위헌확인소송에 대해 재판관 9명의 전원일치 판결로 기각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판결문에서 기각의 이유로 ‘인간다운 생활’의 개념이 상대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국가의 최소한의 조치여부’가 기준이 되며 국가는 최소한의 조치를 재량껏 시행한 것이며 장애인이기에 발생하는 추가지출은 다른 법령에 의해 부담이 경감되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관련된 시민단체들은 성명서를 통해 “시민단체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이미 정부도 2006년부터 인원수별이 아닌 가구유형별 최저생계비제도를 도입키로 결정한 상태”라며 따라서 “헌재의 판결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빈민의 권리를 도둑질하는 행위이다. 빈민은 빈민답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헌재 논리는 가진 자들의 관습헌법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이승연 씨와 그 가족이 청구한 헌법 소원에 대해 2년 반이 지나서야 기각 결정을 내렸다.

<200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