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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문학

조세희 - 침묵의 뿌리 / 열화당



조세희 - 침묵의 뿌리, 그 20년의 역사


좋은 하느님
나는 어떤 때 매를 맞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나는 죽고 싶어요, 죽여주세요 하느님" 하며 운다.
- 5학년 도미숙


조세희 선생의 『침묵의 뿌리』에 대해 서평 혹은 리뷰를 올리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다. 그건 이 책이 내게 아무런 영감도, 감흥도 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서평 혹은 리뷰란 말로 재단될 수 있는 글을 나는 이 책에 대해 감히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리뷰 혹은 서평이 적은 까닭, 이 책이 지난 20여 년간 절판되거나 품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조세희 선생 자신이 워낙 적은 작품을 썼으나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절판되지 않았다 - 다시 말해 수많은 이들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저자 조세희 선생의 이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섣부르게 서평이나 리뷰라는 "말"의 형태를 빌어 말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이 책에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책에 대해서 이론이나 논리적 도움이 아닌 정서적인 기운의 도움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 『침묵의 뿌리』에 대해 섣부르게 무어라 말할 수 없어 오랫동안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침묵의 뿌리』엔 목차가 없다. 첫 장을 열면 바로 조세희 선생의 육성이 들려온다. "지난 70년대에 나는 어떤 이의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책 한 권을 써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 책이다. 그때 나는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바로 10년 전 그 생각에 사로잡혀 또 한 권의 책을 묶어낸다." 나는 직접 조세희 선생을 뵌 적은 없지만, 직간접적으로는 이 분과 인연이 있다. 당신이 『침묵의 뿌리』에서 언급하고 있는 당신의 큰 아들이 고등학교 1년 후배고, 나와는 대학 동기로 다시 엮이는 인연...

"나는 작가이다. 어떤 이의 말대로 소설 나부랑이나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작가는 물론 대단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작가인 나에게 유별난 것이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 잊는 것을 작가인 나는 좀처럼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몇 해 전 이상 기후에 대해 내가 지금 이야기한다고 이상해 할 필요는 없다. ...<중략>...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춥다는 말을 했다.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원고지 위에 농사를 지었다. 작가가 농민과 다른 점은 자기 농토가 없어도 작가는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농토가 없는 농민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나는 농민은 아니지만 이른 봄부터 서둘러 일을 했다. 내가 일할 때 우리 집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놀았다. 작은 아이가 소리를 내면 큰아이가 주의를 주었다.

"조용히 해."

큰 아이는 형답게 말했다.

"형아, 왜 조용히 해?"

"아빠가 글을 써."

작은 아이는 알았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박인 다음 형의 귀에 대고 이렇게 물었다.

"아빠가 글을 쓰면 또 책이 있어질 거지?"

그러나 아이들의 그해 협조는 아무 보람이 없었다."
<본문 19-20쪽>


작가의 아들을 안다고 해서 작가를 아는 건 아니다. 지난 90년대의 어느 날 나는 80년대가 잉태했으나 끝끝내 사산되어버린 혁명의 불운한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마치 어느 날의 낙서처럼 "내가 그랬잖아/ 사랑하지 말라고/ 많이 아플 거라고.../ 불의 늪을 지나는 것/ 얼음의 갱도에 갇히는 것/ 모래로 성을 쌓는 것이라고/ 세상과 교미하는 일은/ 비루하고 더러워"라고 나의 청춘이 세상에 걸었던 말은 침묵에 에워싸인 채 비루하고 더러워졌다. 내 사랑은 거절당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무시당했다.

그 무렵 만난 출판사 다니던 애인(현재의 내 아내)이 어느 날 우연히 디자인사무실에서 조세희 선생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계간지를 만든다는 거였다. 뜻밖이었다.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는 일도 그렇게 더딘 분이 남의 글을 쫓아다니며 받아내야 하는 계간지를 만든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당대비평』이란 계간지였고, 나는 창간호에 실린 당신의 글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었다(물론 얼마 뒤 조세희 선생은 『당대비평』을 떠났고, 이 잡지의 이후 행보는 다들 아시는 대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침묵의 뿌리』는 1995년판이고,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85년 그리고 올해는 2005년이다.

"1985년 3월, 나는 다시 사북에 다녀왔다.

금년은 해방 4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가 보낸 40년은 중세의 40년 또는 18,9세기의 40년이 아닌 바로 20세기의 40년이다. 나 개인에게도 1985년은 의미를 갖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 1975년인데, 어느 사이에 10년이 흘러간 것이다. 그 10년 속에  1980년이 들어 있었다."
<본문 135쪽>


올해는 『침묵의 뿌리』가 세상에 나온 지 20주년이 된다. 해방 60주년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첫 5년간을 보내고 있다. 1985년에 조세희 선생은 1976년 국제노동기구 ILO의 조사를 인용해 말한다. 당시 우리 노동자들의 주당 근로 시간은 52.6시간인데 비해 미국은 40.4시간, 캐나다 38.5시간이었고, 우리 노동자들이 시간당 0.46달러를 받을 때, 캐나다는 4,97달러, 미국은 4,80달러를 받았다. 이듬해인 1977년 우리 땅 어느 그룹 회장은 78억원의 개인 소득을 올렸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5년 5월 1일자 신문엔 한국 노동자가 세계에서 제일 일을 많이 한다는 기사가 실렸단다. ILO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 시간은 54.4시간으로 10년 전보다 2시간가량 도리어 늘어났다.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 노동자들은 어떨까? 1988년까지 우리나라의 법정근로시간은 주당 48시간이었고, 1991년 이후엔 주 44시간으로 다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법정근로시간이지 실제 근로시간은 아니다. 지난 2003년 통계로 보면 주당 45.5시간을 일한다고 한다. 대신에 비정규직 혹은 주당 근로시간이 18시간 미만인 불완전 고용자의 수가 17만 명대에 진입했고,  비정규직 노동자수는 2001년 5월말 현재 758만 명으로 전체노동자(1천297만 명)의 58.4%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사진기를 메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어질 책이 없어졌지, 아빠?"

작은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그 뒤의 나는 한 해에 한두 가지씩, 몇 가지 사실을 몇 해에 걸쳐 깨달았다. 첫 번째 해에 내가 알아낸 것은, 지구라는 우리 별 사십억 인구 가운데서 일억의 어린이들이 밤마다 배고파 칭얼대다가 잠이 든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해에 깨달은 것은 일억의 두 배가 되는 이억의 어른이 밤마다 배고파 뒤척이며 잠을 청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전우주에 알려진 지구라는 인류의 고향 별 어느 곳에서는 그 수가 밝혀지지 않은 어린이와 어른들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세 번째 해에 나는 사십억 가운데서 일억의 어린이와 이억의 어른들이 날마다 과식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가운데서 몇 천만 명은 혀를 즐겁게 해준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해 노래하고 춤추고, 몇 백만 명은 운동을 하고, 다른 몇 십만 명은 즐거운 다음 식사 시간 전까지 먼저 먹은 것을 소화시키기 위해 소화제를 복용하고, 또 다른 몇 만 명은 치료를 받아야 할 지경이 되어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느 날, 지구라 불리는 우리의 고향별 어떤 도시에서는 역시 그 수가 밝혀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가 영양 과다 섭취에 의한 병을 얻어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지구에서는 못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본문 22-23쪽>


이 책의 표지엔 한 소녀의 얼굴이 실려 있다.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표지에 실렸던 스티브 맥커리의 사진 "아프가니스탄의 소녀"처럼 『침묵의 뿌리』 표지에 실린 소녀의 사진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대변하는 듯한 눈빛을 담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또한 그렇게 느꼈나보다. 소설가 함정임은 "아이가 어미를 기다리는 한 어미란 존재는 전 우주의 희망이 된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 아이가 뿌리의 의미를 알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를 되새겨보곤 한다. 부질없는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매번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나조차 밑둥 잘린 나무처럼 드러난 삶의 구멍을 감당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데 부끄러움이 일어서이다.  ...<중략>...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책을 훑어보기도 전에 아이는 두 손으로 책 표지를 가리고 울먹였다. "이 누나 눈 무서워!" 울상이 되어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왜 무서운데?"하고 "침묵의 뿌리"라고 씌여진 책을 다시 펼쳐 아이와 함께 보려고 했다. 아이는 금방 울음을 터뜨리며 "무서워!"하더니 다시 책을 뒤엎어놓았다."라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21세기를 이미 5년씩이나 살아낸 우리들이지만 우리들 자신은 과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이제 사람들은 가난 혹은 절망에 대해 말문을 여는 순간부터 "입 닥치라"는 눈빛을 보낸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뻔한 설교 따위 집어치우란 얼굴 표정이 역력하다. 도리어 성을 내는 이들도 있다. 생명의 충동은 죽음을 알지 못한다. 죽음은 그저 결과일 뿐이다. 안락함을 꿈꾸는 쾌락의 원칙, 생명의 충동 저 너머엔 분명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무의식의 근저에 가리어진 죽음이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유기체에게 한정된 수량의 생명, 모든 유기체의 결말은 죽음이다. 그러나 너무 이르게 죽음을 체감한다는 건, 생명충동, 쾌락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죽음은 다스려져야 한다. 그래서 문명은 죽음을 금지한다. 문명의 보존을 위해 죽음은 추방당한다. 그러나 죽음은 생명의 그림자. 죽음이 추방된 결과 생명 역시 위험해지고 말았다. 죽음에 둔감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일수록 도리어 죽음의 광경이 흔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1980년 4월 21일. 소위 "사북 사태"란 것이 일어난 날은 우연치 않게 내가 태어난 지 꼭 10년째 되던 날이었다. 조세희 선생은 1975년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쓰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85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 다시 『침묵의 뿌리』를 쓴다. 그리고 1997년, 당신은 "20세기를 우리는 끔찍한 고통 속에 보냈다. 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이 헤어졌고,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죽었다. 선은 악에 졌다. 독재와 전제를 포함한 지난 백 년은 악인들의 세기였다. 이렇게 무지하고 잔인하고 욕심 많고 이타적이지 못한 자들이 마음 놓고 무리지어 번영을 누렸던 적은 역사에 없었다." 고 말한다.

이 책 『침묵의 뿌리』 마지막 장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다운 인간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특히 그 앞에서 또는 그가 알고 있는 가운데 저질러지는 범죄 행위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저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같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남의 말이다.
우리는 80년대에 또 어떤 진행을 맞게 될까? 당신은 아는가?"


나는 2005년 다시 『침묵의 뿌리』를 펼쳐 읽으며 이런 질문을 당신에게 하고 싶다. 당신이 성내고, 귀찮아하는 절망과 가난에 대해 외면할 때, 우리는 21세기에 또 어떤 진행을 맞게 될까? 당신은 아는가? 알리바이라면 우리시대의 시민 모두가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땅 어느 곳의 역사가 2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은 곧 그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명의 밝은 모습, 늘 좀더 밝고 즐거운 풍요와 평온만을 바라볼 때 어두움은 더 깊고, 더 무겁게 자라난다. 너무나 뻔한 설교이겠지만, 이제 우리들은 "침묵의 뿌리"가 더 깊숙히 뿌리내리기 전에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