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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문화망명지 5주년을 맞는 작은 느낌



유서

전태일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의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라도
모르지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 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움만 줄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저는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주제로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공간에 작으나마 사람들과 소통할 공간을 만들기로 처음 결심했던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온통 썩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1987년의 저는 대단한 경험은 아니었으나 고등학생 운동이란 것을 경험했습니다. 90년대의 제가 외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불운했거나 불행하진 않았습니다. 3년간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제가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을 졸업해 직장인이 되었고, 결혼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80년대의 경험이 저에게 민감한 상처들을 남겼던 걸까요. 버림받은 느낌, 상실감, 배신감에 저는 세상을 향해 실천 없는 냉소만을 보냈습니다. 그 무렵의 저는 별을 보고도 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결국 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삶이 앞으로 어떤 것이 되어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에게 약속하기를 나는 자신의 과거를 부인하여 미래를 구하는 짓따위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불가능한 일은 결심 아니라 그보다 더한 맹세로도 지켜지지 않을 거라는 교훈을 내게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어떤 인간도 과거를 딛지 않고서는 현재라는 대지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길 위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고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겠죠.

제게 10월의 기억은 늘 스산합니다. 먼저 '10월 유신'이 생각나고 연이어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있던 일본식 목조 교사(校舍)가 떠오릅니다. 페인트가 일어나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나간 벽과 대비될 만큼 선명하게 칠해진 붉은 페인트 글씨로 쓰여진 '멸공통일, 반공방첩, 10월 유신 과업 이룩하자'는 구호와 함께 10월 27일 아침의 등교길이 생각납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냇가를 걸어 학교로 가는 길엔 아침 밥상 머리에서 들었던 박 대통령의 유고 소식. 제가 태어난 그 날부터 내내 대통령이었던 사람의 죽음이 나에게 무슨 의미로,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당시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앞서걷던 누이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저는 그저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70년 11월 13일. 한 남자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이고 죽었던 어느 날. 그 무렵에 태어난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80년 무렵에 태어난 아이들은, 87년을 살아냈던 그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직장 생활을 하며 종종 충무로 인쇄골목 초입 극동빌딩 뒷편의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그 집엔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서빙도 보고, 배달도 하며 바쁘게 살았죠. 음식 맛이 괜찮았기에 충무로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종종 가곤 했습니다. 그저 무심하게 아저씨 참 일도 잘 하네 하며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0년대의 어느날이었을까요. 90년대 말의 어느날이었을지도... TV에서 87년 6월 항쟁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바로 그 아저씨를 발견하곤 혼자 웃었습니다. 그 분도 그 날, 그 거리에 있었더군요.

2005년 오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변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그 체제를 87년 체제라고 부릅니다. 민주화된 사회, 민주화된 국가... 그러나 민주화 이후의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87년 체제 이후 99년 IMF를 맞이하며 우리 사회는 세계화라는 거대한 격랑 속에서 박정희 개발독재 이후 다시 경제 제일주의로 환원되어가고 있습니다. "노동의 새벽"은 "참된 시작"을 다짐하며 체제 내화되어 갔습니다.

어느 작가는 말하기를 '4.19에서 87년까지는 한 시대였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90년대란, 2000년대란 어떤 시대일까요. 그 작가는 이어 "지난 연대의 거대 담론이 고스란히 부활하지는 않더라도, 그 기저의 정신만은 어떤 형태로든 되살아나리라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작가의 희망 사항이 반영된 이야기겠지요.

평론가들이 '후일담소설'이라고 통틀어 말하는 90년대의 일부 소설들을 일단 긍정하더라도 거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일종의 굴욕감이었습니다. '삶이란 얼마간의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검문소'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80년대를 관통했던 시대 정신을 기억하고, 그 80년대와는 다른 90년대의 삶을, 그리고 21세기의 삶을 여전히 그리고 간교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는 그것이 '관통'이든, '소통'이든 혹은 간통이든 서로 인접한 시기의 시대 정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이념의 과잉이라든지 하는 여러 가지 수식을 필요로 할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90년대와 오늘날의 삶도 역시 후일 기록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제와서 80년대가 얼마나 거창했던 시대였는지를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80년대라는 시기를 역류하며 우리는 상처받은 푸른 생선처럼 펄떡이며 살았음을 기억할 따름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과거를 침묵 속에 묻어두라고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침묵했고, 87년 체제가 구축한 절차상의 민주화로 근대의 민주주의를 모두 이룩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80년대는 '연대의 시기'였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타인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내가 변하고 네가 변하여서 세상을 바꾸자던 그런 공공연한 약속들이 깃발이 되고 구호가 되어 거리에서 표출되었던 우리 역사를 통틀어 드물게 소중했던 시기에 내 청춘을 묻을 수 있었던 것도 이제와 따지고 보면 복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지난 시대를 정리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인류가 착취당하지 않고, 착취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당대에는 성취될 수 없으며, 먼 후대에 이르러서도 영영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되었을 때,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제 삶의 근본적인 태도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순진하게도 역사와 민중이 늘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통해 인류가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에 왔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영원히 실패할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전망입니다. 현재의 정치인들이 과거 운동권 청년시절 그랬던 것처럼 현재의 저는 스스로를 무슨 주의자로 규정할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세상에 왔음을 기억합니다. 그런 점에서 청년 전태일의 결심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는 언제나 제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줍니다. 저는 그의 결심이 정제된 이론이나 논리로 무장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전태일은 그저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을 뿐입니다.

1987년 12월 24일 대통령 선거가 끝난 크리스마스 이브. 서울지역고등학생운동연합은 명동 성당에서 있었던 무기한 농성을 풀었습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렸고, 우리들은 농성을 풀고 작은 촛불 하나씩을 들고 성탄절 분위기로 들뜬 성당을 나와 침묵시위를 시작했습니다. 며칠동안 명동성당의 차가운 바닥에서 밤을 지새운 우리들이 촛불을 들고 나선 명동 거리, 사람들은 여전히 쌍쌍이 팔짱을 끼고 행복한 미소로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무자비한 고문도 없었고, 전경의 진압봉도 없었지만 어쩐지 고문실 곁에서 흘러나오는 한가로운 라디오 방송처럼 세상은 잔인하면서도 평화롭게 흘러갔습니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거짓말을 일삼던 자들을 다시 대통령으로 뽑아 놓고 그 해 연말의 크리스마스는 하염없이 즐거웠습니다.

제가 전태일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방황과 냉소 끝에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체념, 사람을 앞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소박한 진리를 깨우치게 되기까지 저에겐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찾고 만들려는 의지가 전진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깨달음 말입니다. 모순이 있기에 희망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고흐가 그러했듯이 측백나무의 푸르고 싱싱한 잎사귀들이 봄날 하나 가득 피어올리는 푸른 불꽃이었을 겁니다. 그 안에 얼마나 뜨거운 기운을 담았으면 그 불꽃이 푸르게 피어올랐겠는가.

우리의 삶이
그것이 저주라면 저주로,
그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무언가가 우리를 기억하고 또 우리가 그것들을 기억함으로써 기억된다고 믿습니다.

해가 저물고 갈 길은 멀지만 아무도 다시 과거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믿을 수는 없겠지요.
지금 당장 뭘 어쩌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래의 어느 날을 갑자기 어떻게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말을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 온 뒤라 날씨가 청명합니다. 그냥 오늘 하루....

전태일 열사를 잠시 생각해보고, 70년과 80년 그리고 87년과 오늘 2005년...
그리고 2005년 이후의 세계와 나를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당신의 오늘과 나의 오늘이 내일의 우리를 만들어갈 테죠.
오늘 우리의 태도가 내일의 우리를 결정할 겁니다.
내일 날씨가 어떠할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오늘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오늘 무언가라도 하기 위해 저는 문화망명지를 만들었습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오늘 하루 우리가 전태일 열사를 잠시 생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문화망명지가 만들어진 의의는 충분하리라 생각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