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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CY/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일본 만화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

전번 소식지에 보내주신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약속드린 대로 새로운 소식지를 보내드립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이 좀 어렵다고 하셔서 원래 예정에는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서적들을 소개해 드릴 예정이었는데 계획을 변경해서 만화 몇 권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요새 인기있는 만화들 중에서 나름대로 골라보았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일본 만화를 많이 본 탓인지 대개가 일본 만화군요.

대사 각하의 요리사/ 그림. 카와스미 히로시(Hiroshi Kawasumi), 글. 니시무라 미츠루 (Mitsuru Nishimura)/ 학산문화사/ 2000

최근 언론에서 많이 다룬, 어떻게 보면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만화입니다. <미스터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과 마찬가지로 요리가 그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만화이다. 주인공 '코우'는 일본의 유명한 호텔의 프랑스 음식 전문 요리사입니다.(음, 이 '요리(料理)'란 말 자체가 일본식 한자 조어(造語)인 건 아시지요.) 그의 캐릭터부터가 좀 특이하면서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요새 유행하는 일본 만화 캐릭터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캐릭터 설명을 하기보다 그를 설명하는 것이 빠르겠군요. 코우는 호텔에서 대연회를 위한 음식을 마련합니다. 나름의 정성을 다한 것임에도 번번이 음식이 남고,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코우'는 이것이 요리사로서 자신의 마음을 음식에 담아 손님에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호텔은 그 시스템 상 손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는 것이죠.)

이때 그를 설득하려고 하는 나이 많은('나이 많은'과 '경험이 많은' 혹은 '현명한'이란 말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요) 주방장은 그에게 음식이란 것은 최고의 재료를 써서 최고의 요리사가 만드는 것이면 그것이 최고라는 식으로 그를 설득하려 합니다. 이곳을 떠나서 그렇게 좋은 재료를 풍족하게 쓸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것을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 만화의 작자는 만화를 통해 현재의 일본이 처해있는 현실에 대해서 일종의 반성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품 경제의 위력이 사라지면서 일본 사회도 우리와 비슷한(물론 그 강도는 우리보다 훨신 더 약한 것이지만)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일본이 자랑했던 '평생직장의 신화'는 우리보다 일본 사회에서 먼저 깨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아마도 이 만화의 작가는 일본이란 사회의 시스템이 너무 꽉 짜여 있어서 마치 '공무원들의 사회'인양 변화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창의적인 인간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찾고자 하는 인간은 숨이 막히기 마련입니다.(이런 일련의 반성들은 최근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두 편의 일본 영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춤추는 대수사선>과 <포스트맨 블루스>가 역시 그런 류의 비판들을 약하게나마 하고 있다.)


어쨌든 코우는 그런 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베트남 주재 주일대사관의 요리사가 됩니다. 인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그의 요리 역정이 시작되는 셈이지요. 나머지 소개는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만화에도 역시 일본인의 정서가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같은 유교권 문화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때로 공감하면서도 때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 말입니다. 그저 그런 요리만화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이 만화를 보다가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소재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건 제6권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물과 기름」의 내용이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와 베트남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전 참전 중 가했다고 하는 잔학행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감히 일본놈이 이런 문제를 들고 나오다니' 라는 식의 어쩔 수 없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이 만화는 우리의 그런 인식을 살짝 빗겨가고 있습니다.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인 공 대사와 일본인 기자 미우라가 나누는 대사를 옮겨 봅니다.



공대사: 당신이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대체 뭔가?
미우라: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무슨 짓을 했는가, 하는 겁니다.
공대사: 전쟁이지. 그밖에 뭐가 있겠나! 1965년 2월 미국의 요청에 의해 우리나라는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타국으로 진주했지. 우리 한국군은 1973년까지 베트남에 머물면서 약 11,700회에 걸친 대규모 전투와 55만 6000회의 소규모 군사행동을 하고, 적 4만 1000여명을 살상했네. 그리고 우리측도 4400여명의 사망자를 냈지.
미우라: 대체 뭣때문에 파병한 겁니까?
공대사: 돈 때문이야. 미군은 파병하는 조건으로 몇억달러의 돈을 내세웠어. 그 무렵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후의 경제난과 혼란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
미우라: 즉, 비지니스였다는 겁니까?
공대사: 많은 군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싸웠네. 일본인인 자네들은 모르겠지만 한국도 전에 타국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인지라 남베트남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거든. 나는 대학을 나오자마자 남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참전을 지원했네.
미우라: 그 신념은 베트남에 와서는 변치 않던가요?
공대사: 아니....속았다는 걸 알게 됐지. 우리는 제2의 한국전쟁에 가담되어 있었던 거야. 우리는 미국의 전쟁에 아니 기만과 침략에 그대로 휘말려 든거야.
.............중략..............
미우라: 당신은 어째서 미국에 대해선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겁니까? 일본만 걸고 넘어가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대사: 이제 됐네. 자네에겐 무슨 소릴해도 소용없어.....쿠라키 대사. 역시 우리는 영원히 물과 기름으로 남겠군요.



끝까지 말씀드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이만 줄입니다. 이 일본 만화의 내용이나 작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남벌>과 같은 만화에 빠져 있을 때 일본의 젊은 만화가들은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시아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 시장에 출판되고 있는 대개의 일본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면 어느 한 극단만 있지, 객관적이다란 말을 붙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피해의식과 콤플렉스의 일단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조차 일본에 대해 뿌리깊이 남아있는 인식 중 하나는 '군국주의 일본의 부활'이란 망령일 겁니다. 그것은 일본의 우익이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서 그 우려를 더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만화(와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에토스ethos)들은 그런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만화들 중 상당수는 일본의 경제와 정치 그리고 문화를 움직이는 시스템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집단, 마치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 결사조직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세계지배 혹은 아시아 지배전략을 착착 진행시켜가고 있는 것처럼 다룹니다.


그러나 일본이란 사회가 군국주의의 부활이란 우려를 완전히 떨칠 수 있을 만큼 선진화되어 있는 나라도 아니지만 그 반대로 군국주의 부활을 막아내지 못할 만큼 시민사회 형성이 형편없는 곳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SOFA개정과 관련한 일련의 투쟁 과정 중에서 믿음직한 동지를 얻는 성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오키나와의 일본 주민들이었습니다. 다음은 일본과 우리의 의식의 차이 중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01.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