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이성복 시인의 이 시를 연애시로만 읽어선 안 될 일이겠지만,
연애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이 시의 맛을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아니, 단언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지막 두 행의 맛이 절절하게 전해질 수 없다.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내가 억울하니까....

누군가에게 쥐어주지 못한 마지막 편지가 내게 아직 있으니까...

사랑의 끝은 언제나 전해주지 못한 마지막 한 마디를 품기 마련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이현석 (지은이) | 한티재 | 2013-12-09



브루노 베텔하임(Bruno Bettelheim)은 오스트리아 빈출신의 유대계 정신분석학자로 1938년 빈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다하우와 부헨발트에 있는 독일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뒤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줄곧 장애어린이의 심리치료 분야에 종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옛이야기의 즐거움』 같은 책을 썼다. 그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원용해 서구의 어린이 이야기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심리를 분석하면서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머니의 품을 떠나 낯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어린이들의 두려움과 설렘을 담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여행기들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어(母語)의 나라, 모국(母國)을 떠나 낯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두려움과 설렘이 녹아있지 않은 여행기는 가이드북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 하는 '길가메시' 서사시도, '오딧세이'도, '서유기'도 결국 고향을 떠나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들은 왜 길을 나선 것일까? 여행은 여행 그 자체로도 목적이 있지만 다른 한 가지는 추구(追求)다. 주인공은 어떤 계기로 집을 떠나 여러 낯선 장소를 이동하며 갖가지 사건과 인물들과 만난다.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만나 결투를 벌인 뒤 친구가 되고, 오딧세우스는 세이렌의 마녀들을 비롯해 갖가지 대상들을 만나 동료들을 잃지만 결국 이타카로 귀환한다. 손오공 역시 삼장법사를 만나고, 사오정을 만나고, 저팔계를 만난다.

이 책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에는 모두 12명의 주된 인물들이 등장한다.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장 에밀리아(김병화박물관, 시온고 마을, 우즈베키스탄), 이브라힘(시와, 이집트), 하루코(치앙마이, 태국), 테리(침사추이, 홍콩), 까말(포카라, 안나푸르나, 네팔), 미스터 빈(구찌터널, 호찌민 시, 베트남), 타리크(페스, 모로코), 줄리안(시저우, 윈난, 중국), 애드리안(전몰자의 계곡, 엘에스코리알, 스페인), 꾼니(벵메알레아, 시엠레아프, 캄보디아), 초투(우타르프라데시, 인도)가 그들인데, 저자 이현석은 이들을 여행 중에 만나 그들의 삶 속에서 사회와 문화, 역사를 만나고 이것을 다시 자신의 사유 속에서 재구조화한다.

그 기억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게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중략>… 여행지에서 타자와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행하는 것이니까요. 때문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서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결국 이것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마주했던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재인식의 결과물입니다. <본문 8-9쪽>

이현석의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는 그런 의미에서 낯선 곳을 찾아 떠나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여행기이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여행기와 남다른 측면이 있다. 12명의 인물은 12개의 장소에서 12개의 에피소드가 있고, 최소한 12개 이상의 깨달음이 함께 있다. 그 깨달음의 곁에는 이 책의 말미에 소개되고 있는 책들이 있다. 12개의 이야기가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진행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에가와 타츠야(江川達也)의 만화 『골든보이』를 떠올렸다. 이 만화의 주인공 ‘오에 긴타로(大江錦太郎)’는 내가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인생의 롤 모델이다. 그는 도쿄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천재인데 책상에서만 하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대학을 자퇴한 뒤 ‘진정한 공부’를 하기 위해 자전거로 일본 전국을 여행하며 여행지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그는 여러 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을(주로 미인들을) 만나, 업신여김을 당하지만 그는 언제나 이들을 배신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통해 이들을 돕고, 그 자신도 배움을 얻어 새로운 공부를 위해 떠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공부노트'에 상세히 기록한다.

이현석의 그의 공부노트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은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에서 김병화박물관의 장 에밀리아 관장과의 만남 이후 과정을 보자.

모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태어난 땅을 뒤로 한 그들은 정착한 곳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이라는,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토지·언어·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 안에서 살고 있는 다수자인 우리 한국인들이 그녀를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하거나, 그녀의 말투가 이북 사투리와 닮았다고 하여 ‘북한말’로 생각하는 것 모두 소수자로 살아온 그들에게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학자 다나카 가쓰히코(田中克彦)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모어’와 ‘모국어’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모어’란 ‘태어나서 처음 익혀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말’이며 ‘한번 익히면 벗어날 수 없는 근원의 말’이다. 반면 ‘모국어’는 ‘자신이 국민으로서 속해 있는 국가, 즉 모국의 국어를 뜻하며 근대 국민국가가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가르쳐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장치’이다. 다나카 가쓰히코의 정의를 대입시켜본다면 장 에밀리아의 모어는 우즈베키스탄이며, 모국어는 고려말인 셈이었다. 사실, 나를 포함해 한국 영토에서 나고 자란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모어와 모국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비로소 내 눈앞에 모국어의 풍경이 펼쳐진 것은 장 에밀리아 관장의 일성을 듣고 난 이후였다. <본문 57~58쪽>

저자의 걸음을 좇아 세상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살펴보노라면 1984년 1월 인천 출생의 이현석이란 한 젊은이(?)가 그간 쌓아온 내공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저자의 첫 책을 읽는 일만큼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즐거움은 없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취하게 되는 몇몇 포지션들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독자(讀者), 비평가(批評家), 편집자(編輯者), 저자(著者)의 자아를 갖는다. 앞서 두 가지 입장은 보통 일반적인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취할 수 있는 입장이겠지만 후자의 두 가지 경우는 그리 일반적인 입장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책을 읽을 때 이런 입장들 사이를 널뛰기하며 책을 읽는데 젊은 저자의 책을 읽을 때는 주로 편집자의 설렘을 안고 읽게 되어 가슴 설레는 두근거림을 품게 된다. ‘언젠간 써먹을 테다’라는 마음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저작을 저자의 입장에서 읽을 때는 증폭되는 열등감과 자만하는 안도감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읽게 된다. 특히 이 책의 「테리(침사추이, 홍콩)」 부분을 읽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밤 11시 12분쯤 그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훌륭합니다. 이 책…. 흡입력 있네요. 그런데 윌슨 선생 이야기를 앞에 배치한 건 본인의 의도인가요? 한티재 의도인가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6월 30일 저녁, 선전을 통해서 들어오는 인민해방군의 행렬이었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해방군은 마치 점령군처럼 홍콩으로 진주했다. 다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장면에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이의 부모는 나라를 잃은 것마냥 흐느꼈고, 어떤 친구의 아버지는 이미 반환이 되기 훨씬 전부터 뉴질랜드에 가서 취직을 했으며, 어떤 이의 가족은 반환식 일정이 주말과 겹쳐 연휴였던 까닭에 오스트레일리아 가족여행을 다녀왔다고도 했다.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만 반환 당시에 장쩌민(江澤民)이 이야기한 “백 년간의 치욕을 씻었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없는 듯했다. …<중략>… ”그때는 탱크로 점령했고, 지금은 본토의 대기업으로 점령하고 있어. 걔네들도 잘 알고 있는 거야. 오래전부터 무기는 바뀌었다는 걸.“ <보문 125~126쪽>

내가 갑자기 이걸 물어보게 된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저렇게 현장에서 그곳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쉽게 알 수 없는 현장의 느낌과 감정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 이야기 패턴이 조금씩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자 개인의 이야기는 언제쯤 등장할까 기다리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저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나는 어린이 문학과 여행기의 패턴 사이에 공통된 요소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요소는 어떤 경우이든 처음의 사건은 주인공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사건들이 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주인공이 집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무언가를 찾아 나서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이현석은 왜 길을 떠나게 되었을까? 나는 그의 책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를 읽으면서 내내 그런 의문을 떨쳐내지 못했다. 책을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책은 여행을 떠난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의 순서가 연대기적 배치가 아니라면 이 책의 이야기들은 어떤 기준으로 배치된 것일까? 나는 이 책의 중반쯤에서 그것이 궁금해졌다.

순전히 재미만 놓고 따지자면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제일 앞부분에 놓인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편이 가장 재미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일흔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윌슨’이 머나먼 이국에서 온 젊은이와 나누는 대화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1장 「윌슨(마카레나 지구, 세비야, 스페인)」 편을 이 책의 백미(白眉)로 꼽고 싶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음의 인용된 부분에도 있다.

일흔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있던 이에게, 당시 이십대 중반에 불과했던 나의 이야기가 과연 얼마나 흥미로웠을까? 그럼에도 그는 매일 밤마다 이렇게 옥상에 앉아 이국에서 온 젊은이가 어설픈 영어로 말하는 것을 인내심을 가지고 - 하지만 문법과 미국식 단어에 대한 지적은 멈추질 않으며 - 들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가 된 것처럼, 세비야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매일 밤마다 내 이야기를 시간 순서에 따라서 윌슨에게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때 이야기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일반계 고등학교 2학년 때 230명 중 200등에 가까울 만큼 열등생이었던 이야기 - 씨름부만 40명이었으니 사실상 '전업 학생' 중에서는 꼴찌였던 이야기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언제나 인상적인 시작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본문 29쪽>

그가 책 속에 살짝 풀어놓은 자기 인생의 ‘인상적인 시작’은 상당히 흥미롭다.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전교 석차 바닥을 기던 인물이 대학에 갔고, 상경 이후 영화판과 시위 현장을 전전하다가 갑자기 귀향해서 공부를 시작해 의과대학에 들어갔고, 의외로 무탈하게 졸업까지 했다. 게다가 그가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 한 계기는 분명 ‘실연(失戀)’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런데 책을 아무리 읽어도 나머지 부분에는 더 이상 이렇게 재미난 저자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여행은, 특히 배낭을 짊어지고 홀로 나서는 여행은, 스스로를 자발적인 국외자로, 자발적인 이산자로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행은 내가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 '나'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투입되면서 그곳의 사람들과 만나고 충돌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만남을 통해 이해하고 이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공통적인 속성과 완벽하게 다른 습성을 체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과 나 사이에 충돌과 화해가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일상으로부터 탈주를 꿈꾸었던 우리는 스스로 쌓아올린 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본문 12쪽>

갑자기 벽(壁)과 마주선 기분이 들어 난감했다. 물론 이것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疏隔效果) 같이 작가가 독자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책을 중립적(?)으로 읽어주길 바란 결과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난 그것이 그다지 성공적인 장치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행기도 일종의 에세이라고 했을 때, 저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독서를 지속하게 만들어주는 한 가지 동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거의 대부분의 여행(물론 아닌 것도 있지만)은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떠났는지, 왜 그곳이었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매우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고백한다. 한 편으로는 저자의 다채로운 여행지와 만남이 탐나고 부러웠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에선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저자의 이야기 엮어가는 솜씨와 글 솜씨가 시샘을 느낄 만큼 훌륭했기 때문이다. 다소 꼰대(?)스럽게 말하면 과거 어떤 시절의 젊은이들이 농활이니, 공활이니 하는 것으로 청춘의 한 시절 타인을 만나서 성장했다면(나는 지금도 이것이 ‘진정한 공부’ 중 일부였으리라 여기지만, 정작 나 자신은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해본 기억밖에 없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엄기호의 말을 빌리면 군대 또는 해외를 나가는 것이 하나의 통과의례, 진짜 사람을 만나는 과정이 된 듯싶다.


겉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여유 있어 보이지만, 양계장에서 키워진 닭처럼 부모가 대신 선택하고, 대신 살아주는 이 시대의 풍속이 청춘으로 하여금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최대의 장애가 되어버린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현석은 이 시기들을 매우 치열하게 보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만난 이현석은 ‘꼴통’이다. 내가 이현석을 감히 ‘꼴통’이라고 부르는 건 아마도 권혁태 선생이 나보고 ‘또라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피휘(避諱)와 역린(逆鱗)



다소 뜬금 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김종인이 새누리당을 탈당한다는 소식이 저간의 화제인데 - 다른 한 편으론 이야말로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종인의 존재감이 사라진지가 언젠데, 경제민주화가 사라진지 언젠데 새삼스레 이걸 가지고 뉴스가 되고 그래 - 그래서 약간 다른 의미에서 아젠다로서 그나마 유의미했던 '경제민주화'가 사라진 마당에 박근혜 정부에 남은 유일한 아젠다는 '창조경제'뿐이란 생각이다(물론, 대선개입이란 블랙홀이 이 모든 걸 삼킬 게다).

조선왕조 500년, '태정태세문단세'를 달달 외워도 우리는 조선 임금들의 시호는 알아도 그들의 이름은 잘 모른다. 기껏해야 아는 이름은 드라마 '이산' 덕분에 정조 임금의 이름이 '이산'이란 정도다. 나중에 "뿌리깊은 나무" 덕분에 세종의 이름이 '이도'였다는 정도를 추가할 수 있겠다. 그런데 조선 임금의 이름은 전부 외자일까.

그것은 조선왕조가 사대부와 분권 형태의 권력(봉건)이었다고는 하더라도 어쨌든 '전제왕조'였던 탓에 왕실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의 이름에 대해 엄격한 규율 - 임금의 이름은 아무도 부를 수 없으며 또한 일반 공문서나 사문서에서도 사용할 수 없었다 - '피휘(避諱)'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왕실 임금의 이름이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의 형태였다면 당연히 일반 백성들은 그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건너뛰기 위해 피땀 흘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게다. 이런 형태의 피휘가 없었던 서양의 왕실 이름은 길다. 그것도 아주 길다. 그에 비해 조선왕실의 임금 이름이 짧고, 일반적으로 잘 사용되지 않는 이름을 택했던 까닭은 왕실의 존엄은 유지하되 일반 백성의 불편은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유지했는데, 세계 역사상 이처럼 오래 유지된 왕조는 드물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이 도리어 안타까울 지경이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만큼 당시 조선의 시스템이 잘 짜여져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권력의 속성상 어떤 권력이든 피휘와 역린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는 이 피휘와 역린이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그래서 이 정부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이 아니라 단언할 수 있다. 창조란 경계에 도전하는 일이다. 경계는 아무나 넘어설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영화 "월드워 Z"의 좀비들이 이스라엘의 높은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무수히 많은 좀비들이 몸을 던져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두려움 없이 장벽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피휘(금지)와 역린(처벌)의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사회에서는 어떤 창조도 기대할 수 없으며 정권의 존립 자체도 위험해진다. 뜬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한국의 재발견
- 임재천 (지은이) | 눈빛 | 2013-11-25







임재천의 사진집 "한국의 재발견"은 한국의 '재발견'이 아니라 한국의 '대발견'이다. 그것은 이 사진집의 첫 장만 넘겨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제일 첫머리에 등장하는 곳은 부산 영도인데, 순간적으로 나는 이곳에서 쿠바의 말레콘(Malecon)을 보았다.

1.
사진은 최초 탄생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몇 안되는 예술장르 중 하나다. 사진의 태초는 프랑스의 니에프스가 자연 풍경을 최초로 고정한 헬리오그라피(Heliography)를 완성한 것이 1826년의 일이었다. 태초의 사진은 풍경이었다. 물론 태초의 사진이 풍경이 된 이유는 당시 기술력으로 상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8시간이라는 긴 노출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니에프스의 사진에는 8시간 동안에 해가 움직여서 해가 지나간 자리만 남고 실제 해는 나타나지 않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훗날 기술적으로 진일보한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을 발명한 다게르가 촬영한 거리는 마치 핵전쟁 이후의 지구를 연상시키듯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 뒤 텅 빈 거리만 남아 있었다.

나는 니에프스와 다게르가 남긴 최초의 '헬리오그라피'들이 사진이라는 한 예술의 범주가 감추고 있는 철학적 본질의 대부분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진을 의미하는 영어 'photography'란 단어는 잘 알려진 대로 라틴어 'phos(빛)+graphos(그리다)'의 합성어로 1839년 영국의 허셀(Herschell)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오늘날 사진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포토그래피(photography)란 말을 풀어보면 '빛으로 그리다'란 뜻이 되는데, 이 말은 자연으로서의 '빛'과 인위적인 행위로서의 '그리다'는 행위의 이항대립으로 구성된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풍경은 인물사진과 함께 사진의 가장 오래된 기본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의 역사는 170여 년 정도인데, 사진이 그만큼 젊은 예술 분야인 탓도 있지만 유럽에서 동양으로 전파된 시기를 헤아려보면 사실상 동양과 서양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최초의 서구 문물이 등장할 때 그에 따른 번역어를 고민한다는 것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 문물 혹은 제도를 어떤 것으로 생각했고, 고민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寫眞)'이란 말을 해체해 보면 동양적 사고 속에 사진이란 무엇이었는지를 재구성해볼 수 있다.

'사(寫)'란 '베끼다, 옮겨놓다'라는 우리가 잘 아는 의미도 있지만 '떨어버리다, 덜어 없애다'란 뜻도 있다. '진(眞)'은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참, 변하지 아니하다, 생긴 그대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진은 우리가 아는 대로 본래의 참된 모습을 생긴 그대로 베끼거나 옮겨놓는 기능도 있지만 다른 한 측면에서 보면 본래의 '모습(眞)'을 덜어 없애거나 떨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예술은 태생적으로 논쟁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사진처럼 그 자체로 예술인가 아니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같이 단순한 과학적 산물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던 사례는 없었다.





2.
1911년 이탈리아의 비평가이자 영화운동가 리치오토 카뉘도(Ricciotto Canudo)는 「제7예술론Club des Amis du 7e Art」을 통해 영화를 ‘제7의 예술’이라고 선언했다. 그가 주장한 바에 의하면

제1의 예술 연극
제2의 예술 회화
제3의 예술 무용
제4의 예술 건축
제5의 예술 문학
제6의 예술 음악
제7의 예술 영화
제8의 예술 사진
제9의 예술 만화

그는 영화를 '제7의 예술'로서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며 앞서 6가지 종류의 예술을 총화 시킨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영화가 단지 ‘촬영되어진 연극’일 뿐이라는 편견"에 도전하기 위한 주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도 니에프스와 다게르에 의한 사진의 탄생(1826년~1838년)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한 영화의 탄생(1895년) 보다 앞서며, 기술적으로도 사진이 탄생한 뒤에 비로소 영화가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영화에 뒤이어 제8의 예술이 된 이유는 사진이 걸어야 했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은 1862년 프랑스 파리 법원의 판결에 의해 비로소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발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프랑소아 아라고(Francois Jean Dominique Arago, 1786 ∼ 1853)는 “사진은 진보에 기여하고, 민주주의에 이바지하며, 누구나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며 사진을 예술로 받아들이도록 주장하기도 했다.

다시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 사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발터 벤야민이긴 하지만, 나는 좀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이란 담론으로 인해 사진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강화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란 오해에 대해 동양의 사유는 사진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지만 동시에 본래의 '모습(眞)'을 덜어 없애거나 떨어버리는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담고 있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와는 사진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화가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다른 한 편으로 사진에 비해 유화가 지닌 예술성에 대한 자신감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초보자들은 희생시켜야 할 것을 희생시키는 중요한 기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라고 했는데, 이런 주장의 저 편에 서 있는 당시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들은 '희생시켜야 할 것들을 희생시키지 못하는 초보적인 작품'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3.
디지털 기술이 사진의 물성(物性)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현대, 특히 풍경사진은 여전히 그런 오해를 받고 있으며, 나는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풍경은 여전히 천지(天地)이고, 풍경사진은 지천(至賤)이기 때문이다.

소박한 풍경의 기록으로 시작된 풍경사진은 처음엔 단순한 풍경의 기록이라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풍경을 좀 더 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창조의 욕구가 싹트면서 초기의 사진가들은 회화를 선진예술로 생각해 사진을 통해 이를 모방했다. 훗날 사진을 미술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했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조차 초기의 작품들은 회화를 모방하는 ‘예술사진(Pictorial photography)’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다.

풍경사진은 장엄한 자연의 풍광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만든 역사적 건축물, 마을의 정경, 일상적 풍경, 주민들의 자연스러운 생활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를 담아내려는 풍토적 정경의 사진들, 또는 작가 자신의 주관적 내면세계를 반영시키는 작품에 이르는 등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근대화 이후 여가 생활의 증대를 반영해 유행하기 시작한 엽서사진과 관광 목적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지천이다. 심지어 안개가 한창 아름답게 피어날 이맘 때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 근방에 나가보면 마치 낚시꾼들이 포인트를 찾듯 좋은 사진의 포인트로 알려진 근방을 배회하는 사진가들로 득시글거린다.

그렇다면 임재천의 사진이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의 으젠느 앗제(Jean Eugene Auguest Atget)는 근대사진의 보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생전의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파리 시정의 일상적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치중한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본래 그는 초야에 묻혀 있었던 무명의 사진작가였다. 잘 알려진 대로 앗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만 레이(Man Ray)와 그의 조수로 일하던 버레니스 애보트(Berenice Abbott)였다. 앗제는 당시 만 레이의 이웃으로 몽파르나스에서 살고 있었는데, 1926년, 앗제가 죽기 직전 만 레이는 그의 작품을 초현실주의 기관지에 게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미국의 여성 사진작가 애보트는 앗제의 사진이 지닌 가치를 알아차렸고,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앗제의 초상사진을 촬영했다. 앗제는 애보트가 초상사진을 촬영하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애보트는 그때부터 앗제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해 이후 40년 동안 앗제의 포트폴리오와 아카이브를 만들어, 1981년 MoMA에서 그에 관한 전시회를 열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임재천의 사진을 앗제에 비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임재천의 사진이 지닌 진정한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임재천의 풍경사진들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새롭지 않다. 그의 사진들은 기법적으로 보자면 미묘한 광선(光線)의 뉘앙스를 추구하는 한국 살롱사진(풍경사진)들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디 전통적이란 것은 낯익은 것, 낯익은 것은 진부한 것이고, 진부한 것들은 마음의 평정을 선사하긴 하지만 감동을 주지 못하기 마련이다.





4.
근대의 여행은 8시간 노동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가져다 준 여유를 이용해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 자신이 일하던 곳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과거의 여행이 생(生)과 사(死)의 일대사(一大事) 인연(因緣)을 걸고 진리(經典)를 찾아 머나먼 천축(天竺)으로 떠나는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모험이었다면 근대 이후의 여행은 여흥(餘興)을 찾아 떠나는 것이 되었다. 여행의 필수품으로 관광가이드북이나 누군가 먼저 다녀온 사람의 여행기를 찾아 읽는 이유는 낯선 곳에서 낯설고 싶지 않다는 안정과 평온에 대한 추구이다. 에드워드 W. 사이드는 그와 같은 이유에서 여행을 하는 자들의 정서와 심리는 기본적으로 ‘텍스추얼(textual)'한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낯선 장소, 낯선 시간을 찾아 떠나지만 그들의 마음과 감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언설화(言說化)된 지식과 이미지로 충만해 있다. 결국 이들이 찾아간 곳은 낯선 시간과 공간이 아닌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굳건한 권위를 지닌,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직접 대면하게 될 진짜(real) 현실보다 현실화된 권위를 지닌 텍스트들, 다시 말해 굳어진 대상들뿐이다. 이것은 온갖 첨단문명으로 도배된 현실의 여행이 지닌 한계이자 오늘날의 풍경사진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사진의 탁월한 현실 묘사력은 ‘텍스트로서의 사진’이 지닌 텍스추얼한 권위를 더 한층 강화시켰고, 이후의 사진들은 과거의 사진들이 만들어 놓은 권위와 경쟁해야만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사진집이 아닌 사적인 계기로 인연을 맺은 최초의 사진가는 얼마 전 타계한 김영갑 선생이었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통해 당신과 인연을 맺었고, 당신이 사인해서 보내준 사진집을 받았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찍는 사진을 분명 풍경사진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에는 다큐멘터리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오늘의 이 풍경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은 자신이 가진 뛰어난 장점 중 하나인 대상을 사실대로 묘사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기록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다른 사진, 이전의 사진들이 남긴 기록들과 투쟁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기록이 가지고 있는 기록이라는 속성의 중요한 가치를 두고 ‘시간성’의 개념을 도입해 강화하고자 한다. 기록은 시간(세월)이란 긴 여행, 소멸을 염두에 두고 현재를 남기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임재천의 사진을 높이 평가하는 지점들이 한 부분은 분명 거기에 있지만, 나는 그것에 의존해 임재천의 사진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1년에 한두 번 이상 역사기행의 명목으로 전국의 명승지를 살펴보는 일을 17년째 하고 있으며, 굳이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나의 닉네임이 ‘바람구두(windshoes)'란 것에 걸맞게 돌아다니는 일에 익숙하다. 그가 사진집에 담고 있는 곳들은 나도 대부분 다녀본 곳들이며, 나 역시 사진기를 손에 잡은 지도 어느덧 그만큼의 연륜이 쌓였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 그의 사진들이 담아내고 있는 풍경들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또 그만큼 그의 사진들은 나를 낯설게 한다. 낯익은 장소가 경이(景異)하게 보이기에 나는 그의 사진들이 경이(驚異)롭다.

그의 작업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풍경사진의 전통과 맥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일정하게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앞으로 여기서 좀 더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땅에 대한 경험과 기억들을 ‘tabula rasa’의 상태로 몰아 부칠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지 않을까 감히 기대해보게 되는 것이다.





* 임재천은 계간 "황해문화" 2011년 여름호(통권71호)의 포토에세이를 장식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1.
숀 코네리와 캔디스 버겐 주연의 영화 "바람과 라이언"은 제국주의 시대의 풍경을 낭만적인 이국주의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비판해야겠지만 영화 자체는 상당히 유쾌한 편이다. 고민을 배제한 스펙타클 영화이기 때문인데 아마도 실화일 거라고 오랫동안 추측만 하다가 찾아냈다.

종군기자였던 제임스 빈센트 시언은 1925년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의 감시를 피해 모로코의 리프족 반군 진영의 지도자 압 델 크림과 압 델 라이슐리 형제를 인터뷰하는데 성공했다. 바로 압 델 라이슐리가 숀 코네리가 연기했던 그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1904년 그리스 출신 미국인 갑뷰 이온 페다카리스를 납치한 것으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배경을 뒤져보는 일은 참 흥미롭다.

숀 코네리, 캔디스 버겐 주연의 "바람과 라이언" 이야기를 했더니 뜬금없이(?)는 아니고 사실 비슷한 시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제목마저 비슷한 안소니 퀸 주연의 "사막의 라이언"과 착각하는 분이 있어서(누구라고 말 못함) 말난 김에 이 영화 이야기도 조금 하자면....





2.
시대 배경상으로는 "바람과 라이언"이 1904년으로 20세기 초엽의 사건이었고, "사막의 라이언"은 대략 1910년대에 일어나 1931년 9월 16일에 종결된 하나의 사건에 대한 영화다. "바람과 라이언"이 이국적인 풍광과 문화를 배경으로 한 엑조틱한 액션 스펙터클이라면 "사막의 라이언"은 그보다 훨씬 진지한 영화란 차이가 있다.

존 밀리어스 감독의 영화 "바람과 라이언"을 연출한 존 밀리어스 감독은 원래 영화 대본을 쓰던 작가 출신인데,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영화 <더티 해리>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 등의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아마 1973년의 <딜린저>가 처음 영화감독 데뷔작인 듯 싶은데, 이후에도 영화 연출과 함께 각본, 제작 등 다양한 영역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가 연출한 영화들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영화는 사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에게도 가장 잘 어울렸던 영화 <코난-바바리안(1981)>이었다. <바람과 라이언>은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이었다.

그에 비해 "사막의 라이언"을 연출한 무스타파 아카드 감독은 시리아 출신의 미국인 감독으로 이후 감독으로서보다는 <할로윈> 시리즈의 제작자로 더 많은 명성을 쌓긴 했지만 초기만 하더라도 감독으로서 그의 연출작들은 이슬람권에 대한 서구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진지한 작품들이었다. 1976년 "에언자 마호메트"에서 안소니 퀸과 인연을 맺고, 그가 연출한 두 번째 작품이 "사막의 라이언"이었다.

영화 연출에 능력이 있었던 그가 이후 영화 연출보다는 제작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이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의 첫 번째 영화와 두 번째 영화 모두 할리우드에서 제작하는데 여러 장애와 방해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는 더이상 영화 연출을 하기 어려웠고, 이후 제작에만 전념하다가 2005년 11월 요르단 암만에서의 이슬람 폭탄 테러에 희생당해 그의 딸 리마 아카드와 함께 사망했다.





3.
"사막의 라이언"은 20세기 초 이탈리아와 리비아 사이에 실제로 벌어졌던 리비아 국민들의 20년 항쟁이 실제 배경이 되었다. 이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실화이며 등장인물들 역시 실존 인물의 실명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는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당시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튀니지아를, 스페인은 모로코를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와 에디오피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당시 리비아는 오스만제국의 식민지였다. 이탈리아는 터키의 발칸 전쟁 개입을 계기로 1911년 9월 29일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뒤 10월 3일 함대를 리비아의 해안도시 트리폴리에 보냈다. 당시 이탈리아 함대 사령관 파라펠리는 리비아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 군대의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시 전체가 파괴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터키군은 트리폴리에서 퇴각했지만 항복하지 않았고, 이탈리아 함대는 3일간 함포사격을 가해, 트리폴리를 함락시켰다.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정복하여 식민지화하는 일은 어린아이 팔목을 비트는 일만큼 손쉬운 일인 듯 보였다.

결국 오스만투르크는 리비아에서 철수했지만, 이때부터 전쟁은 새로운 식민지배자인 이탈리아 점령군과 오마르 알 무크타르가 이끄는 저항군 간의 전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영화에도 잘 드러나지만 오마르 무크타르는 본래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꾸란을 가르치는 교사(이맘)였다. 다른 아랍 국가들이 그러하듯 리이바의 저항군들 역시 부족 중심이었고, 이들은 사분오열되어 각자 자신의 왕국을 추구하거나 이해관계에 따라 이탈리아군에 협력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오마르 무크타르는 비타협적이었고, 다른 부족의 게릴라들에 비해 근대민족 지도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 세력은 점차 그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쟁을 치른 롬멜이나 몽고메리 장군의 회고나 증언을 살펴보면 사막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육군의 전략보다 해군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막이 곧 바다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광활한 사막에서는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 먼저 적을 찾아 먼저 공격하고, 궤멸시킨다는 해군의 전략이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군은 전형적인 육군의 전략을 구사했으므로 사막의 유목전술을 구사하는 무크타르의 게릴라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리비아의 저항전쟁은 어느 일방도 확실한 우세를 점하지 못한 채 1929년까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1921년 뭇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과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할 성지로 보았고, 새로운 지휘관으로 에티오피아 전선에서 명성을 쌓은 그라치아니 장군을 파견한다.

4.
그라치아니 장군은 초반만 하더라도 오마르 무크타르를 시골 촌부 정도로 생각하여 가볍게 여겼으나 점차 그의 탁월한 지도력과 게릴라 전술에 휘말려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한다. 그 뒤 그라치아니와 이탈리아군은 새로운 전술을 동원하는데, 한 편으론 무크타르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하고, 다른 한 편으론 이른바 청야(淸野)작전을 펼쳤다. 게릴라들의 바다가 될 수 있는 민중들을 제거하는 청야전술은 무자비했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탈리아군의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는 동안 무크타르는 사막과 산악 지대에서 현대병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을 계속 패퇴시켰지만, 그 사이 이탈리아군은 리비아 사막에 수천 명의 인부를 강제로 동원해 수천 톤의 가시철조망을 설치했다.

12만 5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살인적인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사막을 통행하려는 이들은 사살당했다. 결국 '리비아의 태양'이라 불렸던 오마르 무크타르는 이탈리아군에게 부상당한 채 생포되었는데, 이탈리아 정부는 그가 탈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70세를 넘긴(사막 유목민의 정확한 나이는 알기 어렵지만) 오마르 무크타르의 손과 발에 족쇄를 채워 전리품처럼 전시했다. 그들은 늙은 반군 지도자를 재판했지만, 그의 입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말은 한 마디도 얻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판하는 거냐"는 반문만 들어야 했다.

도리어 이 늙은 죄수의 높은 인격은 이탈리아 간수들에게도 커다란 감명을 주었고, 그의 굳은 의지에 압도당했다. 이탈리아는 오마르 무크타르를 공개적으로 교수형에 처했는데,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는 질문에 꾸란의 한 구절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신에게서부터 왔고, 언젠가는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

20여년을 끌어오던 항쟁은 1931년 9월 16일 그의 사형과 함께 사실상 종결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적의 손에 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영화 이야기를 별도로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영화는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려고 하고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이 영화에 대한 리뷰는 별도로 해볼 생각이다(음, 여태한 건 뭐야?). 그의 초상은 리비아의 10디나르 화폐에 새겨져 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다크 트루스(A Dark Truth, 2012)





다미안 리 감독의 "다크 트루스"에서는 오랜만에 앤디 가르시아가 진지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이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케빈 두런드와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일단 나오면 그만한 정도는 항상 보여주는 포레스트 휘태커, 다미안 리 감독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킴 코티스 등등 조연들의 탄탄한 연기력으로 기본은 해준 영화다.

영화의 내용은 제3세계에서 '상수도 민영화'를 추진하는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이 에콰도르의 타이카란 지역에서 상수도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정수시설이 오염되면서 이 지역에 집단적으로 티푸스가 발병하자 다국적 기업과 결탁한 지역의 군사령관이 무고한 마을 주민들을 집단학살하는 사건을 둘러싼 갈등과 진실의 문제를 다룬다.

앤디 가르시아는 은퇴한 전직 CIA요원으로 남미에서 반체제농민운동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프란시스(포레스트 휘태커)를 체포하고, 그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공작을 펼쳤던 잭 베고시언으로 등장한다. 그는 청문회에 출두해 CIA로부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위증할 것을 부탁 받았으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까지 시인하면서 조직으로부터 축출당해 지금은 작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진실"이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조직에겐 내부고발자로 낙인 찍혔고, 일반 대중에겐 남미에서 살인공작을 펼친 전직 비밀요원으로 여전히 그의 정체를 의심받는 잭 베고시언은 가정에도 편안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만, 조직에서의 일은 여전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이고, 비밀은 부부 사이를 멀게 갈라놓고 있다. 또 그는 아들과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몰라서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




영화는 잭 베고시언의 일상과 함께 과거 '농민의 희망'이란 무장단체를 이끌었으나 베고시언에게 잡혀 감옥생활을 거친 뒤 이제는 평화적인 농민운동가가 된 프란치스가 다국적기업의 음모와 군부의 학살을 피해 밀림으로 달아나는 과정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문제는 다미안 리 감독의 연출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밋밋한 연출에 무엇 하나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탓인지 제대로 된 사회고발 영화로서도, 휴먼 드라마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영화의 기본 갈등은 제3세계에서 상수도 민영화 사업을 하는 다국적 기업과 에콰도르의 학살당하는 농민 사이의 갈등이지만, 작게 보면 등장인물들 간에 세 가지 갈등이 있는데 하나는 앤디 가르시아와 사회(혹은 가정)의 갈등이 있고, 다른 하나는 전직 CIA비밀공작요원 잭 베고시언과 농민운동가 프란시스코 프란시스와의 갈등, 마지막으로 다국적 기업을 이끄는 사업가 오빠 브루스 스윈톤(킴 코티스)와 여동생 모건 스윈톤(데보라 카라 웅거)의 갈등이다.

프란시스코 프란시스는 한때 무력항쟁을 이끈 인물이었지만 잭 베고시언의 공작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고, 감옥에 다녀온 뒤 "마오는 틀렸고, 간디가 옳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며 자신을 구출하러 온 잭 베고시언과 손쉽게 화해한다.

선대가 물려준 기업 클리어벡을 이끄는 두 사람, 오빠 브루스는 성실한 사업가지만 선대의 기업을 잘 키워야 한다, 조직의 논리에 젖어 제3세계에서의 학살이 심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 틀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한다. 동생 모건은 철따라 결혼하고, 이혼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기업의 폼나는 일들(자선사업)만 해왔지만 어느날 갑자기 자기 앞으로 찾아와 에콰도르에서의 학살을 고발하며 자살해버린 한 청년 때문에 충격을 받고 잭 베고시언을 고용해 프란시스코 프란시스를 미국으로 데려오도록 시킨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자 양심의 가책을 느낀(그리고 기업을 살리기 위해 모든 책임을 지고) 브루스는 자살해버리고, 모건은 오빠를 대신해 앞으로 윤리적 경영을 하겠다며 기업을 물려받는다. 잭은 자신의 라디오 방송에 프란시스코 프란시스를 특별 손님으로 초대해 이런 상황에 대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누군가 브루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며 그에게 묻는다. "돈의 탐욕 때문에 이런 짓을 저지른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돈 때문만은 아니라고..." 그러자 전화한 사람이 "그럼 무엇 때문이냐"고 되묻는다. 그는 이런 일은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서 생기는 것이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답한다.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다크 트루스(흑막)'일 게다. 영화는 볼만한 수준으로 좋은데, 연출이나 서사의 힘이란 측면에서 딱 그 정도 수준으로 좋지 않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길이 학교다
- 산길, 강길, 바닷길에서 만나는 세상의 모든 역사

조지욱 (지은이) | 낮은산 | 2013-10-28

나는 '길'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문명과 소통을 상징하는 길이 생명에겐 죽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길을 걸을 때마다 가끔이라도 그 길의 무게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부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고 있는 조지욱 선생의 책 "길이 학교다"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펼쳤다.

그저그런 청소년 상식 증진용 도서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마감 뒤끝의 심심파적 읽을거리 정도로 시작했는데 "청소년들을 독자로 겨냥한 듯 난이도 자체는 높지 않지만, 깔끔한 문장과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내용에 담긴 수준 높은 통찰이 돋보이는 훌륭한 지리(地理) 입문서"였다고만 정의하고 넘기기엔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사실, 김두식 선생의 책 "다른 길이 있다"를 먼저 읽을지 이 책을 먼저 읽을지 하다가 "황해문화" 창간 20주년 기념호가 이 책처럼 인터뷰집은 아니어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지금의 내 심리상태로는 지금 읽기에 버겁게 여겨진 탓에 이 책을 먼저 들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조지욱의 책 서문에 해당하는 "길이란 무엇일까?"는 세상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는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어디 가는 길이니?"
"아프리카의 배고픈 어린이들을 구하는 길은 무엇일까?"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마라."

하나는 이동통로로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방법으로서의 길이오, 또다른 하나는 도리로서의 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큰 맥락에서 이 세 가지 길을 하나로 아우르는 대단한 능력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저자의 속깊은 관점과 이것을 통합해낼 수 있는 탁월한 역량이 없었다면 이 작업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을 읽노라면 그 길(세 가지 길)을 함께 걷는 듯 하고, 함께 걷고 싶어지게 만든다.

"경상북도 문경에는 '토끼비리'라는 아슬아슬한 벼랑길이 있다. '비리'란 강가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뜻하는 사투리이다. 지금도 토끼비리를 지날 땐 긴장하고 주의해야 한다. 까불면 절대 안 된다는 뜻이다. 토끼비리는 폭이 30cm가 채 되지 않는 곳도 있다. 이 길이 조선 시대에 서울과 부산을 이어주던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했던 길이다." (24쪽)

그런데 이 길은 1,100년 전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게 쫓겨 목숨을 빼앗길 뻔한 그곳에서 시작된다. 견훤에게 패해 쫓기던 왕건이 이곳까지 쫓겨왔으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토끼가 벼랑을 타고 가는 것을 발견하여 뒤쫓아가서 살아난 길이다.

"초한지"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쫒겨 척박하고 후미진 촉땅으로 들어갔다가 되돌아나와 천하를 쟁패하기 위해 벼랑 끝에 닦은 길을 '잔도(棧道)'라고 하는데, 국내 유일의 잔도가 바로 '토끼비리'란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길이다. 그는 이처럼 역사적인 길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동서양의 문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가하면 색다른 유래 이야기도 눈길을 끌었다. 예를 들어 나는 '노가다'란 말을 지금까지 일본어로 'dokata[土方]'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았는데, 이 책에선 경인선을 건설할 당시 일본인 반장이 구호를 부칠 때 일본말로 "노(좋다, 으뜸)"라고 구호를 부치면 조선인 일꾼들이 "가다(덩치, 모양)"라고 후렴을 붙이며 무거운 것을 들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물론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산을 넘는 길

우리 역사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지명 '철령'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느끼고,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다.

"14세기 말은 고려가 문을 닫고 조선 시대가 열리는 시기였다. 힘 빠지는 고려를 지켜보고 있던 명나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철령 북쪽 땅(지금의 함경도)을 먹겠다'고 선전포고한다. ...<중략>... 이에 고려 우왕은 명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이성계 장군에게 5만 군사와 함께 출전하여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지역까지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잠깐, 왜 명나라는 철령 남쪽만을 고려로 인정하려 했을까?

철령은 태백산맥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산의 길목에 해당하는 고대다. 철령은 우리 땅의 척추이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백두대간의 등허리에 있다. 북쪽 백두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면 남쪽 태백산맥 능선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철령은 이토록 중요했기에 그곳에 '철령관'이란 관문이 있었고, 이 관문은 지역 간 경계가 되어 철령관 동쪽 강원도 땅을 관동, 서쪽의 평안도 일대를 관서, 북쪽의 함경도 땅을 관북 지방이라고 한다."(67-68쪽)

해마다 한두 차례씩 우리나라의 역사유적을 찾아가 공부를 하는데, 살아있는 역사기행이 되기 위해선 단지 현장의 문화유적을 살펴보고 '아! 좋구나. 아름답구나'하고 돌아오는 정도론 부족하다. 살아있는 역사기행이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마음이 되어 보는 일이다. 그런 마음 공부 없이 그저 가서 아름다운 경치와 맛난 향토 음식에 젖었다가 돌아오는 건 그냥 관광이다.

철령은 천혜의 요충지로 우리 군대가 함경도 땅을 지나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관문이자 반대로 중국이 한반도로 내려올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요충이기도 했다. 삼국시대 당나라가, 고려시대 명나라가, 조선시대 이여송이, 한국전쟁 당시 팽덕회의 중국인민해방군이 어디쯤에서 멈추고자 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이 부분에 대해선 소설가 유하령 선생이 전에 말씀하신 부분도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이처럼 역사적인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 생태적인 길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진화론의 섬, 생태의 보고 갈라파고스 제도가 인간의 발걸음에 의해 망가지고 있는 현실, 그곳을 찾은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비행기와 자동차 행렬에 치어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가 하면 수에즈, 파나마 운하에서 시작해 운하사업으로 진행되었던 4대강과 경인아라뱃길의 허상에 대해 조목조목 질타하고 있다.

댐이란 말이 네덜란드에서 유래된 말이란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았다.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같이 수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의 도시들 지명에 유난히 담이 많은 이유가 그것이었던 거다. 그런데 이 댐은 여러 가지 유용한 면도 있지만 자연생태와 인간의 삶에 끼치는 폐해도 만만치 않다. 그렇기에 미국이나 프랑스는 댐이 이익보다 생태계를 교란하는 문제가 더 크가며 지을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댐들을 해체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길이 진리다

그는 미국 키시미 강의 사례를 든다. 1928년 미국 플로리다의 대홍수로 2,000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은 그 원인을 분석했다. 문제는 운하 때문이었다. 자연적인 강의 흐름을 무리하게 직선화하고, 강바닥을 파내고 갑문을 설치하면서 문을 열어야만 물이 흐르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또 높은 둑으로 수중 생물이 육지와 하천을 오갈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요. 육상 생물들이 물을 찾아오는 길도 끊겨버렸다. 그런데도 미국은 1971년까지 23년간 3천만 달러를 들여 키시미 강 운하를 만들었다.

이곳을 찾던 철새들의 95%가 발길을 끊었고, 결국 하천 주변에 살던 주민들도 이곳을 떠났다. 자연히 지역 간 왕래가 줄었고, 운하는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이곳을 자연 상태로 복원하는데 3억 달러를 들이고도 아직까지도 완전히 복원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되묻고 있다.

걷기 좋은 올레길이 좋은 길일까?
속도가 무제한인 아우토반 고속도로가 좋은 길일까?

아마도 좋은 길이란, 좋은 생각으로 만드는 길과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마음으로 보이는 길이 아닐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황해문화" 창간 20주년 기념호를 화요일부터 발송작업합니다. 감개무량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감개가 무량하지요. 특별한 기념행사 같은 거 못합니다. 잡지야 잡지 그 자체가 기념인 게죠.


어떤 한 시절, 어떤 한 잡지가 있었다고 말되어지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흔하고 넘치는 듯 시절인 듯 보이나 찾아보면 이만한 잡지, 요즘 참 드물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 김명인 선생의 글이 참 좋습니다. 꼭꼭 씹어서 읽어주시길....





<권두언>
길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길


김명인


『황해문화』가 20주년을 맞는다. 1993년 겨울호를 창간호로 내고 이제 다시 2013년 겨울호를 내는 것이다. 계간지 20년이 그리 긴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척박한 한국적 문화지형 속에서도 이보다 더 오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잡지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홀 같은 서울 중심의 구심력이 기세등등한 현실에서 인천이라는 주변적 로컬리티에 굴하지 않고 20년 동안 꾸준히 시사문화지로서 위상을 유지해온 것에 대해 약간의 자화자찬 정도는 허락되어도 좋을 것 같다.

『황해문화』는 처음부터 상업적 수지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잡지다. 계간지가 그 자체로서 수지균형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계간지들이 명멸해왔지만 오래도록 속간하고 있는 다른 계간지들(물론 월간지도 마찬가지지만)의 경우 대개 해당 출판사들이 일정한 손해를 감내하면서도 그 잡지의 영향력에 힘입어 단행본 출판을 병행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잡지 쪽으로부터의 손실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황해문화』는 그러한 손실보전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행을 계속한다. 그것은 『황해문화』의 발행주체인 새얼문화재단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새얼문화재단은 인천시민의 손에 의해 40년 가까이 키워져온 풀뿌리 민간 문화재단이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풀뿌리 지역문화재단으로 성장한 새얼문화재단에 있어 지역을 넘어 전국적 어젠다를 형성하고 확산시키는 시사문화계간지 『황해문화』 발간 사업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새얼문화재단이 『황해문화』를 발간하는 일은, 재단의 다른 주요 사업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문화라는 것은 어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그 자체로 자율성을 가져야 하고 또 그 자율성은 의식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의 소산이다. 이제 20년을 맞게 된 『황해문화』에 어떤 전통과 품격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잡지 자체의 기획과 내용들이 만들어온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다른 잡지들과는 다른 이러한 발행주체의 확고한 의지 자체에 스며있는 높은 품격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잡지를 만드는 우리의 숨길 수 없는, 그리고 굳이 숨기고 싶지 않은 자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황해문화』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것은 비단 『황해문화』만이 아니라 『황해문화』를 포함한 진지한 잡지저널리즘 전체에 관한 소망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래 한국 잡지저널리즘의 위상은 점차 하락일로에 있다. 주간지 시장은 그래도 어지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월간, 계간, 특히 시사문제를 주로 다루는 정통 잡지저널리즘의 쇠퇴는 너무나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경박단소의 매체문화와 단행본 중심의 출판문화(물론 진지한 단행본들 역시 비슷한 운명이겠지만) 사이에서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등장하는 시사현상들을 보다 근본적인 맥락에서 차분히 짚어나가서 그 의미와 전망을 모색하는 진지한 논의의 장으로서의 잡지저널리즘이 설 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잡지저널리즘의 쇠퇴는 선정주의와 흑백논리로 가득한 파편적 억설들을 한편으로 하고, 지나치게 원론적인 아카데미즘적 논리를 다른 편으로 하는 여론장의 기형적 이원구조의 결과이면서 또 원인이 되고 있다. 그 결과 결국 남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극단적 흑백논리 혹은 상호모순적인 대중적 억설들이거나 아니면 고답적인 원론들뿐, 그 사이를 잇는 여론의 합리적 변증과 조정의 과정은 생략되거나 실종되고 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어느샌가 점차 '보수꼴통'의 논리와 '종북좌빨'의 논리만 남는 지적 야만의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진실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사 완전한 진실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설득이나 합의에 이르는 길조차도 늘 복잡하고 우회적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사회는 이러한 돌아가는 길, 복잡한 길을 누구도 차분히 모색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설사 그러한 길을 누군가 모색하여 이 길로 가자고 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 경쟁과 불안 속에서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심정으로 쫓기듯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차분한 성찰적 모색을 요구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회로를 기피하는 사회,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을 모두가 귀찮아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뜬다. 그 요괴가 지금 한국사회를 백주에 횡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게 필자만의 착시는 아닐 것이다.

한갓 일 년에 네 번 나오는 잡지를 읽는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절마다 한 번 정도 자신만의 좁은 소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세상과 이웃의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 깊고 먼 맥락들을 짚어나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이 무언가 성마른 광기가 지배하는 이 불길한 시대의 속도를 얼마간은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어떤 의미있는 변화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황해문화』를 읽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읽히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하리라. 20년의 길목을 돌아나서는 지금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본다.

20주년 기념호를 낸다. 이번 호는 '20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라는 제목 아래 하나의 단행본형 통기획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도는 통권 50호째를 맞아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던 지난 2006년 봄호에서 이미 한 번 시도된 바 있다. 잡지라는 매체가 지식과 교양으로 무장한 전문가들만이 글을 실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계간지의 성격상 전문필자들의 글이 주로 실리는 것 또한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대개 할 말이란 것은 가지지 못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또한 대개 말할 줄을 모르고, 또 말할 기회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의 말은 대부분 누군가에 의해 대신 말해지지만 그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왜곡되거나 변형되게 된다. 그리고 '글'의 형태로 전해질 때는 더욱 그 왜곡과 변형의 정도는 심해진다.

지난 50호에 이어 우리는 이 20주년 기념호를 빌려 이처럼 그동안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말을 가급적 많이 실어 알리고자 한다. 이 기획 속에는 『황해문화』가 창간된 1993년부터 올해 2013년까지 20년 동안 이 땅에 사는 마흔 여섯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가 들어있다. 거기엔 공장노동자, 해고자, 농어민, 장애인, 탈북자, 화교, 이주자, 자이니치, 이민자가 있고, 인권운동가, 병역거부자, 빈민운동가, 청소년운동가, 문화기획자, 노래운동가, 대안학교 교사, 페미니즘 운동가, 촛불소녀, 해직교사, 내부고발자, 지역운동가와 시인, 소설가, 평론가, 만화가, 사진가, 가수, 극작가, 서점주인, 출판인, 해직기자가 있으며 목사, 신부, 승려 심지어 전직 대법관, 현직 레슬러의 이야기까지도 있다. 일종의 집단적 민중자전인 셈이다. 가급적 사회 각층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으므로 개중에는 글 잘 쓰고 말 잘하는 지식인들도 들어 있지만 그들조차도 무슨 대단한 공적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지난 20년을 돌이켜 술회함으로써 이 집단적 민중자전의 흐름 속에 녹아들도록 하였다. 수많은 사연들이, 수많은 말들이 지난 20년이라는 한국현대사의 한 토막 속에서 얽혀있고 또 말해지고 있는 이 한 권의 서사기획 속에서 독자들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난 20년 세월을 돌아보게 될 것이고 그것이 어떤 형상을 하든,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든 민중자전의 파노라마는 곧 우리 모두가 함께 겪어왔던 날것의 역사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황해문화』가 창간된 1993년은 한국사회가 1961년부터 시작된 무려 32년의 군정체제를 끝내고 어렵사리 문민정권을 탄생시킨 원년이기도 하다. 그 후 20년 동안 김영삼 정권 5년을 거쳐 김대중, 노무현의 '민주정권'이 이어졌고 이명박 정권을 거쳐 이제 박근혜 정권 원년을 맞은 것이다. 그 20년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었을까? 벌써 몇 해 전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 시절을 일컬어 '87년 체제'라거니 '97년 체제'라거니 하는 논의들이 있었다. '87년 체제'라는 명명에는 1987년의 6월항쟁과 그로부터 가능해진 직선제개헌을 비롯한 '민주(화)개혁'과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되는 현재까지의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고, '97년 체제'라는 명명 속에는 1997년에 있었던 'IMF 쇼크'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적 '격변'으로 인한 부정적 구조변화야말로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대표 항수이며 '민주화'는 그에 비하면 일개 종속변수라는 입장이 들어 있었다.

쉽게 단순화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97년 체제'라는 명명이 더 사태의 본질에 접근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87년의 민주항쟁은 직선제 개헌을 낳았고 노태우-김영삼 정권 10년 동안의 산통을 거쳐 마침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이른바 '민주정권 10년'을 일구어냈지만, 그 민주화는 정권교체와 사회 전반의 민주적 환경 조성이라는 의미있는 결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의 실패에서 나타나듯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뒤를 이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통해 그나마 이루어졌던 민주화의 여러 성과들이 하나하나 무화되거나 격파되는 현실을 미루어볼 때 극단적으로 말하면 '87년 체제'는 일종의 환각이었다는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비록 신자유주의 체제가 멀게는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 시절을 거쳐 노태우 정권 때부터 이미 세계화니 개혁 개방이니 하는 언술과 더불어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김영삼 정권하의 노동법 개악, 김대중 정권하의 금융개혁, 구조조정과 대량 해고, 비정규직 양산, 노무현 정권하의 FTA 드라이브와 시장자유주의 고착 등에서 보듯 이른바 민주정부 아래서 한국사회에 확고하게 착근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년은 어떻게 보면 민주화의 환각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고착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방기했던 기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고착된 '97년 체제' 기간이라고 보는 것만으로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고착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온전히 계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이에 계승의 다리보다는 단절의 협곡을 더 뚜렷하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 다시 '민주화'의 문제가 대두된다. 노무현 정권기까지 위태롭기는 했지만 의연하게 작동했던 민주화의 환각은 2008년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하나하나 깨지기 시작한다. 엄밀히 말하면 '민주화'는 신자유주의 질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국가의 경계 철폐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시장자유의 획득을 전제로 하는 신자유주의 질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완성을 촉진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이러한 신자유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공생관계는 변질되기에 이른다.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는 권위주의적인 군사독재체제에서 탈권위주의적 문민체제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라는 의미를 넘어설 수밖에 없다. 만일 한국의 지난 권위주의 군사독재체제가 제3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서의 정통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빠른 속도의 경제, 사회발전을 기하기 위한 어느 정도 불가피한 역할을 수행한 존재였고 민주화란 그것이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성숙에 따라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민주화 역시 불가역적으로 연착륙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단지 권위주의 군사독재체제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전 분단과 전쟁과 냉전체제 고착 과정에서 형성된 한국적 지배체제의 근원적 문제들, 이른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의 국가폭력과 그 피해의 문제, 그리고 그로부터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는 한국 주류 지배세력의 정통성/정당성 문제에까지 소급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길게 보면 197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의 붕괴 이후 노무현 정권 시기까지의 30년의 시기는 권위주의의 장기적 약화와 민주화라는 추세가 주도하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대한민국 주도세력'들이 대세에 밀려 수세에 처해 있던 기간이었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하에서의 대북 화해 협력 분위기가 점차 증진됨으로써 그들의 존립기반인 냉전적 분단체제가 흔들리게 되고 더 나아가 제주 4·3항쟁 등 과거사 관련 진상규명과 국가책임 인정 등 자신들의 원죄가 다시 호출되는 상황에 이르면서 이들의 대대적인 역공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바와 같은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의 전방위적 우경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의 민주화는 한국 자본주의의 양적 성장에 걸맞은 정치사회적 질적 수준의 확보라는 자연스러운 경로의 일환으로 불가역적으로 진행되는 대신 냉전적 분단체제의 기형적 형성이라는 한국현대사의 특수한 조건에 부딪쳐 더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정체 혹은 후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단지 민주화의 표류 혹은 지체라는 문제를 넘어서 더 큰 문제들을 야기한다. 냉전질서에 기초를 둔 한국사회 정통 지배세력의 이러한 반역사적 귀환과 주도권의 회복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그 서슬 아래서 사회 각계 각층의 정당한 생활상의 민주적 요구들조차 강압적으로 봉쇄되는 결과를 낳게 되며 그 뒤안에서 지난 20~30여 년 동안 점차적으로 제거되어왔다고 여겼던 온갖 부정, 비리, 탈법들이 다시 노골적으로 고개를 들고 자행되어도 무방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만든다는 더 큰 문제를 낳는다. 그리고 이에 정당하고 이성적인 문제제기조차 비합리적인 매카시즘적 탄압이나 단죄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현재의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체제가 만들어낸 생활상의 위기에 이러한 반역사적 보수회귀 현상이 만들어낸 정신적 위기까지 가세하여 미증유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불확정성이 횡행하는 어두운 국면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더욱 상황을 어렵게 하는 것은 민중 일반의 이러한 삶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달리 넒은 의미의 이른바 '진보세력'에게 두텁게 드리워져 있는 패배주의와 무기력감이다. 민주화의 환각, 신자유주의적 무장해제와 개인화, 그리고 대안적 상상력의 빈곤 등에 의해 이러한 심각한 작금의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해야 할 주체적 역량은 현저하게 위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 땅의 민중들은 지금 미증유의 고립과 소외 속에서 각자도생의 처절한 몸부림을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황해문화』 20주년 기념호의 기획 '20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에는 지금 이처럼 어둡고 답답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2013년을 맨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의 모습이 날것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 신산스러운 삶의 모습들을 '벌거벗겨진 삶', '추방당한 사람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등 네 개의 제목 아래 거칠게 묶어 보았다. 그러나 여기 글을 보내준 마흔 여섯 분의 삶을 이런 식의 다소간 상투적인 네 개의 제목 아래 묶어넣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폭력적이다. 이분들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는 이들의 지난 20년의 삶이 비록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정신과 나날의 삶까지도 암울한 무채색은 아니라는 것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현실은 늘 명명(命名)을 넘어선다. 현실을 관조하는 자는 결코 현실을 살아가는 자를 앞서지 못하는 법이고 황혼이 되어야 비로소 날개를 펼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결코 한낮의 땀과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법이다. 이분들의 글을 읽는 동안 우리가 편의적으로 또 상투적으로 만든 네 개의 제목들 중에 이들의 삶의 실상에 부합하는 제목은 하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뿐이었다. 나머지 제목들은 모두 빈곤한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과잉규정, 혹은 엄살의 소치일 것이다. 삶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주체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조건이고 소여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최소한의 틈이 있게 마련이고 그 틈이 있는 한 인간은 절망하지 않고 그 틈을 향해, 한 줄기 빛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면 바로 그 틈에서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분들의 삶으로부터, 삶에 대한 태도로부터 희망을 배운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이 길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길에, 이 희망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희망에 감염되기를 기대해 본다.

<『황해문화』 편집주간, 인하대학교 교수>


<목차>

특집 20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01. 벌거벗겨진 삶
12 내가 살아온 삶, 그리고 꿈꾸는 미래│김소연
24 아버지의 문패│고동민
39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정의를 꿈꾸며│이지문
49 아른한 서른, 쉰에 보이는 설움│임병구
59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 존재해온 장애인운동│박경석
75 노동자의 길, 노동자의 삶│방종운
92 길 위에서 길을 찾아│김동애

02. 추방당한 사람들
110 또 다른 꿈을 찾아 여기에│정영신
122 토건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강제윤
131 거기 마을 하나 있었다│신종원
144 북한에서 태어나 20년, 남한으로 이주하여 20년│김형덕
156 탈북자의 길│김성민
163 버마인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법│조모아
171 한국의 재외국민, 일본의 외국인 주민│이성
183 길 위에 놓인 소설들│유채림
195 화교로서 걸어온 길│담도경
209 63년 전의 월미도 미군폭격, 아직도 피난 중인 원주민들│한인덕

03. 이 땅에 살기 위하여
222 고향 없는 개인이 활동가가 되기까지│공현
235 세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배우다│한지혜
244 마지막 페스티벌│김수박
257 난 왜 활동가로 사는가│신유아
268 가치와 의미를 둘러싼 문화운동에 주목하며│오김숙이
283 대안교육과 함께한 나의 청춘, 희망을 품다│손진근
296 노란색에 관한 네 개의 짧은 글│박경주
304 상상하는 대로 그대로│민정연
319 서울대 미대 졸업자의 배다리 '주민되기'│민운기
331 정의를 강물처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처럼│김일회
340 인권운동 20년의 반성│박래군
351 무엇이 나를 여기 있게 하는가│신현수
371 삶의 현장인 지역과 나의 의식변화│김정택
383 ‘나'의 지난 목회 20년 회고│박종렬

04.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398 어느 날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아버지를 위하여│오누리
407 20년, 무거운 리듬을 타고 흐르다│민재기
416 악당 레슬러의 탄생│김남훈
427 변화 없음의 변화│박새봄
437 시간은 아팠던 기억도 무디게 만든다│차형석
447 그때, 내가 본 것의 의미│노순택
462 상흔과 부채의식, 그 이후│이명원
471 또 겨울이다. 봄은 오려나?│홍순천
481 내 신체는 누구의 것인가│김남일
─'국가'에서 '국가 바깥'으로, 다시 '국가 너머'로
492 출판인으로 살아가기│한철희
503 사법개혁에 관한 회고│박시환
515 배다리 헌책방거리│곽현숙
528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영화스님
540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했지만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이충렬
550 처음처럼, 처음보다 더 큰 꿈을 꾸는 삶을 위하여│김소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백파이어 폭격기’로 본 '정보'에 대한 어떤 생각.





지난 냉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만한 전략폭격기 중 하나가 구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백파이어폭격기'란 것이 있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일은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핵무기를 투사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핵무기를 소형화하면 할수록 사용할 수 있는 용도가 다양다종해지기 때문에 누구라도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고 싶어 하지만 핵무기란 기본적으로 원자를 분열시키기 위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온고압이 필요한 무기이므로 소형화하기 위해선 대단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간혹 우리 힘이든, 남의 힘이든 첨단 로켓을 개발하여 쏘아 올리면서 이번엔 위성의 무게가 몇 톤까지 가능하다거나 뭐라거나, 블라블라 하면서 로켓의 탑재 중량을 따지는 이유는 로켓이란 것이 언제라도 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사하면 로켓이요, 저들이 발사하면 로켓도 미사일로 의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쨌거나 핵탄두를 가지고 있다한들 그걸 목표지점까지 안전하게 보내서 터지게 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 그걸 가지고 있다가 우리나라에서 터지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서 동서냉전이 시작되자 구소련과 미국은 서로 상대방 진영까지 어떻게 하면 핵탄두를 안전하게(?) 날려 보내서 요격당하지 않고, 무사히 폭발시킬 수 있을까 경쟁을 벌였다.

다시 말해 동서냉전 시대 무기개발의 역사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단순히 핵무기를 개발한 역사가 아니라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핵탄두를 상대방 진영에 무사히 투사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는 역사이자, 반대로 상대의 핵탄두가 우리 진영까지 넘어오지 않도록 저지(요격)한다는 역사다. 그리고 이 역사는 동서냉전이 해체된 이후엔 그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와서 MD(미사일방어체계)란 말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핵을 상대 진영에 투사하는 무기 체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가 육지에서 발사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고, 둘째가 핵잠수함에서 발사되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고, 셋째가 전투기나 폭격기 등에서 발사되는 공중발사 핵순항미사일(ALCM)이다.

'핵폭탄'하면 사람들은 과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을 떠올리지만 현대 핵전쟁에서 핵폭탄이란 곧 '핵미사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표상공까지 비행기가 직접 날아가서 공중 투하하는 핵무기는 없다는 말이다.

인천문화재단이 발간하는 문화잡지 이름이 "플랫폼"인데, 무기 체계에서 플랫폼이란 대부분 이렇게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말한다. 육상에서 발사되는 미사일을 이동시키는 차량, 잠수함, 전폭기 등이 바로 미사일을 발사하기 위한 플랫폼들로 개발된 무기시스템이다.

동서냉전 초창기 미국은 엄청난 강대국이었다. 지금이야 군사력만으로 강대국이라 할 수 있지만, 당시엔 모든 방면에서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제트 전투기들이 개발될 만큼의 국력이 있었고, 실제로 새로운 전차와 전함과 무기 체계들이 개발되었다. 이 무렵 자고나면 새롭게 개발되는 전투기 시리즈들의 코드 넘버가 '100'자리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 제트 전투기들을 이른바 '센추리 시리즈'라고 불렀다. 그런데 베트남전 이후 미국 경제가 몰락하면서 국방비가 삭감되자 미국 국방부는 구소련이 가지고 있는 무기 체계를 엄청나게 부풀리기 시작했다.

모순(矛盾)의 싸움에선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군대의 힘을 부풀려야 상대적으로 예산을 따내기가 쉬울 수밖에 없다. 놓친 월척이든 이미 잡은 월척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강태공들에겐 점점 더 커지는 법이듯이 말이다. 결과적으로 미 국방부의 대표적인 '뻥' 사례 중 하나로 밝혀진 폭격기(물론 그렇다고 이 폭격기를 가볍게 무시할 정도란 뜻은 아니지만)가 바로 Tu-22M 백파이어 초음속전략폭격기였다(현대전쟁에서 어떤 무기 체계에 '전략'이란 말이 붙는다면 거의 무조건 핵무기 체계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시면 된다).

Tu-22M 백파이어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소련 위협론의 유력한 증거로 떠들썩했던 초음속 폭격기였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이 폭격기가 소련에서 발진해 대서양을 횡단해 미국까지 와서 핵 폭격이 가능한 기종이라고 주장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이 기종은 대륙간의 대양 횡단비행 능력이 부족했고, 유라시아 대륙의 주변 작전시 전역 폭격기로 사용되는 기종이라고 보아야 마땅한 정도였다. 또 당시 소련의 폭격기 기종들은 가속 및 속도에 중심을 두어서 항속거리 등에서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이처럼 떠들썩하게 부풀려 두긴 했지만 이후 소련이 붕괴되면서 실체가 판명되었으나 논란이 될 만큼의 고성능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판명되었다. 여기까지가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사실 미국 CIA(중앙정보부)는 이 기종이 개발되고 얼마 안 된 냉전 당시에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을까?

당시 미 중앙정보부는 위성 촬영 등을 통해 이 기종의 전체 제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 기종의 무게는 알 수 없었다. 무게를 알아야 엔진의 추력 등을 계산해 상승한도, 항속거리, 최대 속도, 순항 속도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정보는 기체 제작에 사용된 금속의 재질을 파악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건 일급 기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길이 42.46 m
폭 34.2 m(후퇴시 23.3m)
높이 11.05 m
자체중량 54,000 kg
총중량 124,000 kg
상승한도 13,300 m
최대속도 마하 1.88
엔진 사마라/쿠즈네초프 NK-25(A/B) x 2
행동반경 2,400 km
승무원 4
제작(개발) Tupolev

미 중앙정보부는 항공기 제작 공장에서 기체를 제작하고 남은 금속을 이용해 소련의 국영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의 기내 옷걸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소련을 여행하는 여행객으로 가장한 요원이 아에로플로트의 기내 옷걸이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린 뒤 청소부를 매수해 쓰레기 더미에서 옷걸이를 빼내는데 성공했다. 미 중앙정보부는 이 옷걸이를 비밀리에 미국의 연구소로 보내 금속의 합금 비율과 밀도 등을 분석햇고, 결국 백파이어 폭격기의 무게를 산출해내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이 폭격기의 항속거리가 그들이 염려했던 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미 중앙정보부(랭글리)와 국방부(펜타곤) 그리고 보수우파 강경세력인 레이건 행정부는 굳이 이런 사실을 대중에게 공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 이른바 '스타워즈(Star Wars)' 계획이라 불리는 전략방위계획 - 을 발표하고 추진하여 오늘날의 미사일방어계획(MD)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 지하철 앞에는 좌판을 벌여놓고 한 권에 500원 하는 싸구려 책들을 판매하는 노점상들이 있었다. 거기에서 파는 책들 중엔 이름 없는 출판사가 일본의 탐사전문(?) 저널리스트들의 책을 대충 번역해서 대충 만든 책들이 있는데 간혹 그런 책들 중에도 건질 만한 것들이 있다.

예전에 내게 처음 일을 가르쳐주었던 선배는 극작가로 데뷔한 작가였는데, 이 선배는 내가 읽는 책들을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그런 충고를 해준 적이 있다.

"너 글쟁이가 되려면 그렇게 좋다는 고전이나 명저만 읽으면 안된다. 그런 책들이 좋은 책이긴 하지만 정작 그런 책에선 뽑아먹을 게 별로 없거든. 진짜는 <선데이서울>이나 <아리랑> 같은 책에 실린 수기 같은 거야. 그런데 실린 형수를 사랑하게 된 시동생 이야기 같은 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사실, 세상에 유통되는 모든 유용한 정보 혹은 이야기란 모두 어떤 이들 눈에는 쓰레기더미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조합해내는 시선의 필터를 통해 건져낸 것이다. 유능한 이야깃꾼 혹은 정보분석관은 그 필터(시선과 저변)가 특별한 사람인 것이지 언제나 특별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루 추안 감독의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2012)>은 영어 제목 'The Last Supper'가 영화의 내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유방 역을 맡은 '류예', 항우 역을 맡은 '오언조, 한신 역을 맡은 '장첸'의 연기는 물론 여씨 부인역을 맡은 '진람'의 연기가 기존 중국 배우들의 과장되고 기름진 연기와 달리 기름기를 거둬내 담백한 편이다.

영화 속에서 만찬은 영화의 앞 부분과 뒷 부분에 두 번 반복된다. 앞의 한 번은 유방이 진나라의 수도인 장락궁을 함락시킨 뒤 권력과 환락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장량의 조언을 듣지 않고, 불필요하게 항우를 자극시켜 죽음 직전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는 '홍문의 연(鴻門宴)'을 겪은 뒤 극적으로 생존하는 만찬이다. 항우와 유방은 진을 멸망시킨다는 공동의 대의로 뭉쳤으나 이후 천하쟁패를 위해 투쟁하는 관계가 되는데,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가 '홍문의 연'이었다.

뒷 부분의 만찬은 항우를 제거하고 천하를 차지한 유방이 자신의 권력을 후대에 안정적으로 전해주기 위해 오랜 맹우이자 또 한 명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한신'을 처단하기 위해 마련한 만찬이다. 교활한 토끼가 잡히고 나면 충실했던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잡아먹게 된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은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 재상 범려(范蠡)의 말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 말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한나라를 창업한 한 고조 유방이 한신을 비롯해 견마지로를 다했던 개국공신들을 차례로 겁박해 숙청했던 사례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등장하진 않지만 한신 역시 토사구팽의 세태를 한탄하며 죽었다는 일화로 이 고사성어에 빛과 그늘을 더해주기도 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중국 당국에 의한 검열에만 5개월여가 소요되었다고 하던데,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최근 중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보시라이'의 실각 사건 같은)를 주는 등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보시라이는 잘 알려진 대로 중국을 건국한 혁명 주역들의 2세인 '태자당(혁명 원로 및 고위 간부 자제 그룹)' 출신으로 시진핑과 같은 계열이고, 리커창(후진타오)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이다. 이 구도를 고스란히 '귀족(항우) vs. 평민(유방)'으로 놓을 수는 없지만 - 그렇다면 '여씨 부인(상하이방)'인가? -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한신을 숙청하기 전 여씨 부인의 입을 통해 이런 대목이 두드러지는데, 여씨 부인은 자신이 만나본 인간들 중에 가장 고귀한 인격을 지닌 사람은 '항우(귀족)'였다며, 자신도 인질로 잡고 있어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으며 유방도 여러 차례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항우는 백골이 되었다고 말한다.

평민 출신의 '유방'은 "왕후장상에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라고 외치며 귀족 출신인 항우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지만 정작 그 자신이 권력을 잡고나자 바로 자신이 내세웠던 '이데올로기'에 의해 겁박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역사가로서 사마천은 현대의 지평으로 바라보았을 때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사마천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것은 평범한 농민 출신의 혁명가 '진승'을 역대의 제후들을 올리는 자리인 〈세가〉의 반열에 둠으로써 그를 역대의 제후들과 동렬(同列)로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주나라가 그 도(道)를 잃자 (공자는)<춘추>를 지었다. 진나라가 정치를 잘못하자 진섭(진승)이 봉기하고 제후들도 난을 일으켰는데, 그 기세가 풍운을 일으키면서 끝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천하를 다투는 발단이 바로 진섭의 반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훗날 반고가 저술한 《한서》가 기본적으로 《사기》를 그대로 초록(抄錄)한 것임에도 진승을 열전에 넣고서도 그를 찬양하는 말을 모두 빼버린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또한 사마천은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논하지 않았으니 '항우'를 <본기>에 넣은 것도 후세인으로서 찬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유방이 천하를 쟁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새로운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일찌감치 멸망한 까닭에 대해 중국인들이 느끼는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은 시황제가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진의 수도 함양(장락궁)을 차지한 유방에게 진의 마지막 황제 '자영'은 천하통일의 패업을 멈추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이 있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2002)>에서 천하의 자객들을 무릎 꿇게 만든 '천하'론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는데, 진 시황제가 멸망한 까닭은 그의 대의가 그릇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항우는 이런 시대적 흐름을 간과한 복고주의자로 역사적 반동인 셈이었다. 일찌기 공자는 "順天者는 存하고, 逆天者는 亡한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하늘을 민중의 '시대정신'이라 보았을 때, 항우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민중의 열망과 진나라가 이룩한 변화된 세상의 구조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다. 항우가 공자가 흠모한 주나라 문왕의 도를 따랐다기 보다는 귀족 출신의 신분적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초한지: 영웅의 부활(2012)>을 보는 내내 일본판 <멕베스>로 구로자와 아키라의 <거미의 성>이 있다면, 이것은 중국판 <맥베스>가 아니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내용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루 추안 감독이 상당히 서구적인 감감과 감수성을 지닌 감독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최근 중국 영화들을 볼 때마다 여러 고민들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은연 중에 미국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처럼, 중국 영화들 역시 중국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들 때문이다.

마치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 코리안시리즈 3차전 시구에서 하고 많은 브랜드 중에 굳이 일본 브랜드 신발인 '아식스'를 신고 나온 것에 대해 여러 추측을 하게 되는 것처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