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헨리 포드부터 마사 스튜어트까지 현대를 창조한 사람들 - 전성원 (지은이) | 인물과사상사 | 2012-08-16

 

 

목차

 

책을 펴내며
01 헨리 포드 - 현대를 창조한 포드주의, 그리고 포드주의가 창조한 현대의 시간
02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 민족해방운동과 테러의 상징, AK-47 돌격소총
03 윌리엄 보잉 - 전쟁과 평화의 두 얼굴을 가진 하늘의 거인
04 샘 월튼 - 유통혁명을 일으키고 워킹푸어를 양산하다
05 모리타 아키오 - 소니 워크맨이 만든 개인주의 혁명
06 조지 갤럽 - 침묵하는 다수의 생각을 읽어 여론 제국을 건설하다
07 에드워드 버네이스 - PR의 아버지 혹은 정보조작의 대부
08 로버트 우드러프 - 콜라를 통한 세계화, 코카콜로니제이션의 대부
09 새뮤얼 제머리 - 바나나 공화국의 녹색 교황 치키타와 과거사 청산
10 존 D. 록펠러 - 20세기 석유 문명을 만든 탐욕과 자선의 야누스
11 뒤퐁 가문 - 끊임없는 변신으로 20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듀폰
12 월트 디즈니 - 한 마리 생쥐로 시작한 글로벌 미디어 제국
13 콘래드 힐튼 - 세계인을 고객으로 호텔 네트워크를 건설한 호텔의 제왕
14 휴 헤프너 실크 - 파자마를 입은 성 혁명가 혹은 포르노 제국을 건설한 플레이보이
15 마사 스튜어트 - 행복한 가정이라는 거대한 환상을 판매하는 살림의 여왕
16 프리츠 하버 - 녹색혁명에서 육식혁명으로 이어진 풍요를 발명한 비운의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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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

날 보고 별 걸 다 기억하는 역사학자라 하지만, 전성원은 그런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꼼꼼한 디테일을 가졌다. 전성원은 자신이 태어나던 해 세상을 떠난 전태일의 “나는 돌아가야 한다”라는 다짐을 잊지 않고, 바람구두를 신고 근대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지적 방랑 중에 발견한 그 엄청난 디테일을 지금 이곳에 살아서 펄펄 뛰게 부려놓는 재주와 내공을 갖고 있다. 면허장도 타이틀도 없는 진짜 고수 전성원은 우리를 지배하는 일상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가를 생생히 보여준다. - 한홍구 (역사학자)


 

전성원은 내가 아는 최고의 잡학가이자 우리 시대의 르네상스맨이다. 그 쓸데없는 얘기들은 다 뭣에 쓰려고 머릿속에 담아두고 다닐까 싶었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게 틀림없다.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잡식이 이렇게 멋진 책을 만들어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현대적 일상의 발명자들, 그들의 흥미로운 역사를 통해 우리 자신의 삶과 이 세계를 좀 더 잘 알게 된 건 그의 놀라운 잡학 덕분이다. - 김창남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문화대학원 교수)

 

 

‘현대’를 ‘발명’한 괴짜들에 관한 흥미진진한 뒷담화

어린 시절의 독서편력을 돌이켜볼 때, 지금도 분이 풀리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어린이 위인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괴상망측한 책들 때문이다. 그 책들은 대부분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도 밝히지 않은 채 수상쩍은 인물들을 끝없이 칭찬해댔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이분은 너무 훌륭해서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위인전 속의 주인공들은 나라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고 외모도 키도 피부색도 달랐지만,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찢어지게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기묘할 정도로 반복되는 불운과 역경을 초인적인 재능과 의지로 맞서 이겨내며 끝내 위대한 인물이 되고야마는 천편일률적 인생역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철이 들고 나서야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됐다. 위인전 속 대다수 위인의 삶이 실제로는 심각한 알콜의존증이나 성병, 각종 콤플렉스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다는 점,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친구를 배반하거나 친구의 애인을 강제로 빼앗거나 이기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 게다가 몇몇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잔혹한 독재자, 살인마, 전쟁광이었다는 점. 그런 책을 찍어낸 어른들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라는 둥 허울 좋은 변명을 늘어놓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 어른들의 지성이 딱할 정도로 저열했을 뿐이다. 어쨌든 그들 덕분에 어린 시절의 내 정신세계는 그만큼 황폐해졌다. 오직 ‘영웅’과 ‘악당’과 ‘배신자’만 존재하는 삼분법적 세계관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으니 말이다. 요즘의 어린이용 위인전들을 보면, 예전만큼 처참한 수준의 책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영웅/악당/배신자의 삼분법만큼은 여전하다. 그런 책을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독후감까지 써내느니 그냥 컴퓨터게임이나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어린이 위인전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어른들이 읽는 인물평전도 함량미달인 게 적지 않다. 한국에서 좋은 평전들이 많이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특정한 주제 아래 솜씨 좋게 기획된 인물열전 같은 종류의 책은 여전히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전성원의 이 책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는 거대한 인물의 삶을 깊게 파고들어가는 ‘정통파’ 평전 내지 열전은 아니지만, 기획과 발상, 인물선정, 주제의식이라는 면에서 참신하고 흥미로운 인물열전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교양도서로서는 최고 수준의 엄밀함과 꼼꼼함도 갖추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절대다수(세 명만 빼고)가 미국인이란 점도 재미있다.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겠지만, 그만큼 ‘현대’, 20세기라는 시기가 미국이라는 국가를 빼놓고는 논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사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상징적 20세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의 방증이 아닐까.

 

이 책에는 헨리 포드, 월트 디즈니, 록펠러 같은 누구나 알만한 인물들 외에 에드워드 버네이스, 새뮤얼 제머리, 프리츠 하버처럼 일반 독자에게는 다소 생경한 인물들도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 예를 들어 TV 광고를 보고, 대형마트에 가고, 비행기를 타고, 여론조사에 참여하고, 옷을 입고, 주방용품 쇼핑몰을 들락거리는 일 하나하나에 그런 일상을 일상이 되게끔 만든 선구자가 있으며 그들이 처음에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분명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진가는 따로 있다. 인물들 각자의 천재성이나 개성이 인류의 삶을 크게 바꿔놓기도 했지만, 그런 인물들의 시도들조차 더 큰 시대적 변화에 삼켜지게 된다는 것, 그 역동적인 사회사적 과정을 절묘하게 포착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성원은 한명 한명의 삶을 출생부터 임종까지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도 이들이 생전에 한 일들이 오늘날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라는 화두를 단단히 움켜쥐고 시종일관 사회적 의미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교양(liberal arts)’이란 말이 단지 아마추어리즘으로 폄훼되고, ‘덕후(오타쿠)’라는 말이 준전문가 내지 전문가라는 의미로 존중받는 시대이기에 더더욱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의 의미는 각별해진다. 극도로 분업화하고 전문화된 사회로 변해갈수록 우리 인간은 거대한 오류나 비극의 책임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같은 인간 한명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미사일 버튼을 명령에 따라 누름으로써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정된 인지자원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인간으로서 그것은 일종의 생물학적 제약이기도 하지만, 그 제약 뒤로 숨어버리는 것은 글자그대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지적 노력, 이를테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와 같은 정답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행위야말로 ‘교양’이 요구하는 일상적 실천이다. 내가 이 책을 교양서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다. 잡다한 지식을 그저 모아놓은 정보의 집적물이 아니라, 우리가 선 자리와 걸어온 자리를 끝없이 돌아보고 성찰하고 질문하는 책이라는 의미에서,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는 교양도서의 어떤 모범을 보여준다. 감히 단언컨대 이것은 오랫동안 감수성 예민한 이들의 등대가 되어주던 ‘바람구두의 문화망명지’ 주인장 전성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독자제현께 일독을 권한다.

 

-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전 월간 『말』 기자, 『소수의견』『88만원세대』 저자

 

* 내 책이 출판되어 시중에 깔리는 경험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단독저서로는 처음이라 그런지 감회가 남다르다. 내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한 김창남 교수님이나 평화박물관에서 황해문화에서 여러 일로 겹치는 한홍구 교수님에게도 감사하지만 박권일 선생과는 남의 행사장에서 예정에 없이 딱 한 번 얼굴을 본 사이에 어렵사리 서너 줄의 추천사를 부탁했을 뿐인데 이렇게 긴 글을 써서 보내주었다. 그 정성에 감격했고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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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안철수 교수가 자신에게 있다고 하는 300여 명의 멘토 중 하나(?)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현재 평화재단 평화연구원 원장)을 초대해 아침대화 조찬강연을 진행했다. 윤여준 원장을 9월 아침대화 강사로 초청한 것은 이번 해프닝이 있기 이미 한 달여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그를 추천하고 섭외하기로 결정한 누군가(아마도 나)가 대단한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주변의 흥미를 더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안철수 서울시장 출마를 반드시 긍정적인 현상으로만 보지는 않았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누군가의 표현대로 요 며칠 동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기분으로 빠르게 전개되는 한 편의 정치드라마를 바라보듯 숨가쁘게 현장의 변화를 주목해야만 했다. 오세훈 前 서울시장의 묻지마 막가파 주민투표가 결국 투표함도 개봉해보지 못하고 무산되면서 여야 각 진영에서 예비 후보들이 발빠르게 움직이는 정국이었다. 그 와중에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후보단일화 과정의 금품제공 의혹마저 불거져 나오면서 서울시장을 비롯한 재보선 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미한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국회의원과 달리 시장은 바꿀 수 있는 게 많다"고 했던 안철수 교수가 던진 한 마디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고 급기야 안철수 서울시장 출마선언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고 공감하는 바 그대로 '안철수 신드롬'의 저변에는 기성정치권과 정당정치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불신과 반발이 깔려 있지만 이것이 기존의 폭발력있는 정치 신인들이 던진 파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불신과 반발의 파장 안에 진보와 시민사회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안철수 신드롬'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윤여준 원장은 "2012년, 어떤 국가 리더십을 선택할 것인가"란 주제로 오늘의 강연을 진행했는데 그가 말한 강연의 핵심은 물론 2012년 대선에서 유권자인 시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내려 훌륭한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었다. 과거를 성찰해본다는 의미에서 윤여준 원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 그가 공직자로서, 일반 시민으로서 거쳤던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들, 특히 전현직 대통령을 중심으로 예리한 분석과 비판을 전개해 나갔다. 그가 개별 대통령들에 대해 어떤 비판과 판단을 내렸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가 주장하는 국가 리더십을 이끌어가야할 대통령이 지녀야 할 미덕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었다.


첫째는 올바른 국가관을 지닌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헌법이 지닌 의미와 공공성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는 대통령을 뽑아야 하며, 셋째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국가관, 특히 올바른 국가관에 대해 주장하는 이들이 대개는 보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구세력의 오래된 구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윤 원장의 '올바른 국가관'이란 말에 대해 다소의 불신을 먼저 품게 된다. 그러나 윤 원장이 말하는 국가관이란 국가란 무엇이며 국가의 지도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알고 있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신뢰를 보이는 집단이 경찰과 국회란 사실을 적시하면서 국가란 유일하게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인데 이때의 폭력이란 오로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데 사용되어야 하며 대통령은 이런 국가의 특성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 헌법이 가지고 있는 헌법 정신을 살리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할 것인지 깊이 자각한 인물들이 정치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민주주의란 겉으로 보기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정쟁과 논쟁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비효율적인 정치체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무시하고 효율성에 매달리게 된다면 더 큰 혼란과 갈등으로 인해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친 까닭은 결국 그가 바라보았던 전현직 대통령들의 리더십이 각각의 이유로 인해 우리 사회를 올바른 정치적 리더십으로 이끌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강연을 마치자 한 질문자가 그럼 현재 대선후보군 중 그와 같은 리더십에 가장 근접한 후보가 누구냐고 묻자 윤여준 前장관은 반은 농담조로 "안철수, 안철수!"라고 두 번 짧게 말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얼마 전 안철수 교수는 자신에겐 윤여준 이외에도 많은 멘토가 있으며 윤여준 원장의 생각대로 따르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윤여준의 마음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내게 안철수 교수의 몇몇 발언들을 지적하며 안철수 교수가 경박하고 예의없는 사람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나는 "아마도 그것이 안철수의 매력"일 것이라고 답했다. 어떤 의미에서든 안철수 신드롬의 바탕에는 그가 정치인이 아니며 정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나는 앞서의 대답에 약간의 부연을 덧붙였는데, 안철수의 저와 같은 발언은 결국 그가 정치적 야심 - 어떤 이는 이것을 권력의지로 부를지도 모르겠으나 - 이 별로 강하지 않다는 뜻이며 안철수가 윤여준 이외에도 많은 멘토가 있다고 말한 것은 정치적 고려 없이 안철수의 입장에선 그것이 팩트(fact)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거칠게 말해서 안철수의 매력은 그가 인간적 이해관계에 대해 어려서부터 훈련을 쌓은 사람이 아닌 이과(理科)적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아마도 인문계 고교에서 문이과 분반되는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공감가는 부분일 것이다.


어쨌든 안철수와 윤여준이 본의든 아니든 함께 벌인 5일간의 해프닝들은 결론적으로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였지만 그 5일의 시간 동안 대한민국, 아니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정치체제가 국민들의 민의를 반영하고 이끌어 간다고 했던 대한민국의 정치가 실상은 그 중심이 얼마나 공허하고 허망한 것이었는지 백일하에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국 정치의 재생산 구조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얼마전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극우파 청년의 무차별 테러를 보면서 물론 끔찍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비록 참사의 현장이긴 했지만 노르웨이 노동당의 청년캠프가 부러웠다.


얼마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기업은 일류인데, 정치는 삼류라는 막말 - 정치가 삼류란 주장은 동시에 국민이 삼류란 주장이기도 하니까 - 을 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란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도 하다. 우리 정치가 삼류인 까닭 중 하나는 좋든 나쁘든 과거엔 운동 경험을 통해 훈련받고 재생산되던 정치인들의 맥이 끊겼고, 이들에 대한 사회적 불신 등으로 인해 정치인 수급 역시 유명인 2세의 등장과 같은 급보수화 혹은 새로운 피 수혈 같은 일종의 벤처사업처럼 되어버리는 과정에서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현대와 같이 복잡한 갈등과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에선 제갈량 같은 정치인이 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한 명의 훌륭한 정치지도자가 출현하기 위해선 그 사회가 심혈을 기울여 이들에게 경험을 쌓도록 하고,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사회적 명망이나 반짝하는 인기를 통해 정치일선에 뛰어들게 된다면 안철수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변화와 개혁을 이끌어가며 훌륭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기 힘들게 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전철을 이미 경험하고 있다. 개혁은 정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좋은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개혁의 한 축이자 동시에 개혁의 대상이 되는 관료사회의 전문성을 상대할 만한 정치인은 단시간 내에 출현하기 어렵다. 그것이 내가 안철수의 정치 참여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흔히 윤여준 원장을 일러 범보수의 제갈량, 대한민국의 장자방이라 한다는데 직접 그와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소감으론 윤 원장은 다만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을 지닌 인물일 뿐 책사나 모사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인상이었다. 물론 한 차례의 짧은 만남으로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그가 별난 사람이거나 특별히 진보로 오인될 어떤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 보수세력의 수준이 이 정도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경직되어 있으며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이가 드물다는 것이 문제다.


결국 안철수는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하면서 더욱 많은 파장을 불러왔는데 나는 안철수 신드롬의 한 원인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하고 싶다.


"兩心不加鎰一人, 一心可鎰百人."


이것은 회남자에 나오는 말로 "두 마음으로는 한 사람도 얻을 수 없지만 한마음으로는 백 사람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안철수 교수가 그토록 단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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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구나. **아!
그간 어려운 일들이 많았구나.

너에게 위로를 주고 싶지만, 나 역시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이곳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도 내 영혼은 계속 굶주림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랜 벗들에게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절교의 말들을 가다듬고 있다.

**아, 이런 경우 대개의 위로란 이런 식으로 출발하기 마련이다. 내가 살면서 겪어왔던 여러 어려움들을 너에게 들려주면서 나는 이렇게 살았고, 그것들을 이렇게 극복했다고 말하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너와 같은 어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너와 같은 괴로움을 안고 있다 해서, 같이 삶의 진구렁 속에서 뒹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서로에게 위안이 되겠느냐?

그래서 나는 네게 내가 과거에 너와 비슷한 경험 혹은 그 보다 더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 있었음을 결코 자랑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위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학의 길, 작가의 길을 걸어가려는 너에게 한 마디의 충고를 한다면... 그것은 나의 말을 대신한 파블로 네루다의 충고다. 너에게 파블로 네루다의 이 말과 이 시를 위안을 대신하여 주길 바라며 건넨다.

"젊은 작가는 외로움의 몸서리 없이는, 설령 그것이 단지 상상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글을 쓸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성숙한 작가가 인간적 동료의식이나 사회의 맛이 깃들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시(La poesía)


그러니까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 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혹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찔려
벌집이 된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 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이슬라 네그라의 추억』(1964) 중에서


나는 나의 언어와 생각을 평생동안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이미 무수히 많은 말들이 도착해 있고, 사람들은 나의 말에 귀기울이는 척 할 뿐 결코 삶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평생 외로울 것이다. 견뎌라! 이 질긴 삶이 너의 생명을 거두어 갈 때까지....

너는 이 세상의 견디기 어려운 두 가지 외로움을 선택했구나, 하나는 글을 쓴다는 것, 다른 하나는 좌파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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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은 결코 미덕이 아니란 말은 이제 흔하다. 알고보면 겸손도 치장에 불과하단 말은 겸손이란 것도 일종의 코스츔, 위장된 인격에 다름아니란 말이다. 이 말의 속깊은 뜻은 결국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당신이 내게 보여주는 모든 인격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받아줄 만큼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란 경고의 메시지가 도처에서 발하여진다. 

어려서부터 겸손하란 말을 많이 들었다. 어른들로부터... '잘난 척 나대지 말고, 겸손하라'는 충고를 들었었다. 아마도 그 무렵의 나는 재기 넘치는, 솔직한 소년이었나 보다.

지난 주말부터 3일 연속으로 술을 마셨다. 술을 안 먹을 때는 몇 개월이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데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원해서건 그렇지 않아서건 계속 마시고 싶어진다. 절제란 걸 도통 모르는 인간이란 거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기에... 그것이 무엇이든 조심하려 한다. 사랑도, 미움도 넘치는 인간이다.

내게 있어 인간의 삶을 판단하는 기준, 좌우하는 건, 밀도(density, 密度)다. 밀(密), 한자 "밀"은 깊은 산 은밀한 곳에 모셔진 신. 신전(神殿)을 형상화한 한 모양이란다. 중국의 신전, 즉 사당은 어딜 가나 주변을 나무로 병풍처럼 둘러친다. 공자를 모신 곡부의 공묘(孔廟) 역시 주변의 엄청난 면적에 떡갈나무 등을 빼곡하게 심어두고 있다. 비밀스러움과 더불어 빽빽하다는 뜻은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무덤 혹은 신전, 사당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의미로 보자면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의 완성이다.

인간의 삶이 밀도에 의한다는 것도 그런 뜻이다.

물리적으로 보았을 때 밀도란 단위부피당 물질의 질량을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 밀도란 그가 자신의 마음 주변에 얼마나 많은 생각의 나무, 다시 말해 사람을 사귀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가를 측량하는 단위일 수 있다. 한 인간이 점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나 지위와 상관 없이 얼마나 깊은 인간이며, 얼마나 무게 있는 인간이냐에 따라 결정된다. '밀'이란 말에는 '자상하게 널리 미치다'란 뜻도 있다.

오늘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은 대개 존경 받을 만한 인간들이라기 보다는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이 소비할 수 있는가?로 결정된다. 그러나 밀도란... 얼마나 많이 남을 돕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품고 있는가?에 의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생각의 나무가 무엇을 양분으로 하여 자라는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없이 자라는 마음의 나무는 없는 법이다.

덧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자로서의 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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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이라는 말을 뜻하는 한자어는 두 가지 모두 표준어로 쓰인다. 하나는 ‘하고자 할 욕(欲)’을 써서 ‘欲心’이고 다른 하나는 ‘욕심, 욕정을 뜻하는 욕(慾)’을 써서 ‘慾’이다. 세속도시에서 신선처럼 살다간 화가 장욱진(張旭鎭)은 늘 입버릇처럼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뒤이어 나오는 격식과 겸손이 하나의 구(句)를 이루고, 교만과 소탈이 역시 또 하나의 구를 이룬다. 이 말을 다시 풀어보면 ‘나는 심플하다 그러므로 격식을 갖추느라 꾸미는 겸손보다 소탈한 교만이 좋다’는 뜻이 된다. 장욱진의 발언이 지닌 핵심은 단순성(simplicity)이다. 파블로 피카소는 여러 장의 황소 그림을 그려놓고, 자신이 대상을 단순화시키는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자세히 묘사된 황소에서 점점 살갗이 벗겨지고 결국 몇 개의 선으로만 묘사되는 황소는 여전히 황소였다. 그런 심정으로 나 역시 약간의 교만을 벗 삼아 말해보려고 한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문화망명지 - 깃발 없는 자들의 모임”으로 커뮤니티가 ‘분리’되었다. 분리란 표현이 마음에 좀 걸리긴 하지만 액면 그대로 ‘분리’라는 속성도 분명히 지니고 있다. 이걸 좀더 좋게 표현하면 발전이랄 수도 있는데, 나는 발전이란 표현보다는 진화 혹은 진보란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지난 2007년 연초에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는 정보트러스트어워드란 상을 받았다. 나는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는 현재 이미 완성된, 다시 말해 ‘welll-made’된 사이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해가는 사이트”라고 말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물학적 입장에서 진화(evolution)란 ‘돌연변이’에 의한다. 문화망명지의 진화 역시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돌연변이의 원인은 크게 내부적인 요인(자연발생적) 즉 유전물질의 복제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하거나 방사선이나 화학물질 등과 같은 외부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하는데 문망의 입장에서 보자면 바람구두라는 한 개인이 지향하고 주장해온 방향성에 공감하는 이들의 마음으로 전이(轉移)되고 수용(收容)되는 과정에서 변이(變異)를 일으키는 것을 내부적 요인에 빗댈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의 변화 혹은 각자가 살아온 과정, 경험, 문화적 체험의 차이로 우리 모두 제각각의 다른 인격체일 수밖에 없는 모든 망명자들의 합(合) 역시 내 입장에서만 보자면 나와는 다른 존재, 변이일 수 있다.

문화망명지의 진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마음 썼던 것을 잘 안다.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어느 측면에선 침울해지기도 했고, 아쉬움도 진하게 남았다. 본래 내 것이었고,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내 것이라고 말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화를 선택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중 하나는 인간은 하나의 점(點)에 불과하다는 내 평소 소신도 작용했다. 점과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을 우리가 직선이라 부르듯 직선이든 곡선이든 모든 선(線)은 점과 점으로 이루어진다. 점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위치(point)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소실(消失)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이곳에서 꿈꾸는 것은 물론 문화망명이다. 그러나 ‘문화망명’이란 행위 역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문화망명 조차도 나에겐 하나의 방법론이지 그 자체로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어쩌면 그 목적지를 상징하는 것이 ‘깃발’일지도 모르겠다. “~ism”이 하나의 이념이 되기 위해 지향점이 있어야 하겠지만 나에겐 목적보다는 그 과정에 이르는 행로(行路)만이 존재한다. 점과 점으로 연결된, 연대하는 인간의 선(‘관계’라 부를 수도 있는), 어쩌면 나에게 목적은 그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이 '깃발 없는 자들의 모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길 위에 서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누구도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길 위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의 완성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점으로 시작되었고, 결국에 가서 다시 하나의 점으로 소멸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바람구두의 소실을 이야기하고, 안타깝게 여긴다고 말하지만 나를 움직이는 마음(慾心)은 그런 바람구두라는 하나의 점이 소실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는 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는 당신이 있어야 비로소 직선이든 곡선이든 만들어가며 움직일 수 있다. 내가 당신보다 좀더 큰 점이라고 치자. 그래도 점은 점일 뿐 선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의 선이 되기 위해 나는 나라는 점을 버리고 당신과 연결되어야만 한다. 반칠환 시인은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노랑제비꽃 화분이다”라고 노래하지 않던가.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나는 지금 누구보다 교만하게 말하고 있다. 한 송이 제비꽃이 피어나기 위해 지구가 통째로 필요한 것처럼 나라는 하나의 점이 온전히 유지되기 위해서도 당신들이 통째로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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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쥐를 가지고 놀 때, 쥐를 얼마쯤 도망치게 버려두기도 하고 쥐에게서 등을 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쥐가 고양이의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다. 만일 쥐가 그 테두리를 뛰쳐나오면 고양이의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잡힐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그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고양이가 지배하는 공간, 고양이가 쥐에게 허용하는 희망의 순간들, 그러나 잠시도 눈을 딴 데로 돌리지 않는 면밀한 감시와 해이해지지 않는 관심, 그리고 쥐를 죽이려는 생각. 이것을 모두 합친 것, 즉 공간, 희망, 빈틈없는 감시와 파괴적인 의도를 권력의 실체, 좀더 단순히 말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다." - 엘리아스 카네티



◀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805, 루브르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길가는 사람을 절벽으로 내몰아 죽이고, 돌림병에 시달리던 테베를 구원했지만, 결국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제 어머니와 붙어먹은 인간이었으므로 테베의 시민들에게 버림받았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영국의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후 치러진 선거에서 수상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대규모 융단폭격으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고, 현대적 전략폭격의 개념을 창시했던 이른바 폭격기 해리스로 불렸던 영국의 공군사령관 아더 해리스는 전후 '학살자 해리스'라 하여 훈장도, 기사 작위도 수여받지 못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은 단순히 상대의 육신을 취하는 카니발리즘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인류공동체는 필요에 따라 최고 권력자들도 희생양으로 요구한다. 그것이 군중과 권력의 진정한 관계이다. 

말벌 한 마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수만 마리의 꿀벌을 순식간에 죽일 수 있다. 말벌은 학살대상자를 찾아 정탐 말벌을 내보내 벌통을 확인하는 순간 페로몬을 발산해 동료 말벌들을 불러들인다. 정탐꾼의 페로몬 향기에 이끌린 30마리의 말벌은 벌통 하나에 있는 30만 마리의 꿀벌을 유유히 학살한 뒤 꿀벌이 애써모은 꿀과 애벌레들을 이용해 수주일 동안 살아간 뒤 다시 새로운 벌통을 찾아 학살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어떤 꿀벌들은 벌통을 정탐하기 위해 찾아온 말벌 한 마리가 미처 페로몬을 발산하기 전 순식간에 수만 마리의 꿀벌들이 동시에 한 마리의 말벌을 에워싸고 군무를 춘다. 꿀벌은 체내 온도가 48도까지 올라도 견딜 수 있지만 말벌은 47도까지만 견딜 수 있기 때문에 말벌 한 마리를 에워싸고 벌어지는 꿀벌들의 군무는 자신들의 체온을 높여 말벌을 쪄 죽이려는 속셈이다. 꿀벌들이 집단적으로 추는 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파괴할 타자에 대한 방어이자 개인적으로는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한 개체를 희생시킴으로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여러 군체들이 생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작은 어류들이 집단을 형성해 포식자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다. 

한 개체로 수만 마리의 꿀벌을 순식간에 살해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인 말벌이지만 꿀벌들의 집단방어체제에 갇힌 말벌은 꿀벌의 아름다운 춤이 빚어내는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숨진다. 인류의 집단적 지혜가 숨겨져 있는 신화 속의 수많은 영웅들, 반신반인의 초인적 능력을 갖춘 영웅들이 결국 사소한 질투와 시기로 인해 혹은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결국 비참한 몰락을 맞이하는 까닭은 평범함 군체들의 자기보호본능, 공동체를 핑계로 벌어지는 카니발리즘이다. 영웅은 죽음 이후 최고의 장례로 받들어지지만 살아 생전엔 결코 인정받지 못한다. 

사람은 육신으로 이루어졌고,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의 목숨을 빼앗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업보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는 업보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업보다. '바보 노무현'은 우리가 부추겨 올린 줄에 올라 한바탕 권력을 누렸다. 그 뒤 줄에서 떨어지자 다시 우리 손에 잡아먹혔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내는 애도 역시 '악어의 눈물'에 불과하다. 


▶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 1905~1994)


엘리아스 카네티는 <군중과 권력>에서 권력을 고양이와 쥐의 관계에 비유했지만 나는 가끔 실제로 벌어지는 사회현실을 해석하기 위해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정치학적인, 사회학적인 학습이나 훈련보다 꿀벌이나 개미 같은 곤충의 생태학, 늑대나 침팬지, 오랑우탄 같이 군체를 이루는 포유류에 대한 생태학 학습이 더 절묘하게 들어맞는 순간들을 발견하곤 한다.

"인간이 먹이를 구하는 방법은 교활하고 피비린내가 나며 끈덕지다. 수동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은 온건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멀리 있다고 감지하자마자 자기의 적들을 공격한다. 그리고 인간의 공격용 무기는 방어용 무기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을 '보존'하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시에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다른 것들을 원한다. 인간은 다른 것들보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 그것들을 죽이기를 원한다. 인간은 다른 것들이 자기보다 오래 살아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살아 있으려 한다."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다."
라고 엘리아스 카네티는 말했지만 가장 최후에 살아남는 인간, 다시 말해 최후까지 살아남는 권력자는 노무현이나 이명박 같이 특정한 개인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존재가 아니란 점이다. 우리는 모두가 남을 박해하는 존재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나보다 약한 자를 살해하고 괴롭힘으로써 생존하지만 그 결과 죄와 불안은 더욱더 커진다. 우리는 죄와 불안으로부터 구원되기 위해 자신을 박해받는 자와 일치시키려고 한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면서 '애도'란 그런 것이다. 애도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닌 산 자를 위한 것,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산 자의 영혼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다.

마피아의 법칙,
"살인자가 가장 큰 목소리로 애도한다." 노무현의 장례식은 이명박 정부에 의해 국민장으로 치러진다. 인간사의 보고로 일컫는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이 한 번은 상대의 죽음을, 그 다음엔 자신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첫 번째 장면에서 제갈공명은 자신의 계교로 죽음에 이른 주유의 장례식에 참석해 크게 곡하고 조문한다. 너무나 서럽고 애닯게 조문하는 제갈량의 모습에 감동한 오나라 사람들은 저처럼 자신을 잘 알아주었던 제갈량을 질시하다가 결국 스스로의 죽음을 자초한 주유를 협량한 인사로 여겼다. 

두 번째 장면에서 제갈공명은 사마중달의 공세로 위기에 처한 정국에서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자신의 사후에 벌어질 일련의 사태 진전까지 염두에 둔 계교를 꾸민다.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다는 첩보를 접하자 후퇴하는 촉나라 군대를 급습한다. 그러나 이를 미리 예견했던 제갈량은 자신을 꼭 닮은 목각 인형을 만들고 성문을 활짝 열어 사마중달의 의심을 부추긴다. 자신의 꾀에 자기가 빠진 사마의는 더이상 촉나라 군대를 쫓지 않고 후퇴한다. 이것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쳤다'는 <삼국지>의 일화다. 

그러나 '바보 노무현'의 죽음에서 <삼국지>의 제갈공명과 주유, 사마의 중달을 떠올리는 것도 부질없는 짓 같다. 나는 한 인간으로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하지만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에 대해서는 별로 애도하고 싶지 않다. 그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세상 바람처럼 와서 풍운에 따라 국가권력의 정상까지 올랐다가 떠나매, 전국민의 애도 속에 한 시대의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니 그로서도 후회가 없진 않겠으나 떠나는 마당에 담배 한 개비 이외 무엇이 아쉬웠으랴. 부디 잘 가시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업보 속에 또 무엇을 애도하랴. 

"삶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Beyond life nothing g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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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정식명칭은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사건이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5시 33분, 대한민국 수도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들, 경찰과 용역 직원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경찰특공대 1명, 철거민 5명이 목숨을 잃었고, 23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부터 추진했던 뉴타운과 도시정비사업의 결과였다.


서울시가 도시환경정비라는 목적으로 추진했던 도시정비사업은 서울 곳곳에서 벌어졌고, 그중에서 용산 4구역은 한강로3가 일대 5만3,442평방미터를 재개발하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재개발로 인해 인근의 땅값이 크게 올랐고, 그 결과 이 일대 지역에서 상가를 임대받아 장사를 하던 이들은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었다. 도시정비사업 관련 법률은 도시개발법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토지 보상법 등 여러 법률체계에 얽혀 있어 일반인들은 설명을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며 복잡한 법률체계의 틈바구니에서 법률이 서로 일치되지 않거나 행정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게 되어있다(이거 비정규직 법안과 많이 비슷하다).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철거현장마다 아수라장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법률체계의 문제다. 그리고 이런 법률체계의 틈새를 이용해 공공연한 불법행위들이 자행된다. 문제는 행정권력이 토지소유주들의 입장과 세입자들의 입장 사이에서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역시 도시정비사업의 한 주체로서만 인식한다는 데 있다. 서울시와 용산구는 도시정비를 통한 땅값 상승과 이를 통한 세비 증대 등을 이유로 도시정비사업을 강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서울시와 용산구는 토지보상법에 규정된 주거이전비를 철거지역 세입자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이들을 강제로 내쫓으려 했고, 저항하는 이들을 범법자로 몰았다. 국가권력은 세입자들을 내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용역들에게는 관용을, 이에 대항하는 세입자들은 범법자로 대했다(이 역시 비정규직과 흡사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가운데 학습지 교사, 보험외판원 등은 노동자임에도 노동자성을 부인당하여 노조를 결성하더라도 인정받지 못하는 법외노조가 된다. 법외노조를 영어로 하면 '아웃사이더 유니온'이다). 

범법자가 된 세입자들 중 생계를 위협받게 된 이들이 옥상 건물 위에 망루를 설치하고, 경찰과 용역 철거반에 맞서기 위해 화염병과 신너, 돌을 준비했다. 경찰은 이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사전에 최소한의 안전대책 마련이나 협상 없이 곧바로 경찰특공대를 진입시켰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용역들을 대동하기도 했다. 화재 발생의 직접적인 요인에 대해 일각에서는 농성자들이 화염병을 던져 생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판에 나온 경찰특공대원은 "진압 당시 화염병 던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 내부에서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인터넷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용산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철거민과 조합간의 보상비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이에 주목해 이것을 사회문제가 아닌 세입자와 조합 사이의 문제만으로 축소해서 보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용산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며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도록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구속처벌하고, 범대위 위원장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 역시 이것이 국가권력과 시민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 세입자와 조합, 세입자가 조합에게 좀더 많은 이주보상비를 뜯어내기 위해 벌였던 시위 사이에서 폭력성이 드러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한 애꿎은 경찰특공대원만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한다(이런 주장이 맞다고 박수치는 인간들은 어딜가나 꼭 있다).

UN사회권 규약위원회에서는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이 원치 않을 경우 겨울철과 같은 악천후에는 퇴거를 수행해선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용산4구역은 2008년 11월부터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국제사회는 겨울철 강제철거를 금지하고 있다. 검찰은 수사기록 등의 열람, 등사를 거부했고, 법원이 요구한 수사기록 3천쪽 역시 변호인단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변호인단이 수사기록이 전면공개될 때까지 공판이 중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끝내 거부되었고, 변론을 거부하자 재판부는 국선 변호인들로 하여금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겼다. 이에 반발한 피고인 9명이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운찬 신임 총리는 10월 3일 전격적으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했다. 바로 그 전날 용산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만장이 찢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정운찬 총리는 "정운찬 신임 국무총리는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해 자연인으로서 무한한 애통함과 공직자로서 막중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총리로서 사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기는 어렵다면서 당사자 간 원만한 대화가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운찬 총리의 사과나 사태해결에 대한 메시지에서 진정성을 발견한 국민은 거의 없었다. 오늘이 용산참사 만 2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사이 사태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던 총리가 물러나고 새로운 총리가 들어섰건만 용산참사 희생자 유족들과 이후 정부의 사태해결을 촉구했던 시민사회단체 관련자들은 정부의 사과와 사태 해결을 위한 조처는커녕 가혹한 기소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재판 선고일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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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 축구는 그냥 축구일 뿐이다. 축구와 월드컵에 대해 쏟아지는 온갖 비판에 대해 익히 알고 공감하면서도 막상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자꾸 감정이입이 되는 건 최소한 그들이 쏟아내고 있는 '땀'과 '눈물'은 진실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알리바이(alibi)
-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사하는 이에게 범죄 시각에 범행 이외의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알리바이'라고 한다. 좀더 유식하게 말해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이라고 하는데, 형사소송법상 범죄혐의를 입증하는 책임, 거증책임(擧證責任)은 검사에게 있다. '천안함'침몰사건에 대해 북한에 대고 스스로 혐의를 부인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자신들이 무죄라는 걸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들도 하나의 '국가'인데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국가의 알리바이'를 대라는 꼴이다. 과연 그 시간에 북한은 무얼하고 있었을까?

 

안개에 대하여
- 아침 출근하는데 한강에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 속 다리를 건너며 문득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그에게 있어 안개란 미궁이자 장막이었다. 학살과 약탈, 궁핍과 생존은 그너머에 있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홀로 죽은 친구. 나에게 '안개'란 그런 것이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갸날픈 희망이 완고한 절망에게 포위당한 '세상의 풍경', 희망의 손을 잡아주기에 절망은 지나치게 강하다. 해가 뜨면 안개는 사라지겠지만 그 순간은 인간의 삶이 견뎌내기엔 또 너무 기니까.

 

정보통제
- 범죄자가 주인공인 영화들은 폐쇄적인 구조를 갖기 마련이다. 영화의 사각 프레임이 열어놓은 창을 통해 바라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사회적 모럴(혹은 현실)과 차단된 채 극중 주인공인 범죄자들과 자기동일시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대부>에서 우리는 대체로 앞서의 이유로 말론 브란도나 알 파치노를 정말 나의 패밀리로 혹은 의탁하고 싶은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권력이 정보를 통제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이유도 동일하다. 

 

액션영화의 한 칼
- <글래디에이터>가 성공한 이유는 칼잡이들의 액션에만 있지는 않다. "민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 권력을 손에 넣는 길이다."같은 류의 대사들이 가끔씩 검투사의 칼보다 크게 움찔거리니까...

 

대표팀 감독
- 허정무 감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이것 한 가지는 꼭 기억하고 평가해줘야 할 것 같다. '국내파 최초의 16강 감독'으로가 아닌 국내파 감독 최초로 '월드컵을 즐기자', 패한 뒤에도 '그대들과 함께 해서 행복했다'고 말한 감독으로 말이다. 때로 결과는 모든 것을 증명해주지만, 결과를 모두 지켜본 뒤에 하는 말은 그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에겐 그저 하기 좋은 말에 불과하다.

 

어떤 희망
- "더 나빠질 게 없는 한국, 얼마나 희망적인 사회인가?"라던 김용철(변호사)의 말이 가슴에 확 와 닿는다. 젠장, 부인할 수 없어 희망적이다.

 

프레임 효과
- 인쇄술, 라디오, 복사기, 카세트테이프가 그러했듯 매체의 특성이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릇 안에 담겨지기 위해서는 내용물의 물성이 변해야만 하고, 그 변화는 처음엔 외형으로 오지만 나중엔 근본적인 변화까지 불러온다.

 

일생일업
- 권중달 선생이 지난달 사마광의 "자치통감" 완역본을 출간했다. 사실 출판계나 인문학 분야에서 올해의 10대 사건을 꼽는다면 첫손에 꼽을 만한 업적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원산지인 중국을 제외하면 근대 이후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 번역한 거의 최초의 업적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국가의 문화적 자존심을 세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권중달 선생의 "자치통감" 완역 작업에 경의를 표한다.

 

* 문제는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에 앞서 갖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지만 너무 비싸다는 것이 첫째 문제고, 둘째는 언제 32권에 이르는 이 책을 언제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그리고 셋째, 나는 송나라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사마천은 한 무제 사람이고, 사마광은 송나라 신종 때 사람이므로 남송과 북송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도 읽어볼 만한 책이 마땅치 않다. 흐얼....

 

블랙리스트 1
- 코미디언이자 라디오 시사토크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 중인 김미화 씨가 친정 같이 여기는 KBS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하는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 아니냐는 내용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러자 KBS는 김미화 씨에 대한 법적 조치를 운운하며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부인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총리실에서 민간인을 두 달여 동안 사찰하면서 그가 공무원인 줄 알았던 사회, 80년대 수많은 운동권을 양산했던 금서가 사실 목록조차 없이 주먹구구로 운영되었던 나라, 권력의 비선 라인이라 하는 '영포회'의 회원명부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문서만 없는 거 아니냔 거다. 즉석에서 "쟤는 안돼!", 한 마디가 더 쉬웠을 테니까.

 

KBS는 기자회견까지 자청하며 "블랙리스트 같은 건 없다"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문제는 기자회견이 끝나고 질문도 받지 않고 일어서며 김미화 씨가 알아서 잘 처신할 거라고 말했다는 거다. 어쩐지 천안함 합동조사단 발표 같이 들린다. "오빠 믿지?"하고 말이다. 물론 "오빠 밉다!"

 

블랙리스트 2
- 1947년 11월 24일과 25일에 걸쳐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열린 영화제작자협회 회의에서는 좌파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되던 10명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할리우드에서 영구히 추방하자는 ‘월도프 선언’이 채택되었다. 선언의 일부를 옮겨보면 “우리는 아무런 보상없이 우리가 고용하고 있는 그들을 해고 내지 정직시킬 것이며, 모욕죄에 대한 고소가 취하되거나 무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맹세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재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블랙리스트 3
- 최근 KBS의 블랙리스트 파문을 보면서 나는 문득 마르크스의 말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란 말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참 수도 없이, 정말 지겹게 반복된다. 희비극을 떠나서.

 

어른들의 충고
- 나는 '고운(고등학생운동권)' 출신이다. 가끔 고등학생 시위 뉴스를 보면 가슴이 짜안하다. 그때 어른들이 내게 가장 많이 한 충고는 그런 건 어른 되어서 해도 늦지 않단 거였다. 지금 내가 해줄 말은? 그 어른들이 하지 않아서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청소년의 '섹스'
- 아이들이 아이들끼리 하는 건 어찌보면 정상적인 성장과정이다. 물론 적당한 성교육과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지만 청소년들의 '섹스'에 있어 정말 큰 문제는 청소년들끼리의 섹스가 아니라 자꾸만 다큰 어른들이 자꾸만 아이들과 섹스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안하무인
- 한국사회가 얼마나 학연, 지연, 혈연에 연연하는지는 노태우 전 대통령 내외가 잘 보여준다. 추징금 280억은 돈이 없어 낼 수 없어도 전직 대통령의 영부인께서는 자신의 모교에 쾌히 5천만원을 기부한다. 그러나 이 사건이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건, 전직이든 현직이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 법이나 국민 앞에서 얼마나 안하무인하는 자들인가 하는 것이다.

 

자이니치
-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방법으로 한국대표나 일본귀화도 있지 않냐는 물음에 대해 "내게 있어 국가대표는 돈이 아니라 신념을 확인하는 무대다”라고 정대세는 답했다. 그 답변이 촌스럽게 들리는 시대이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어떤 서재의 풍경
- 나는 김종익 씨(총리실 민간인 사찰 피해자)가 평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책을 많이 읽고, 즐겨읽는 이에게 보내는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존경이다. 그러나 상대가 어떤 책을 읽든 그것이 민간인 사찰의 빌미가 될 수 없다는 건 독서량과 무관한 상식이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평범'한 사람도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어떤 책을 가지고 있고, 읽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평범과 비범은 독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구분된다. 총리실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 씨의 서재에 꽂힌 책들이 민간인 사업가가 읽을 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사람들의 지적에 대해 굳이 한 마디 하자면?

 

"그래서 당신들보고 쇠대가리 꼴 보수라고 부르는 거요."

 

고양이 살해 사건을 통해 본 대한민국
- "고양이 똥을 안 치우면 벌금 30만원,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이면 벌금 20만원" 이거 어느 나라 이야기 같아요? 정답은? 대~한~민~국!

 

하인리히의 법칙
- 1930년대 미국의 보험회사 감독관이었던 하인리히는 노동재해들을 조사해 중상자 1명이 나온 사고는 같은 원인으로 이전에 경상자 29명, 잠재적 상해자 300명이 있었다는 통계법칙을 만들었다. 이 법칙을 집권 3년째를 맞이한 MB정권으로 유추해보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뒤에 있을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두려워진다.

 

심각한 질문
- 누군가 인생을 잘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질문은 '다시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가 언제냐'고 묻는 것이다. 당신에게 '다시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언제인가?' 무엇을? 왜?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밑도 끝도 없이 묻는다.

 

기업문화
- '삼성'이 알아도 못 고치는 게 있다. '애플'은 팬덤(fandom)을 파는데, '삼성'은 계속 스펙(spec)을 팔고 있다는 거다. 그 점에선 '소니'도 마찬가지였다. 음질은 언제나 애플의 아이팟 보다 소니의 워크맨이 더 좋았으니까. 그래서 문화가 무서운 거다.

 

하드리아누스의 방벽
- 로마제정의 붕괴는 로마제국의 최대판도를 보여주는 상징물인 '하드리아누스의 방벽'부터란 말이 있다. 역사 속의 모든 제국은 외부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는 법이다.

 

기득권의 무서움
- 역사적으로 기득권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보여주는 사례는 백년전쟁 당시 영국의 평민을 기반으로 구성된 궁수대(장궁)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도 프랑스 귀족들이 결코 무거운 중장갑옷을 벗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권력 기반이 봉건기사제도에 있었기에 그들은 평민들을 무장시키고, 훈련하여 전쟁터에 내보낼 바에는 차라리 자신들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학살당하는 길을 선택했다.

 

가장 유명한 질문
- 1947년 11월 ‘의회반미활동위원회(HUAC)’가 연예산업에 대한 일련의 재조사에 착수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위원회에 불려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공산당인가? 아니면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있는가?”

 

교훈과 팩트
- 글쓰기에 있어 독자에게 교훈과 팩트 사이에서 어느 한 가지만을 줄 수밖에 없다면 나는 아무 고민없이 팩트를 고를 것이다. 만약 왜? 고민없이?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주 많이 고민한 다음에도 여전히 팩트를 고를 테니까요라고 답할 것이다. 

 

루저와 엘리트의 차이
- 지그문트 바우만은 노동의 미적가치가 소비자사회에서 계층을 구분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직업과 취미, 일과 놀이, 노동과 여가의 구분을 지우고 노동 자체를 오락으로 끌어올리는 다시 말해 일중독자들이 가장 성공한 엘리트들이란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새로운 빈곤"에서 제기하는 주장의 핵심 - '노동을 놀이화하는 엘리트들의 태도'는 다른 한 편으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부에게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휴식할 만한 여유를 사라고 충고하는 자본가의 충고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을 무(無)의 가장 큰 효용이 유(有)에 있다는 노자식 해석으로 접근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엘리트들의 한 부류는 바로 '루저(loser)'들이다. 물론 루저들은 반대의 의미에서 그렇게 살도록 강제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마피아의 지혜
- "가끔 바보들로 부터 배울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과 토론은 금물이다, 사랑 보다는 호기심으로 처녀성을 잃는 경우가 더 많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여자를 찾아 가라, 친구는 수 천명도 부족하다. 적은 한 명도 많다"란 명언을 남긴 사람은  '알 카포네'였다. 물론 말하긴 쉽다. 만약 알 카포네가 자신의 말대로 실천했다면 자신의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부잣집 혼사
- 한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점점더 근대유럽의 왕가를 닮아가고 있다. 네트워크 이론가들은 6단계만 거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연결된다고 하지만 한국의 정재계는 그들만의 네트워크로 단단한 피의 결속을 이룬다 이른바 혼맥으로 만들어진 '수구반동혈연복합체의 탄생!' MB의 사돈기업인 효성의 재벌3세들이 회사자금을 유용해 불법적으로 해외에서 부동산을 매입했지만 조중동은 굳게 입을 다문다. 과학전문저널 네이처에서 합조단의 천안함 조사 결과를 놓고 바보 같은 분석이라며, 조작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지만 재벌들이 장악한 언론들은 단단한 침묵의 연대를 유지한다.

 

초고층빌딩의 저주
- 성남시의 모라토리엄 선언을 바라보며, 문득 '세계최고층빌딩의 저주'란 말이 떠올랐다. 국가적 자부심이든 도시의 자존심이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세계최고층빌딩 건설 모뉴먼트 경쟁을 벌이는데, 이처럼 세계최고층빌딩을 짓고 나면 반드시 경제위기를 경험한다는 것이 '세계최고층빌딩의 저주'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거대건축물을 사랑한다. 이것은 '권불십년'에 대한 권력자들의 공포를 반영한다. 시대를 떠나 역사로 남은 건축물의 숨겨진 의미는 공개적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었던 자들의 '거대한 무덤(봉분)'이다. MB는 4대강을 파헤치는 것으로 강바닥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 어쩌면 그건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다.

 

위험한 논리
- 역사학자 박지향이 <조선일보>에 쓴 칼럼 "진보 교육감, 아이들 대신 세상 살아줄 건가"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1970~80년대 한국문학에서 명작이 쏟아진 이유가 결과적으로 군사독재 덕분이었다는 말과 같다. 이런 논리의 연장에 있는 것이 박정희가 개발독재한 덕분에 경제개발됐다는 것이고, 이런 논리는 필연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독재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그와 같은 논리적 확장의 재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개발이 이루어졌으니 '친일파 만세', 이들을 척결하지 않고 재기용한 '이승만 만세'란 말이 된다.

 

으름장
- 1년 전 정부는 비정규직보호법이 실시되면 해고대란이 빚어질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보호법 실시 1년이 흐른 현재 10명 중 8명은 고용상태라 한다. 기업이 사회복지를 위해 이들을 고용하고 있을까? 이 법안의 처리과정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비정규직이 단지 우리 사회가 만든 식민지이자 게토일 뿐이라는 증거다.

 

목숨을 건 선택
- 임신한 뒤 유방암 발병 사실을 알게 된 한 여성 변호사가 태중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아기를 출산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기가 태어난지 10주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런 선택 앞에서는 그 어떤 가치판단이나 이성적 평결 보다도 먼저 마음이 알아서 묵직해지고 숙연해진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식 작명법
-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은 사물의 이름을 지을 때 그와 밀접한 특성, 품성을 연관져 짓는데, 예를 들어 인디언들에게 4월은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이다. 이것을 안상수 신임 당대표의 병역기피의혹에 빗대보면 어떤 이름이 나올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자!

 

세계화의 낙수효과(Trickle Down)
- 신자유주의자들은 일단 감세 정책 등으로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그 과정을 통해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가계에까지 미치게 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낙수효과'가 중소기업이나 가계에까지 미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다소 필요하니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의 지배구조'상 상부구조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배부를 때까지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란 결국 일국 차원의 낙수효과를 세계적 차원으로 변환하는 것인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하되, 노동의 이동은 통제하는 시스템이지만 예외적으로 여성의 '결혼을 통한 이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인 까닭도 어찌보면 이 같은 낙수효과의 결과일지 모른다. 세계화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허용하되, 상대적으로 노동의 이동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우엔 '국제결혼'의 형식을 빌려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그러나 이것을 '결혼=사랑'의 개념이 아니라 '결혼 = 개호노동, 가내노동'의 개념으로 파악해보면, 국제결혼이란 한 측면에서 자국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여성 노동을 해외의 개도국이나 후진국 여성을 수입하는 형태의 다른 말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구매력이 높은 국가의 남성(혹은 가정)이 마치 도시와 농촌의 성비처럼 더 많은 여성(의 노동)을 소비한 결과, 구매력이 낮은 지역에서는 자신들보다 못한 지역(국가)의 여성(노동력)들을 수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베트남 출신의 한 여성이 한국으로 시집온지 일주일만에 남편에게 맞아죽는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물론 한 남성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여성(의 노동)이 '매매혼의 형태'로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폐해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사건이야말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들이 주장하는 '낙수효과를 통한 부의 재분배' 효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증거이다.

 


모토


- 박정희 정부의 모토를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하면 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죽이면 된다', 노태우는 '속이면 된다'쯤으로 정리가능할 것 같은데, 김영삼은 '밀어부치면 된다', 김대중은 '퍼주면 된다', 노무현은 '시장에 맡기면 된다'쯤 될까? 이명박 정부에 대해선 뭐라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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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쌈마이'란 말은 본래 영화판 용어이다. 우리 문화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본어 중 하나인데 일본 가부키에 나오는 삼류배우, 시시한 역할이나 하는 배우란 뜻, '삼마이메(三枚目, さんまいめ)'에서 온 말이다.  

나는 비난이나 비판보다 칭찬이 더 무섭다. 내가 칭찬을 고대하는 사람이기에 더욱더 칭찬을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나는 나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일을 두려워한다."守株待兎(수주대토)"란 말이 있다.  


송(宋)나라 사람 중에 밭을 가는 사람이 있었다.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풀숲에서 갑자기 한 마리의 토끼가 뛰어나오다가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다. 농부가 이것을 보고 그 후부터 일도 하지 않으며 매일같이 그루터기 옆에 앉아서 토끼가 뛰어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토끼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 사이에 밭은 황폐해져서 쑥대밭이 되고 말았고, 농부는 온 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비자(韓非子)'가 유가를 비판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는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칭찬 그 자체도 아니고, 이익 그 자체도 아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기대하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이다. 누군가에게 우연히 혹은 기꺼운 마음으로 도움을 받거나 칭찬을 들었을 때, 그 이후로 또 그런 말이 듣고 싶어서 남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나는 두렵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 싶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할까봐 두렵다. 나는 나를 알기에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예쁜 것이 두렵고, 착한 것이 두렵고, 돈이 두렵고, 이익이 두렵고, 명예가 두렵고, 명성이 두렵고, 그걸 고대하고, 기대하는 내가 두렵다. 가끔 나를 두고 아깝다 말하는 분들이 있다. 그만하면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무엇인가를 누릴 수도 있다며 아깝다 말한다. 나는 내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지금 내가 누리고 사는 것조차 처음엔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는 동안의 나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던 사람이며 그런 내가 편집자로 살게 될 줄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도,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던 사람이었고, 나 자신이 나를 열패자로 여겼다.  


얼마전 대학생들 앞에서 나는 '깡패'가 되었으면 딱 어울렸을 사람이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속담이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는 거다. 내가 차를 굴리고, 내가 글을 쓰고, 내가 원고청탁을 받으며, 내가 남의 글을 읽고 고쳐주고 그걸 다시 한 계절에 한 번씩 책으로 만든다. 나에게 이것이 모두 기적 같은 일이다. 나는 내가 천상 '천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대학교 앞을 지나갈 때면 공연히 기가 죽는다. 영어 원서를 옆에 끼고 가는 대학생들을 보면 괜히 시비를 걸고 싶어진다.  


가끔, 어떤 이에게 '선생' 소리를 들으면 나는 그것이 두려워 귀를 씻고 싶어진다. 나는 '지식인'이 아니며, 다만 '지식을 다루는 노동자'이고,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읽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전업 글쟁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는 직업이 편집자고, 부업으로 글을 쓸 뿐이다. 나는 돈이 좋아서 돈이 무섭고, 편리가 좋아서 편리가 무섭다. 내가 그것들에 길들여지고,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원하게 될까 그것이 두렵다. 기대하게 될까 두렵다. 아니, 꼭 필요한 것인데 필요한 만큼 갖지 못할까 두렵고, 그 이상 갖게 될까 두렵다.  


때로 나는 참 거친 사람이란 걸 확인하기 위해 매우 거친 말들을 사용한다. 투박한 말을 던져놓고는 한 편으론 후회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안도한다. 촌스러운 거다. 그런데 나는 그게 좋다. 내가 본래 '천것'이며, 앞으로도 내 분수 이상 큰 욕심 부리지 않을 수 있기를 ... 나는 그저 내 삶의 주인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살아온대로 막 그렇게 ... 큰 실수 없이 살기를, 혹여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남들이 눈치 못채게 조용히 지나갈 수 있기를 ... 주목받지 않기를, 놀림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거나,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일을 시작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곳에 처음 가게 되는 일은 두렵지 않으나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까봐 그것이 가장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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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건 조금 덜 좋아하는 다른 것으로
아니면 그것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다른 것과 대체될 수 있지만

사랑은 대체불능이다. 

그래서... 
사랑이 아픈 거다.

전부를 포용하던지 아니면 버리던지..
그런데 이때의 '버림'은  사실 포기()가 아니라 포기(抛己)다.  

그래서... 
사랑이 아픈 거다. 

버린 사람도, 버림 받은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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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TAG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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