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값 인상은 금연을 위한 효과적 수단인가, 증세를 위한 손쉬운 수단인가?
- 흡연세 그 다음은 비만세?






몇 해 전 흡연권도 보장하라는 헌법소원이 있었지만 흡연자들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는 있을지 몰라도, 타인까지 파괴할 권리는 없다는 민주주의의 당연한 원리에 따르면 한낱 부질없는 소리이다. 제 아무리 담배를 예찬하는 사람도 새로 담배를 배우려는 사람, 제 자식에게는 담배를 권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담배가 사회적 해악이란 건 충분히 증명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이유에서 지난 2004년 8월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판결을 통해 공중시설 내 흡연을 제한하도록 한 <국민건강증진법시행규칙>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전 세계 담배회사들이 생산하는 담배는 연간 5조 5천억 개비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비흡연자는 물론 청소년, 임산부, 신생아 등 지구상 모든 이들에게 1년에 각 1천 개비(50갑)씩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이 엄청난 양의 담배를 11억 명의 흡연자들이 전부 태워 없앤다. 담배연기가 흡연자와 비흡연자 모두에게 고루 해롭다는 점에서 흡연자들은 결코 외로운 사회적 소수자가 아니다. 의학적, 논리적 그리고 윤리적으로 담배가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너무나 자연스러운(혹은 당연한) 동의와 합의이기 때문이다. 흡연자들 누구도 담배가 마음에 약간의 위로가 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마저도 흡연자에 대한 혐오와 담뱃값 인상이 흡연자들의 정신건강마저 위협하는 상황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상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끊기 힘든 중독 상품이다. 『Catch Up 2012 대한민국 소비자 생각읽기』는 200만 소비자 패널을 상대로 조사한 지난 10년 간 소비자 생각의 변화, 그리고 생활 영역별로 주목할 만한 2011년의 소비자 흐름을 소개하고 있는 책인데, 이 책은 지난 2011년 한 해 동안 소비자(이자 시민)들이 느낀 감정의 키워드는 ‘피곤하다’였다고 소개하면서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를 수록하고 있다. 전국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일반인 성인 남녀 1,000명(2011.06.28)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89.4%는 건강이 나빠졌다고 느껴지면 금연을 결심할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또한 출산, 육아, 결혼 등 개인 신상에 변화가 일어나면 금연하겠다는 응답(79.3%)도 매우 높게 나타나, 금연 의지는 정부 정책 및 외부 규제 등의 외적 요인보다 건강이나 자신의 삶과 관련한 내적 동기가 크게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53.9%는 담배 가격이 인상될 때 금연을 결심할 것이라고 응답하였는데 담배 가격 인상이 금연을 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와 세계은행에서는 가격정책이야말로 금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라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담배 가격이 10% 올라가면, 저소득 국가에서는 8%, 고소득 국가에서는 4%가 담배를 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과연 담배 가격을 올리면 사람들은 끊게 될까? 우리 정부는 흡연이 주는 사회적 폐해를 줄이기 위한 금연 정책의 일환으로 지난 2005년부터 담배 가격을 올리기 시작해서 상당한 금연효과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담배 가격을 올리는 것은 일시 방편일 뿐이다. 주당이자 애연가였던 시인 김소월은 부잣집 아들답게 좋은 옷을 입고 다니라고 해도 늘 허름한 바지저고리 차림이었지만 담배만큼은 언제나 최고급을 고집했다고 하는데, 과연 담배는 생필품일까, 사치품일까?

지난 추석 연휴 때 어떤 음식점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담배 가격을 올리는 것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자, 그때의 대화를 내가 재연해보마.
"요새 담뱃값이 너무 비싸단 말이야."
"그러게. 무슨 담배 한 갑이 3천 원 가까이나 해?"
"그래도요. 담뱃값이 올라서 담배 끊겠다는 건 다 한순간이에요. 조금 지나면 그러려니 하고 그냥 사잖아요."
"그건 그래. 조금만 지나면 그 가격이 그 가격 같아. 컵라면도 그랬잖아. 몇 년 전만 하더라도 350원밖에 안 했다고. 그런데 지금 봐봐. 850원이야. 처음에는 너무 올랐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샀는데,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하잖아."
처음에 담뱃값이 오르면 일시적으로 담배의 수요량이 줄어들 수도 있어. 이때는 일시적으로 탄력성이 커지겠지. 하지만 담배라는 기호품에는 대체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애연가들은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담배를 사서 피울 수밖에 없을 게다. 이 경우에는 다시 수요량이 회복되면서 탄력성이 낮아진다고 할 수 있겠지.

『워밍업 경제학(Das Geld Reicht Nie)』의 저자 정인회와 비난트 폰 페터스도르프는 담배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살펴보았을 때 담배는 생필품에 가깝다고 결론 내린다. 담뱃값은 2000년 초 1,300원이었지만, 2002년 200원, 2004년 500원, 2005년 500원이 올라, 현재 2,500원이 됐다. 담배 가격이 오를 때마다 논란이 있었지만, 국민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관철되었다. 지금까지 가격 인상에 따른 수요 변화는 조사 기관에 따라 차이가 커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담배 업계에서는 담배 가격 인상에 따른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0.25~0.5 정도로 보고 있고 이 정도의 탄력성이라면 담배는 생필품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담뱃값 인상으로 흡연율은 조금밖에 낮아지지 않으며, 담배 제조업체(한국의 경우엔 KT&G)의 수익은 오히려 증가하게 된다는 비판이 있다. 조세연구원은 “가격이 흡연율에 영향을 주긴 하지만 담배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고려할 때, 가격이 오른다고 무조건 흡연율이 하락한다고 할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가격이 크게 올라도 결국엔 또 팔리는 상품이 바로 ‘담배’이다.

월급쟁이들은 월급을 받을 때마다 근로소득세를 자동적으로 국가에 납부한다. 그래서 샐러리맨들은 월급봉투를 ‘유리지갑’이라고 부른다. 박근혜 정부는 증세 없는 복지 재원 확충 방안 중 하나로 ‘누락·탈루 세금 징수강화’를 들었지만 실제로 역대 정부 대부분은 세금 누락·탈루 등 지하경제를 추적해 세금을 거둬들이기보다는 이처럼 걷기 쉬운 세금에 주력해 왔다. 그런 까닭에 현재 우리 정부가 거둬들이고 있는 세금의 거의 절반이 간접세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만 하더라도 간접세 비율이 20% 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간접세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간접세 규모를 줄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간접세가 바로 유류세인데, 휘발유 가격의 66%는 정부가 매기는 특별소비세다. 자가용 소유가 일반화된 현실에서 소비자들은 유류세가 너무 높다는 불평을 쉴 새 없이 쏟아내지만 정부는 모든 책임을 정유 업계에만 떠넘기고 있다. 하지만 정유 업계는 유류세 인하를 도리어 환영하고 있는데, 어차피 휘발유 값의 3분의 2가 국고로 들어가는데 고유가로 정유업계만 재미 본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휘발유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간접세 상품이 바로 술·담배이다. 술 한 병, 담배 한 갑에 붙는 세금은 얼마나 될까? 2011년 1월말 기준 하이트 병맥주 500ml짜리 원가는 478.58원인데, 여기에 주세 등이 붙어 공장 출고가는 1019.17원에 이른다. 출고가의 53%가 세금인 셈이다. 담배의 경우 세금 비중은 더 커 62%에 이른다. KT&G 담배인 ‘원’ 2,500원짜리에 붙는 세금은 담배소비세 641원, 국민건강증진기금 354원, 지방교육세 321원, 부가가치세 227원, 폐기물부담금 7원 등 1550원이다. 술이나 담배 등 국민건강이나 복지 차원에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품목에 매기는 징벌적 성격의 세금을 이른바 ‘죄악세’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주세·담배세·도박세가 있다. 근본적으로는 간접세인 죄악세는 조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저소득층에 집중돼 있어 부의 재분배 효과에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지만 손쉬운 재정 확충 수단이라는 이유에서 재정확충이 절실한 나라일수록 간접세수를 늘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간접세이기 때문에 조세 저항도 약하고, ‘국민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도 분명할뿐더러 조세 확충 효과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음주와 흡연에 따른 연간 사회적 비용이 24조원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는데, 비록 본인은 술과 담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보험료와 부담금 따위의 형태로 일정 부분을 부담하게 되어 있다. 정부와 기업은 이런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한다는 명분으로 술과 담배의 소비를 강제로라도 줄여야 하고, 이를 위해 술·담배에 대한 세금을 올릴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문제는 간접세가 개인의 소득에 상관없이 누구나 똑같은 세금을 내도록 하는 징세제도란 점이다. 부자가 마시는 술 한 병이나 거리 노숙자가 마시는 술 한 병이나, 부자가 굴리는 자가용이나 서민이 굴리는 자가용에도 세금은 똑같이 붙는다. 간접세가 소득불균형을 강화하는 것이다. 담배세 인상을 통한 금연 정책의 강화라는 정책이 결과적으로 서민의 지갑에서 돈을 빼내 국민복지에 이용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뜻이다. 새로 출범한 박근혜 정부가 전임 정부의 부자 혜택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듣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문제는 담배세 인상이 증세의 마지막이 아닐 거라는 예상 때문이다. 올해(2013년) 3월 4일, KBS·MBC·연합뉴스 등의 보도에 따르면 “한 해 흡연·음주·비만 때문에 지출되는 진료비가 6조7천억 원으로 전체 건강보험 진료비의 14%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4년 간 관련 진료비가 40% 이상 급증한 만큼, 정부는 담뱃값 인상뿐 아니라 유해식품에 대한 비만세 등을 통해 건강위험요인을 적극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은 3일 <건강위험요인으로 인한 건강보험 진료비 지출 분석> 보고서에서 2001~2002년 일반건강검진을 받은 769만3천999명의 검진·진료기록을 2011년까지 추적·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확인했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면 병원에서 흔히 듣게 되는 대표적 건강위험요소인 흡연·음주·과체중으로 인한 진료비 지출이 지난 4년 동안 4조6천540억 원에서 6조6천888억 원으로 43.7% 늘었으므로 부족한 건강보험 재정확충 등을 위해 앞으로 담배세 인상은 물론 비만세 등 새로운 간접세 항목을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보도 내용에 따르면 “이번 연구를 통해 흡연·음주·비만 때문에 진료비 지출과 사회·경제적 폐해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며 “따라서 담배부담금 세율을 높이고 해외 비만세 사례 등을 참고해 주류와 비만유발 식품에도 건강증진부담금 등을 부과하는 정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은 흡연자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내일은 비만한 사람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비만세’라는 새로운 죄악세가 신설될 것이란 뜻이다. 바야흐로 간접세 폭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국가와 기업, 그리고 개인까지 경쟁력을 제일의 덕목으로 주장하고 나서는 상황에서 흡연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자본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람들을 무한경쟁의 긴장과 공포로 내몰고 있다. 오늘날 개별 기업까지 나서 금연을 강제하는 것은 과연 자본이 개인의 건강까지 염려하는 의학적 배려일까. 그보다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자들의 잠시 게으를 권리까지 빼앗는 음모는 아닐까. 담배의 해악이 알려지면서 흡연자들은 고립되었고, 타인의 건강과 권리를 침해하고 위협하는 못된 중독자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담배 중독의 거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국가와 정부는 시민이자 납세자들을 흡연자와 혐연자라는 프레임에 가둬놓고, 정작 책임의 한 당사자인 자신들은 담뱃값 아니 담배세 인상을 금연운동의 중요 정책으로 제시하며 뒤로 빠진다.

담배가 처음 유럽에 전파될 무렵 의사들은 담배를 매독 치료제, 신비의 명약으로 오인하기도 했지만, 담배회사들은 담배의 치명적인 중독성과 해악에 대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600여 가지 화학약품이 짬뽕된 담배의 중독성은 알콜, 코카인, 히로뽕보다도 강하다고 하는데,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들은 가격이 올라도 계속 담배를 사게 되어 있다. 문제는 흡연자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역시 국가에 의한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국가는 때로는 담배를 폭력적인 수단으로 전매해왔고, 때로는 군대 같이 억압적인 집단이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권장해온 중독 사업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이제 와서 모든 책임을 흡연자 개인에게 전가시킨다.

흡연자들이 다만 가해자로 인식될 뿐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사실은 무시당하는 동안에도 KT&G는 세계 5위의 담배기업으로 성장했다. KT&G의 지난해(2012년) 국내 담배 매출은 전년대비 5.8% 증가한 1조8956억 원을 기록했고, 국내 담배시장점유율도 2011년 59%에서 2012년 62%로 3%포인트 상승했다. 중국,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 해외로 수출된 담배 매출은 신규시장 판매 증가 및 수출단가 상승으로 전년대비 5.1% 증가한 6282억 원을 기록하는 등 상승세다. KT&G는 지난 2011년 ‘꽃을 든 남자’ 브랜드로 화장품 시장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소망화장품 지분을 인수하는 등 사업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흡연자들을 가해자로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론 고수익을 벌어들일 뿐 아니라 자국 국민들에겐 건강을 위해 금연하라고 담배세를 인상하네, 새로 법을 만드네, 호들갑을 떨면서도 국산담배의 해외 수출은 장려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육성한다는 차원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 적용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09년 미 연방대법원이 담배회사 필립모리스에 7950만 달러(약 844억 원)의 징벌적 배상을 선고한 사건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된다면 국가야말로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금연정책은 OECD 25개국 중 24위라고 하는데 우리 정부는 담배세 인상을 통한 금연정책을 통한 세수 증대에만 몰입할 뿐 비가격적 금연정책인 광고 규제와 공공장소의 흡연 규제, 청소년 등 신규 흡연자 유입을 차단할 수 있는 금연교육 등은 거의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실제로 흡연율을 낮춘다며 담배세를 500원 인상했을 때조차 그 세수 중 단지 3%만 금연운동에 쓰였다. 이것이 바로 만국의 흡연중독자들이 금연운동가들과 단결해야 하는 이유다. 위대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간접세에 대해 “국왕의 수입에 비해 백성의 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징세 방법에 찬성할지도 모른다”고 평했다.


* <인물과 사상> 2013년 4월호에 "‘국가’라는 마약공급책이 펼치는 금연정책의 딜레마"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전번에 그렇게 자랑질했던 하루 24시간도 안 되어 100매 이상 글쓰기 신공을 보여준 그 원고인데, 책 나오자마자 전문 게재하는 건 청탁필자로서의 상도의에 저촉된다고 생각하여 전체 기승전결 4개의 단락 중 '결론' 부분만 인용한다. 각주도 많이 있는데 일일이 살려넣는 방법도 모르고 하여 편의상 여기엔 빠졌으니 오해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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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바다로 흘러든 '후쿠시마 재앙', 당신은 피해자 아닌 공범!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후쿠시마 인근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는 1, 2, 3호기 연료봉이 노심에 삽입되어 있었는데, 지진으로 인해 발전은 중지되었다. 대략 45분쯤 후 쓰나미가 핵발전소를 덮쳤고,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포함한 모든 외부전력이 끊어졌다. 지진 발생 5시간 만인 오후 7시 반 1호기의 연료봉 손상이 시작되었고, 오후 9시부터 원자로 내부 온도는 연료봉이 녹는 온도인 2800도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6시 연료봉이 녹아내려 원자로 압력용기에 고였고, 결국 압력 용기에 구멍이 뚫리면서 방사능이 외부에 유출되기 시작했다. 지진 발생 16시간만의 노심용융(meltdown)으로 후쿠시마는 1986년의 체르노빌처럼 유령도시가 되었다.

▲ 2011년 원전 폭발과 쓰나미, 대지진이라는 참사를 맞이한 일본 후쿠시마 인근 지역이 폐허가 되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후 쿠시마 핵발전소 붕괴 직후 최고의 안전성(?)을 자랑하던 일본 원전의 신화는 원자로와 함께 녹아내렸다. 붕괴된 것은 원자로와 안전 신화뿐만이 아니었다. 후쿠시마 원자로 3호기 냉각장치가 손상된 직후 격납용기 내부의 방사능 검출량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지점 400미터 반경 피폭량을 초과하는 수준이었지만 후쿠시마 원전을 책임지고 있던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는 방사능이 유출된 지 3주가 지나서야 "원전 방사선량에 1시간 정도 노출되면 히로시마 원폭 투하지점 400미터 반경과 비슷한 규모의 피폭에 해당"한다고 시인했다.

또 일본 정부는 방사성 물질이 기준치 1억3000만 배에 이르는 물을 원전에서 바다로 흘려보내면서도 이런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후쿠시마 근해에서 허용치의 수천 배가 넘는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되고, 원전 남쪽 90킬로미터 떨어진 이바라키 현 앞바다에서 잡힌 까나리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요오드와 세슘이 검출되었지만 이 사실을 알린 건 정부가 아니라 해외 언론들이었다.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측은 사태의 심각성이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해 지역 주민들을 방치해 두었고, 심지어 피난민들에게 물자가 부족한 상황조차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이것은 비단 일본 정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라는 북한조차 방송 매체를 이용해 주민들에게 방사능 대처 요령을 적극 홍보하고 있었는데도 우리 정부는 편서풍 때문에 한반도는 방사능에 대해 안전하다며 국민들을 향해 앵무새처럼 '극미량', '기준치 이하'란 말만 반복했다. 일본의 원전 사고가 한국에서 탈핵 운동의 시발점이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재임 기간 중 가장 큰 치적으로 2009년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출을 손꼽았던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해외 원전 시장에서 우리의 경쟁자였던 일본이 망했다. 이제 누가 일본 원전을 사겠나? 이 기회에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팔자'며 지금이야말로 한국의 원자력 르네상스가 열렸다고 큰 소리쳤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년여가 되어 가는 현재 한국에서는 노후화된 원전들이 잇따라 사고를 내고 불량 부품을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이런 사실들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도리어 그 와중에 핵발전소가 2기 더 늘어나 이제 23기의 핵발전소를 보유하게 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직후 미국에게 핵 재처리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조차 향후 50년이면 핵발전소가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전히 '원자력 르네상스'를 외치고 있다.

일 본은 어떠한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핵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으며 장차 핵무장까지 노리는 극우 보수주의 정치 세력이 득세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피해 주민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지만 이제 후쿠시마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우경화의 바람만 거세게 불고 있다. 사고 직후 멈춰 섰던 핵발전소는 전력위기를 핑계 삼아 다시 2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에 있고, 나머지 핵발전소 또한 재가동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후쿠시마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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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시마 이후의 삶 :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한홍구·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이령경 책임 번역, 반비 펴냄). ⓒ반비
< 후쿠시마 이후의 삶 :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이령경 책임 번역, 반비 펴냄)는 한국과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양심적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한홍구(성공회대학교 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학 대학원 교수),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 서 있는 서경식(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이 만나 지난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장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이 후쿠시마 사태를 단순히 에너지 정책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민주주의의 문제로 바라보고 그 뿌리에 놓여있는 '희생의 시스템'까지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후쿠시마 사태를 다룬 기존의 저서들과 변별력을 지닌다.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받아든 순간, 직감적으로 떠오른 인물은 파울 첼란(Paul Celan)이었다. 아도르노(T.W.Adorno)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지만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살아남은 파울 첼란은 계속해서 시를 썼다. 파울 첼란은 소련과 루마니아 접경지역에서 태어나 평생 독일어를 모국어로 시를 썼다. 그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극심한 우울증과 죄의식에 시달리다 결국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파울 첼란의 대표작인 '죽음의 푸가'의 원제는 '죽음의 탱고'였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일시적으로 사형 집행을 유예 받은 악사들은 사람들이 총살당하거나 가스실로 향하는 동안 경쾌한 탱고를 연주해야만 했다. 파울 첼란은 '죽음의 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 <죽음의 푸가>(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 중에서


영 국의 생명윤리학자인 조나단 글로버(Jonathan Glover)의 <휴머니티 :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김선욱·이양수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 따르면 나치 독일의 선전상이었던 괴벨스는 "웃음이 의미하는 건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훌륭한 양심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때 신성시했던 것들, 가령 전통, 양육, 우정, 인간의 사랑 같은 것들을 웃음으로 부수고 파괴하는 충분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치의 사형 집행자들은 괴벨스의 주장을 충실하게 따랐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같은 인간이 아닌 물질 혹은 짐승으로 간주하였고, 양심의 가책을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서늘한 농담과 신성모독의 언어' - 예를 들어 아우슈비츠와 함께 악명 높았던 유대인수용소 트레블링카(Treblinka)에서는 가스실에 이르는 길을 '천국에 이르는 길(Himmelweg)'이라고 불렀다 - 를 사용했다. 나치는 죽은 시신조차 존중하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시신에서 얻은 기름은 비누가 되었고, 여성 희생자의 머리카락은 매트리스 충전재로 팔렸다. 화장터에 남겨진 재들은 보온 단열재나 인근 마을의 도로 포장을 위한 자갈 대신 사용되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학살, 인종말살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홀로코스트 이후 모든 인류가 직면한 물음이었다.

이토록 참혹한 학살을 경험한 인류는 1948년 12월 9일 국제연합에서 제노사이드 협약을 제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와 수많은 학살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인류에게 이런 비극이 두 번 다시 재현되어선 안 된다는 굳은 결심, '더 이상은 안 된다(Never Again)'는 선언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파울 첼란은 시를 썼던 것처럼, 제노사이드 협약이 논의되던 시기 제주도에서는 이른바 '4·3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한홍구, 서경식, 다카하시 데쓰야는 <후쿠시마 이후의 삶>을 통해 히로시마에서 후쿠시마, 오키나와에서 제주에 이르는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더듬으며 비탄의 희생자들을 켜켜이 쌓아올린 가해자들이 어떻게 희생자들을 비인간화였는지, 현재 한국과 일본이 누리는 풍요가 무엇을 그 원천으로 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후쿠시마 이후의 삶>은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히로시마를 겪은 일본에서 왜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은 단순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진앙이었던 일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 발전 시설이 밀집해 있는 동아시아는 물론 여전히 핵을 포기하지 못한 모든 나라에 해당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히로시마를 겪은 일본에서 왜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나?

한 국수력원자력, 세계원자력협회, 한국원자력산업회의의 2011년 3월 보고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는 모두 21기의 핵발전소가 운영 중에 있고, 7기가 건설 중, 4기가 앞으로 건설될 계획이다. 일본은 모두 54기가 운영 중에 있으며 3기가 건설 중, 12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었다. 중국은 현재 13기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재 건설 중인 핵발전소가 27기이고 앞으로 188기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다. (2013년 3월 현재 한국은 23기, 일본은 50기, 중국은 18기의 핵발전소를 가동 중이다. -편집자)

한· 중·일 3개국이 운영 중인 핵발전소는 전 세계 20퍼센트이지만, 현재 건설 중인 핵발전소까지 포함하면 전 세계 핵발전소의 52퍼센트가 이 지역에 밀집해 있는 셈이다. 세계 각국은 체르노빌 사태 이후 핵발전소 건설을 중지하거나 자제하는 추세에 있지만 한국·일본·중국은 '죽어가는 핵 산업'을 살리는 주요 동력이 되고 있다. 어째서 이토록 많은 핵발전소가 이 지역에 밀집해 있는 것일까? 책을 읽는 내내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강력한 핵 발전 국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지식인이 이 좌담에 포함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일본 후쿠시마가 아니라 황해 연안에 집중 건설되고 있는 중국의 핵발전소에서 마찬가지의 사고가 발생한다면 한반도는 불과 3일 만에 편서풍을 타고 불어온 낙진과 방사능의 대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 본은 세계에서 유일한 피폭 국가임을 강조해 왔잖아요. 그 때문에 평화 헌법을 갖고 있고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핵무기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를 지금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는 나라로서 강력한 반핵 정서가 있을 것 같은데, 거꾸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전을 보유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죠. (한홍구, 36~37쪽)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6일), 나가사키(9일)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피폭 직후의 조사에 따르면, 히로시마에서는 인구 33만 명 중 7만 8000명이 사망하고 부상 3만 7000명, 행방불명 1만 4000명, 기타 피해자 17만 7000명, 건물 7만 호가 반 이상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고, 나가사키에서는 인구 27만 명 중 사망 2만 4000명, 부상 4만 1000명, 행방불명 2000명, 기타 피해자 17만 7000명이 나왔으며 도시 전체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그중에는 한국인 수만 명을 비롯하여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찍이 권혁태(성공회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가 '피폭 내셔널리즘'이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국이자 원폭 피해국이었던 일본은 가해와 침략의 기억은 생략한 채 자국이 유일한 원폭 피폭국이라는 단일한 인식을 기반으로 전쟁에 대한 기억을 국가주의로 수렴해왔다. 그러나 당시 피폭자들 가운데에는 무려 7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있었고, 이들 가운데 4만 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피폭자와 그 2세, 3세들은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로 아무런 국가적 보상이나 대책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유일한 피폭국' 신화 같은 일련의 과정들이 야스쿠니 문제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해왔다. 그는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전사자가 신적 존재로 떠받들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슬픔보다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침략성이나 가해성을 묵살하게 되는 것을 '감정의 연금술'이라고 호칭했다. '감정의 연금술'은 야스쿠니와 천황제에 이르러 일본이 스스로를 '평화국가'라고 규정하는 문제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

전후에 일본 국민들은 스스로 일본이 평화 국가라고 계속해서 믿어왔습니다. 일본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인데, 여기에는 일본 국민들의 감정에 일종의 '연금술'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합니다. 현실적으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으면서 일본은 핵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만 유지됩니다. (서경식, 41쪽)

1953 년 8월,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같은 해 12월 국제연합 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란 성명을 발표하며 미국의 냉전 체제에 속한 각국에 본격적인 핵 발전 세일즈를 시작한다. 핵의 군사적 이용과 평화이용을 둘러싼 핵 경쟁 체제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소련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그때까지 원자력 정보에 대한 철저한 비밀주의를 벗어던지고 전면적인 정보 공개에 나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숨겨진 내막이었다. 핵발전소는 이처럼 핵 경쟁이라는 동서냉전의 연장선에서 탄생한 핵폭탄의 일란성 쌍둥이였다.

원 전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극구 부인하지만, 사실 원전은 원자폭탄의 다른 얼굴일 수 있어요. 이 둘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핵 발전과 핵폭탄 모두 핵분열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핵 발전은 핵분열의 속도를 늦췄을 뿐이지요. 둘은 같은 기술, 같은 원리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 핵발전소에서 사용한 핵연료는 핵무기의 원료로 사용되지요. 그래서 원자폭탄을 갖고 싶은 열망이 원전을 자꾸 짓게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이 전 세계에 포진해 있는 원자력 마피아들이 원전에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한홍구, 42쪽)

일본은 미국의 세계 전략에 편승하며 핵 발전을 도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때마침 1954년 3월 1일 미국이 태평양의 작은 섬 비키니에서 실시한 수소폭탄 실험 당시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참치잡이 어선 '제5후쿠류마루'가 피폭되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사회는 이 사건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이은 세 번째 피폭 사건으로 받아들여 반핵 여론이 들끓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일본의 수상이 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를 비롯한 일본 내 보수 세력은 바로 다음날인 3월 2일 핵발전소 건설을 위한 예산을 승인한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이것이 단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핵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는 모든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버리고, 무시하는 시스템'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 는 이러한 것들을 포괄해서 원전 시스템을 '희생의 시스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타인의 생활이나 생명, 존엄 등을 희생한 위에서만 이익을 내고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그 이익을 취하고 유지하는 자들은 결국 국가권력이나 자본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내버리고, 국민 이외의 존재를 무시하는 문제점은 각 나라의 원전 추진 세력들이 공유하는 특성입니다. 나아가 원전뿐만 아니라 핵무기 문제를 포함해 핵을 둘러싼 정치, 경제, 군사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아닌가 합니다. (다카하시 데쓰야, 77쪽)

▲ 2011년 4월 8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방사성 물질 오염수 방류 사건 규탄 기자회견. ⓒ프레시안(최형락)

홀로코스트와 원전을 작동시키는 힘, 희생의 시스템

20 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하이데거는 나치즘에 굴복했다는 치명적인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록 하이데거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치즘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평소 생각한 독일 민족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치즘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나치에 동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마르틴 하이데거는 과거사에 대해 어떠한 참회도, 변명도 하지 않았고, 그의 '완강한 침묵'은 더욱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파울 첼란과 하이데거는 서로의 저작을 읽었다. 첼란은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한 편 그와 나치즘의 관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1967년 첼란은 하이데거가 있던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시 낭독을 했고, 그 자리에 하이데거도 참석했다. 낭독이 끝난 자리에서 하이데거는 첼란에게 자신의 책 한 권을 주었고, 다음날 그를 자신의 토트나우베르크 산장 연구실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함께 술을 마셨지만 파울 첼란은 나치즘에 대한 하이데거의 침묵을 잊지 못했다. 그는 방명록에 "오두막 산장에서 함께 별을 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기대하며. 1967년 7월 25일 파울 첼란"이라고 서명했다. 그리고 파울 첼란은 1970년 4월 20일 자살했다. 어쩌면 파울 첼란에게서 생의 마지막 불씨를 앗아간 것은 그날 하이데거의 '완강한 침묵'이 아니었을까.

한 홍구는 후쿠시마와 용산 참사를 연결시키며 두 사건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논리와 시스템에서 나온 사건이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완강한 '자본의 논리'와 '희생의 시스템'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에 사로잡혀 저항을 포기한다면, 위기의 순간마다 국민을 속이고, 버렸던 국가에 또다시 포섭되는 결과만을 빚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서경식은 가해자로서 양심을 저버린 일본은 자신들이 가했던 침략으로 인한 희생자의 고통에 대해 침묵하며 전후 복구와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국민들이 안락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이 '안락 전체주의'가 되어 오늘날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다카하시 데쓰야는 일본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이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핵 발전은 '윤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핵 발전을 포기했다며 "근대 기술과 근대 문명이 진화해온 끝에 핵무기나 핵발전소 문제가 등장했지만 '인간의 목숨과 삶 자체를 곤란하게 만드는 기술이나 문명은 이미 반윤리적"이라고 규정한다.

지난 2012년 서울 시청 앞에서는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제목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 1주기를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에는 1만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해 우리 아이들에게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탈핵의 길을 가자고 외쳤다. 이 자리에는 일본 후쿠시마에서 피난한 어린이 아베 유리카도 있었다. 유리카는 그 자리에 모인 어른들에게 물었다.

저는 원전사고 때문에 방사능을 뒤집어썼습니다.
저는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는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제가 결혼할 수 있을까요?
제가 건강한 아가를 낳을 수 있을까요?
(☞전문 바로 보기 :
아베 유리카,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어린이의 물음 앞에서 국가주의와 개발 논리,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소비주의에 중독된 나머지 우리가 '완강한 침묵'을 고수한다면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나가사키, 제주와 오키나와, 후쿠시마의 또 다른 공범이 되는 것은 아닐까? <후쿠시마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비록 패배가 이어지는 역사 속에 살고 있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프레시안(손문상)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출처: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30813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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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唯上知與 下愚不移(뛰어나게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고 못난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 중에 이론의 측면에서는 '안회'를, 실천의 측면에서는 '자로'를 특히 사랑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불행은 이처럼 아끼던 두 사람의 제자를 모두 자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아픔을 겪은 일이다. 한 명은 가난으로, 다른 한 명은 그의 곧고 불 같은 성정 탓에 생선회처럼 포가 떠진 뒤 소금절임이 되고 만다. 공자는 자로의 이런 곧고 굽힐 줄 모르는 성정을 염려했고, 위나라에 급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제자 중 '시'는 무사히 돌아오겠으나 '유(자로의 이름)'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을 만큼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소금절 임이 되어 돌아온 자로, 공자는 그런 제자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그날부로 자신의 집에서 절임 반찬을 모두 내다버리게 하고 평생 절임을 먹지 않을 만큼 자로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공자는 자로의 성정을 잘 알았기에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자로를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공자조차도 자신의 제자를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이 일화는 생각하기에 따라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토론이나 논쟁에서 이긴다는 자세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변화나 설득 자체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누군가의 논변에 따라 쉽게 설복 당하고, 변한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의 가능성을 닫아두고서는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상대의 말문을 닫게 만든다고해서 그 사람이 설복당하고, 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때로는 대화 자체가 논점이을 흐리고, 그릇된 방향으로 잘못 이끌거나 변질시키는 것도 많이 보아왔다.

토론이나 논쟁에서 이긴다는 자세로 출발하는 사람은 출발점 자체가 그릇되었으며 그 사람의 변설이 제 아무리 화려하고, 그럴 듯 해보여도 결국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들일수록 아무리 조목조목 따져 잘못된 점을 일러주어도 결국 자신이 변설에서 밀렸다고 생각할 뿐 자신의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뛰어나게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고 못난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리라.

우리는 흔히 무언가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담지자(膽智者)라고 하는데, 담지자란 '담력과 지혜를 동시에 갖춘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뛰어나게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담력이 부족한 사람이고, 어리석고 못난 자는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정할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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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인터넷 블로그의 고수, 블로그를 통해 유명인이 된(성공한) 사람쯤으로 소개될 때가 있다. 그런 말이 되는 혹은 말도 안 되는 소개가 나란 사람을 소개히기엔 역부족이고, 유명인을 지향한 바 없는 내 입장에선 억울할 때가 종종 있다. 일단 나는 블로그를 통해 유명해진 적이 없다. '블로그=홈페이지'라고 한다면 혹시 그건 약간 인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어쨌든 살면서 가슴에 새기는 이야기 중 하나, 만약 내가 어떤 분야의 고수라면, 혹은 고수가 되고 싶어한다면 이렇다고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손자병법"에 나온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 ~ 1645.6.13)


"손자병법"에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여유.
- 그에게는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무게가 있다. 아직 덜 익고 서투른 사람은 어수선하고 바쁘기 마련이다. 어떤 상황이든 완전히 이해하고 장악한 사람은 그 경륜과 기술만큼이나 무게와 힘이 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신중함으로 대안을 찾아내고 위기를 겪어 낸다.

2. 무게.
- 그는 자신의 칼날을 함부로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강태공은 “남과 다툴 때 번쩍거리는 칼을 쓴다면 훌륭한 장군은 아니다”라고 했다. 진정한 최고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뽐내지 않는다.

3. 겸손.
- 그는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의 갈 길은 자신이 직접 선택하는 소신과 자신감이 있다. ‘전쟁에서 이겼다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한다면 최고 중의 최고는 아니다’라고 손자는 말한다. 자신이 정한 원칙과 소신은 타인의 칭찬이나 환호,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길을 걸을 줄 알아야 한다.

4. 비범.
- 손자는 진정 고수의 병법에는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예측을 뛰어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일반인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안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미덕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이중에서도 내가 첫손으로 꼽는 건 '겸손'이다. '겸손'만이 나머지 덕목들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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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 말했지, 전공투를 보라고

<적군파>/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임정은 옮김/교양인 펴냄


1988년의 어느 날 고3 수험생이던 나는 삼촌과 마주 앉아 앞으로 어떤 대학, 무슨 학과를 지원할지 인생 상담을 했다. 말이 인생 상담이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숙부모들이 양육을 책임진 상황이라서 진로를 결정하는 대화를 나눈 셈이다. 그러나 나는 직전 해였던 1987년 고등학생 운동에 참여한 뒤로 대학 말고 다른 곳에 뜻이 있었기 때문에 삼촌을 실망시키는 말만 계속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은커녕 대학에 갈 만한 성적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저 멀리 남도 땅의 전남대나 조선대에 가고 싶다고 했다. 굳이 그곳을 이야기했던 건 오월대(전남대 투쟁조직)와 녹두대(조선대 투쟁조직)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오월대와 녹두대는 영화 <넘버3>의 송강호가 “예전에 말야, 최영의란 분이 계셨어, 전 세계를 떠돌며 맞짱을 뜨던 분이 계셨어”라던 분과 맞짱을 뜬다고 해도 믿었을 전설의 파이터 집단이었다.

   
1970년 3월 적군파는 요도호를 공중 납치해 평양으로 가려다 한국 김포공항에 비상 착륙했다(위).

‘세계 동시 혁명’ 꿈꾼 젊은이들


내 이야기를 답답한 표정으로 듣던 삼촌은 우리는 일본을 20년쯤 뒤처진 상태로 따라가고 있는데 일본의 학생운동 세력이었던 ‘전공투(全共鬪)’가 나중에 어찌되었는지 알지 않느냐며, 이쯤에서 생각을 접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이후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 학생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지만 배움이 부족한 탓이었는지 국내에서 전공투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일본 학생운동 관련 서적은 2006년에 나온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를 제외하고는, 지금 소개하는 퍼트리샤 스테인호프의 <적군파-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이 사실상 유일하다.

전공투란 잘 알려진 대로 1960년대 후반에 출현한 일본의 새로운 학생운동 세력으로, 이들은 패전이 남긴 폐허 속에 꽃피운 전후 민주주의와 고도성장이라는 화려함에 가려진 일본의 맨얼굴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우친 젊은이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자기부정의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세계 동시 혁명’이라는 슬로건 아래 무장투쟁을 부르짖은 세력이 바로 적군파(赤軍派)였다.


삼촌은 내게 한국의 학생운동이 일본을 뒤따라간다고 했지만 권위주의 독재 체제 아래에서 진행되었던 한국의 학생운동(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합법적 지위를 얻지 못한 채 비합법·반합법 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합법공간으로의 투쟁을 지향한 반면, 일본의 학생운동은 합법 공간에서 반복되는 무기력을 경험하면서 비합법·반합법 투쟁으로 변모해 갔다. 결과적으로 이 차이가 한국의 학생운동권이 제도정치로 포섭되는 과정을 밟게 된 반면 일본의 학생운동권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결과(단카이 세대)를 빚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적군파는 전 세계를 경악시킨 몇몇 사건(청년 다섯 명이 219시간 동안 3만5000명의 경찰과 대결한 사상 초유의 인질극 ‘아사마 산장 사건’, 북한에 혁명 기지를 건설한다며 평양으로 간 일본 최초의 비행기 납치 ‘요도호 사건’, 그리고 잔인한 동지 살해로 일본 진보 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연합적군 숙청 사건’)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 책의 의의는 앞서 살펴본 대로이지만 다소 아쉬운 점은 저자가 사회심리학을 표방하면서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숙청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일본과 미국을 대비시키며 일본 사회 특유의 문화와 관습에서 해답을 찾는 듯 보이는 게 아쉽다. <2013-03-09>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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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주석 만세” 낯설지 않은 외침

- <중국인 이야기 1>/리쿤우·필리프 오티에 지음/한선예 옮김/아름드리미디어 펴냄


내게는 중국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두 가지 있다.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한 시민단체를 취재하다 우연히 한 선배를 만났는데 1989년 중국의 톈안먼 사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선배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중국공산당의 결정을 이해한다며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고 했다. 한마디로 시위 군중들이 우경화되었으므로 체제 수호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2007년의 일이다. 중국 광저우에 갔다가 쑨원(孫文)을 기리는 중산기념당에 들렀다. 기념품 가게에는 여느 관광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품이 대부분이었는데, 유일하게 붉은색 비닐 장정의 책 한 권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오주석어록(毛主席語錄)>이었다. 함께 간 조선족 가이드에게 구입할 수 있도록 통역을 부탁했더니 왜 저런 책을 사려 하느냐며 이제 공산당이고 마오고 진저리가 난다며 손사래를 쳤다.

냉전 시대, 한국과 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해 있었지만 20세기 아시아의 신생국가로 각기 다른 방식의 근대화를 추진해왔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군사 쿠데타와 민주항쟁을 거친 우리에게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개혁개방 시대를 살아온 저들에게도 이 시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중국인 이야기1-아버지의 시대>는 수십 년간 국가와 당의 선전 업무에 종사해온 국가 공식 화가이자 현재 중국공산당 당원이기도 한 리쿤우(李昆武)가 자신의 삶을 통해 격동하는 중국 현대사의 현장을 생생히 담아낸 자전적인 만화 작품이다. 그는 프랑스인 친구 필리프 오티에의 도움을 받아 4년여의 작업 끝에 <중국인 이야기> 3부작을 완성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제1권은 자신이 태어난 1955년부터 마오쩌둥이 죽은 1976년까지를 다룬다. 

아직 젖먹이인 아들에게 ‘엄마, 아빠’ 대신 “마오 주석 만세”를 먼저 해보라고 시킬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공산당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주인공 샤오리가 맞닥뜨린 첫 번째 사건은 대약진운동(1958~1962)이었다. 그는 이 시절을 “며칠 전 시작된 어떤 운동으로 온 나라가 도취에 가까운 흥분 상태”에 휩싸인 시기로 기억한다. 한순간에 모든 형태의 사생활이 사라지고, 공동식당에서 모두 함께 밥을 먹고, 온 나라의 쇠붙이를 거둬 용광로에 녹이고, 용광로를 달굴 석탄이 떨어지자 온 산의 나무들을 베어냈다. 마오 주석의 한마디에 중국 인민들은 파리·모기·쥐·참새를 박멸하겠다며 산과 들판을 누볐다.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고 참새를 없앤 여파로 땅이 황폐해지고, 해충이 창궐하는 바람에 3년여 흉년 동안 10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굶어죽는 대기근이 벌어진다.

   
ⓒ북폴리오 제공
<중국인 이야기 1>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시기를 다룬다. 1966년 9월12일 홍위병이 하얼빈 시장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위).

그들과 우리의 역사가 겹치는 시절

몇 년 뒤 열한 살이 된 샤오리는 친구들과 함께 <마오어록>을 손에 들고 식당, 사진관, 목욕탕, 미용실 등을 돌며 문화대혁명(1966~1976)에 참여한다. 이들은 더 나아가 학교 선생님들을 고발하고, 자아비판에 끌고 나와 욕보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샤오리와 그 친구들도 피해가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의 폭로로 지주 집안 출신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아버지는 공산당에서 쫓겨나 어디론가 잡혀가고 집안은 몰락한다. 그런데 죽(竹)의 장막 저 편에 가려져 있던 중국의 시대 상황이 내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어린 샤오리가 과제로 쥐를 잡아 꼬리를 학교로 가져가는 모습이 낯설지 않고, 거리 곳곳, 건물마다 온갖 구호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으며, 아침 일찍 학교 갈 때 동사무소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던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의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가 낯설지 않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들의 역사가 우리 역사의 어느 시절들과 겹쳐지는 이 시절에.<2013-02-02>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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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論語』先進篇) - 공자

내일 세상이 멸망하는데 당신에게 그것을 막을 힘이 있음에도 그리 하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을 비겁하다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아서 그리 된다면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내일 세상이 멸망할리도 없고, 당신에게 그것을 막을 힘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내일 갑자기 모두 사라질리 없고, 그와 반대로 당신이 내일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서도 안되겠다.

나는 공자의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란 말의 무심함, 요즘 말로 그 시크함을 좋아한다. 언젠가 군주(왕조)의 삶과 민중의 삶은 다른 것이고 다른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군주(왕조) 혹은 창업자의 삶은 '나 아니면 안 되는 삶'이지만 민중의 삶은 '우공(愚公)의 삶'이기 때문이다. 옛날 북산에 살았던 90세 노인이 태행산과 왕옥산을 평지로 만들려 했을 때 모두가 그를 비웃자 우공은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이 있고 내 자식이 죽으면 내 손자가 있고 손자가 또 자식을 낳는데, 산은 언제고 불어나지 않으니 어찌 평지로 만들지 못할 까닭이 있는가"라고 답했다.

나는 한때나마 혁명을 꿈꾼 적이 있는데, 그뒤 꽤 오랫동안 좌절해 있던 기억이 있다. 거의 10년여의 방황이 있었고, 부끄럽지만 그 후 정신을 차린 뒤에도 틈틈이 방황하여 실수와 실패를 산처럼 쌓아올린 인간이다. 그런 나를 구원한 것은 우공의 삶이었다. 그것이 꼭 내 자식이 아니어도 좋다. 억압이 있는 곳에 해방이 움트듯 비록 지금의 세상이 내 마음에 들지 않고, 이 세상이 과연 바뀌겠는가 절망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지금의 나는 그것을 하지 못할 지라도 언젠가 누군가는 내가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일들을 또 하려고 나서지 않겠는가.

왕조의 역사, 창업자의 역사란 '내가 아니면' 그렇게 무너지고 허망하게 망가지는 것이지만 우공의 역사는 그렇게 꾸준하게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당신에게 현장에서의 싸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현장을,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공부를 하라. 당신이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부채를 의식하고 있는 동안에는 당신은 오늘의 고통을 담보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싸우는 사람들의 싸움 역시 내일을 위한 것이듯 말이다.

다만 당신이 오늘 몰두하는 그 공부가 보다 나은 내일의 우리를 위한 일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내일 당신의 삶으로 증명하면 될 일이다. 고독하고 힘든 일이겠으나 오늘 여러 현장에서 우리를 이끄는 지식인들의 목소리 상당수는 과거 현장에는 없었던 이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 시절, 그 자리,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그 부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많은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오늘 후회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면 누구도 당신을 비겁하다 하지 않을 것이다.


2. 어떻게 하면 소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押丁解牛(포정해우) 중국 전국시대에 소를 잡는 데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포정(丁)’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포정이 궁정 잔치에 쓰일 소를 잡고 있었다. 마침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왕이 그의 솜씨를 보고 감탄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소 잡는 기술이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포정은 칼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으려고 했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지 3년이 지나니 어느새 소가 부위별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19년이 흐른 지금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소의 살과 뼈, 근육 사이의 틈새를 봅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칼이 지나가게 합니다. 이런 기술로 단 한 번도 칼이 살이나 뼈와 부딪히는 실수를 한 적이 없습니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 이유는 칼로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이다. 솜씨 좋은 백정은 칼을 가지고 소의 살을 베기 때문에 1년 만에 칼을 바꾼다. 그렇지만 포정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았다.

소의 뼈와 근육 사이에는 어쨌든 틈새가 있기 마련이고 그 틈새로 칼날을 집어 넣어 소를 잡기 때문에 칼날이 전혀 무뎌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를 오래도록 하다 보면 이치에 도달하는 법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오래도록 상대하다보면 아이들의 꿍꿍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오래도록 바라보다보면 그 꿍꿍이, 그 마음 속을 헤아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혹은 낙천적으로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 산더미인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가령, 나는 아직도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고, 그 서슬에 놀라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슬퍼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면 가슴이 벌렁이는 이유를 알 수 없고, 바다의 푸르딩딩한 표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야 알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어느 순간의 나는, 내가 도통 아는 것이 없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일투성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 한다.

가령, 나는 하늘이 푸른 까닭이 과학적으로야 빛의 산란에 의한 반사가 주로 푸른빛의 파장에 가깝게 일어나기 때문에 가을의 하늘이 그토록 높고 푸르게 빛남을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일 뿐 그것이 정녕 푸르게 빛나야 할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촛불이 불타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으나 그 빛을 보면서 사람들이 오만가지 생각과 상징을 댈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재간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자신의 평생 반려로 삼고자 노력하는 이유, 누군가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느 순간에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등 지장이 없음을 깨닫는다.

때로 종교의 효용성을 되묻는 이들에게 나는 종교를 이렇게 정의해 대답하리라 마음먹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종교란 것은 죽음(혹은 내가 타인을 위해 나의 이익과 욕망을 희생하는 이유)에 대해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인간의 정신이 창조해낸 부산물이다. 이런 멋대가리 없는 이유밖에 만들어낼 수 없는 내 생각의 한계가 몹시 부끄럽지만 그런 까닭에 나는 낙엽 지는 가을 창가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갈 때 가슴이 벌렁거리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인생의 깊은 의미는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는 걸 안다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 나머지는 세상의 순리에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세상은 나 없이도 어제처럼 내일도 그렇게 흘러갈 테니까. 누군들 그 이유를 다 알고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비록 이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마음으로 이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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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의 제왕, B-52가 한반도 상공에 뜬단다. 키리졸브 훈련 때문인데 흔히 미국의 핵우산이라고 하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먼저 연상하게 되는데, 핵우산의 촘촘한 살대를 구성하는 3대 요소는 이른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핵잠수함(잠수함발사탄도탄,SLBM), 그리고 공중발사탄도미사일(ALBM)이다. 이중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대륙간을 미사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국 근방에 설치될 필요가 없어 자국의 은밀한 장소에 배치되기 마련이고, 잠수함발사탄도탄은 그 자체로 은밀성이 최고의 장점이기 때문에 드러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무기가 지닌 현시효과에 의한 전쟁억지력으로 핵추진 항공모함을 미국 군사력의 집결체인양 떠드는 경향이 있지만 항공모함, 그 자체는 재래식 전력의 성격이 강하다. 다만 해군력이 주는 강력한 현시효과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1952년에 초도비행을 한 폭격기로 올해 환갑을 맞은 무기인 B-52는 현시효과란 측면에서 실제 운용 비용까지 매우 실용적인 무기이다. 개발 연도가 오래되다 보니 대중의 인식 속에 이 무기는 첨단무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이 무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ALBM(공중발사탄도미사일), 다시말해 핵탄두를 실어나를 수 있는 핵미사일 발사 플랫폼이자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폭탄 탑재량을 자랑하는 전략폭격기로 향후 40년 이상(2040년까지) 운용할 계획의 현역 무기이자, 동시에 미래 무기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 책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중에서 B-52부분 일부를 인용(108~110쪽)한 것이다.

전쟁억지수단이 된 핵폭탄을 대신한 전쟁수단

전략폭격의 끝은 핵공격이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5분 17초, 히로시마 상공 570m 지점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폭발했다. 핵폭탄은 십만 분의 1초라는 극히 짧은 순간에 섭씨 300,000도에 이르는 불기둥을 뿜어냈고, 1초 후 불기둥은 반경 250m로 부풀어 올랐다. 버섯구름은 7km 상공까지 솟아올랐고, 폭발로 인한 열 반응은 16km 상공까지 미쳤다. 아무런 사전경고 없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폭발 즉시 그리고 며칠 동안 대략 14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 3일 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7만 명이 더 죽었다. 그 후 5년간 방사능에 피폭된 13만 명이 죽었고, 1975년까지 3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원폭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60년대 중반이 되자 미사일 기술의 발전이 전략폭격기의 존립기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발사한다면 값비싼 전략폭격기보다 위력은 강하면서 값은 저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폭탄 개발비용이 20억 달러였는데, B-29 폭격기의 개발비용은 30억 달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핵무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엔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될 수 없었다. 동서냉전기간 동안 수립된 상호확증파괴전략은 핵전쟁이 곧바로 인류의 멸망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연속적인 핵공격을 가해 만주와 북한 일대를 핵 오염 지대로 만들어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계획을 수립했지만 다행히 계획으로 끝났다. 이후에도 쿠바 미사일 사태 등 몇 차례의 핵전쟁 위기가 있었지만 핵무기는 사용되지 못했다. 역설적이게도 핵무기는 너무나 강력한 파괴력 때문에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고, 덕분에 위력은 조금 약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전략폭격기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B-29는 한국전쟁에도 사용되었다. 4년의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이 주축이 된 UN군은 1백만 회 이상 출격하여 한반도에 476,0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러나 공중전에 제트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UN군은 2천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특히 미국과 서방의 항공전문가들은 미그15(MiG-15)가 보여준 소련의 기술력에 경악했다. 지금까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던 미국의 제트전투기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뛰어난 전투기를 개발할 역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자 보잉은 제트 엔진을 이용한 폭격기 개발에 나섰고, 1951년 중반엔 미국 최초의 제트 폭격기 B-47(Stratojet)을 개발한다. B-47은 9.9톤의 폭탄을 탑재하고 6,437km를 비행할 수 있었지만 냉전은 더 크고, 더 강력한 폭격기를 요구했다. 1952년 4월 15일, 보잉은 B-52(Stratofortress)를 탄생시켰다. B-52는 길이 48.5m, 날개 길이 56.3m, 8개의 제트엔진으로 약 22톤(나중엔 27톤)의 재래식 폭탄과 핵무기를 탑재하고, 16,013km를 비행할 수 있다. 미국은 해외 기지가 아니라 본토에서 이륙해 지구상 어디든 폭격이 가능하길 바랐다. 보잉은 707 민항기의 설계를 이용해 공중급유기 KC-135(Stratotanker)를 만들었다. 이 비행기는 길이 41m, 날개 폭 39.6m에 최대속도 940km/h로 제트 폭격기와 비슷한 속도로 날면서 25,000갤런의 연료를 공급할 수 있었다. B-52 폭격기 개발 이후 한동안 미국에선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략폭격기 개발이 주춤해졌지만 초강경 보수주의자였던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B-1과 스텔스 기능이 도입된 F-177, B-2 같은 최신예 전략폭격기들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B-52는 이들 폭격기들이 모두 퇴역한 이후인 2045년까지 계속해서 전략폭격기의 임무를 수행할 계획이다. 현재 B-52에 탑승하는 주요 승무원 대부분은 비행기의 기령(機齡)보다 어리고, 심지어 2대에 걸쳐 같은 비행기에 승무원으로 탑승하는 일도 있다.





B-52가 1950년대 중반에 개발된 기체인데도 다른 최신형 폭격기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B-52의 엄청난 살상능력이 지닌 현시효과(顯示効果) 덕분이었다. 1991년 벌어진 걸프전 당시 미군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은 매일 1천회 내지 1천 5백회를 출격했는데, 전략적 요충지였던 바스라(Basra) 서안의 이라크 정예 공화국 수비대는 3시간마다 한 번씩 B-52의 공습을 당했다. 당시 B-52는 고성능 집속탄을 사용하는 대신 표준형 500파운드짜리 폭탄만을 사용했는데, 지하 벙커에 자리 잡고 있는 이라크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긴 어려웠지만 심리적 효과는 대단했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국적군은 이라크 병사들에게 B-52가 어떤 부대를, 언제 공격할지 미리 경고하는 전단을 뿌렸다. B-52는 예정된 시간에 예고한 부대를 정확히 공격했는데, 이라크 군으로 하여금 B-52의 공습은 도저히 피할 수 없으며 단지 항복만이 살 길이라는 무력감에 빠지게 하는 전술이었다. ‘토마호크’ 미사일 같은 스마트무기들은 TV에 방영된 것처럼 이라크의 중요시설을 정확히 공격했지만 실제 전장에 나가있는 병사들의 사기를 꺾지는 못했다. 스마트무기는 전선의 일반 병사들을 직접 겨냥한 위협이나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B-52 폭격기들의 대대적인 위협은 집중적이고 파멸적이었으며 일선의 병사들이 심리적으로 느끼는 공포와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그 결과 이라크 병사들의 탈영병/포로 대 전사자 비율은 24.67대 1로 탈영병 수치가 높기로 악명 높았던 베트남전의 0.19대 1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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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반도 상공에 폭격기의 제왕, 아니 그 죽음의 제왕이 떠 있다. 이라크 전쟁 발발 10주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어느덧 12년이 되었다. 2003년 3월 20일 미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4월 9일 바그다드가 점령되었고, 전쟁 발발 두 달만인 5월 1일 미국의 조지 부시 주니어 대통령이 항공모함 위에서 자랑스럽게 종전 선언을 했지만 전쟁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미국은 다시 지난 2011년 12월 종전 선언을 했지만 여전히 그들이 주장했던 이라크 전쟁의 세 가지 목적 "사담 후세인 제거, WMD 제거, 이라크 민주화" 중 유일하게 사담 후세인 제거만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미군 4,500여 명 전사, 3만2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다른 한 편 이라크 전쟁 발발 10년 사이 11만2000명 이상의 이라크 민간인이 숨졌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17일(현지시간) 발간됐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보고되지 않은 희생자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라 만약 이 수치까지 감안한다면 사망자 수치는 17만4000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B-52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는 교훈을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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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도 말한 바 있지만 한국에서는 글줄께나 읽었다는 사람일수록 러시아문학의 대표작가로 톨스토이 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윗길로 놓는 사람들이 많은 듯 싶다. 왜? 톨스토이가 그렇게 만만해? ㅋㅋ

어쨌든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였고, 두 사람 모두 러시아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가라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생존 당시 두 사람의 작품 고료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톨스토이가 장당 500루블을 받았던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톨스토이의 10분의 1정도밖에 안되는 고료를 받아야 했다.

명성을 얻은 뒤, 그러니까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조차 장당 300루블에 불과했다.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원고료가 쌌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항상 돈에 목말랐기 때문이고, 그가 항상 돈에 목말랐던 까닭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잘 알려진 대로 도박중독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는 유독 도박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1849년 12월 21일 젊은 혁명가를 꿈꿨던 28살의 젊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대 위에 섰다. 그러나 짜르는 젊은 지식인들을 죽이는 대신 다시는 체제 전복 같은 보람있는(?) 일에 나서지 못하도록 겁만 주고 싶었기 때문에 사형대에 세운 뒤 이들을 다시 풀어주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은 훗날 그가 펴낸 장편소설 "백치"에 잘 드러나 있다.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눈을 질끈 감았겠지만 그 순간 예정된 구원이 다가왔다. 저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달려왔던 것이다.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지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되었고, 그가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형기를 마친 뒤 군대에서 사병 복무까지 마친 뒤인 1859년의 일이었다.

극적으로 사형을 면하긴 했지만 이후 그의 인생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내가 죽고, 형이 죽고, 잡지 경영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이후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겨가며 도박에 몰입했지만 도박은 그의 인생을 극한의 빈곤 속으로 처넣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하게 계약을 맺었고, 도박으로 원고료를 탕진하기에 바쁜 데다 마감에 쫓기는 바쁜 일정 때문에 그의 걸작들 중 상당수 "죄와 벌", "도박꾼" 등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구술필기의 형태로 집필됐다.

사형대 위에서는 "이 세상에서 숨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그 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분은 삶을 되돌아보는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보는데 쓰고 싶다"던 도스토예프스키였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한국의 글쟁이들은 도박 중독자들도 아닌데 원고료도 안 주면서 글을 쓰게 한다거나 먹고 살기 힘들 정도의 각박한 원고료만 지불하는 상황은 아무리 자기네도 힘들다고 하지만 너무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래서 예술인 소셜 유니온이 꼭 필요한 곳이 한국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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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람구두 windshoes

권위주의 체제의 문제는 단지 정치권력의 집중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국민 개개인의 심성구조에 심대한 정신적 병리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종종 한국 남성들의 권위주의적 성격의 핵심은 그들의 인생이 파란만장한 현실 앞에서 물위에 동동 떠있는 일엽편주처럼 삶의 모든 것이 외부의 힘(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인간으로서 자신의 내면적 가치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만족시키는 감정을 보람이라고 했을 때 한국 남성들의 보람이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외재적 가치 다시 말해 늘 자신의 존재 바깥에 있는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인들이 체면을 중시하는 까닭을 유교적 봉건주의에서 찾는 분석에 대해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유교적 봉건주의는 체면을 중시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면의 염치도 따지는데 반해 우리나라의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염치는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듯 보이지만 권위주의적 성격이란 속성상 외부에서 몰아치는 격랑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보호본능이 본질이므로 외부의 변화에 대해 늘 민감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취약성을 지닌다. 겉으론 강해보이지만 허약하며 텅빈 것이 한국 남성들의 내면 세계 풍경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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