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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김경미 - 나는야 세컨드1 나는야 세컨드1 -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 더보기
이정록 - 도깨비 기둥 도깨비기둥 - 이정록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피가 쏠린다는 말, 배냇니에 씹히는 세상 어미들의 젖꼭지쯤으로만 알았어요. 바람이 든다는 말, 장다리꽃대로 빠져나간 무의 숭숭한 가슴 정도로만 알았어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한밤 강줄기 하나가 쩡쩡 언 발을 떼어내며 달려오다가, 또 다른 강물의 얼음 진군進軍과 맞닥뜨릴 때! 그 자리, 그 상아빛, 그 솟구침, 그 얼음울음, 그 빠개짐을 알게 되었지요. 당신을 만나기 전엔, 얼어붙는다는 말이 뒷골목이나 군인들의 말인 줄만 알았지요. 불기둥만이 사랑인 줄 알았지요. 마지막 숨통을 맞대고 강물 깊이 쇄빙선碎氷船을 처박은 자리,흰 뼈울음이 얼음기둥으로 솟구쳤지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더보기
이동호 - 비와 목탁 비와 목탁 - 이동호 무작정 때리다보면 지구라는 이 목탁도 언젠가는 텅텅 소리가 날 테지 빗방울이 땅에 떨어져 '철썩' 마지막으로 목탁 한번 치겠다는 것이 전혀 어불성설은 아니지 빗방울이 연습삼아 사람들 목 위의 목탁을 먼저 쳐보는 것은 지구를 쳐볼 기회가 단 한번 뿐이라서지 비 오는 장날을 걸어다니다가 머리 위, 비닐에 묵직하게 고인 빗물을 고스란히 맞아본 적 있지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에서 '앗'하는 목탁소리가 터져 나오더군 빗방울이 때리면 뭐든지 목탁이 되고 마는 것 그게 삶, 아니겠어 소리를 내기 위해 물렁해지는 저 땅을 좀 봐 새싹이 목젖처럼 올라오는 것. 보여? 멍 자국이라는 듯 쑥쑥 키를 키우는 저것 소리의 씨앗인 빗방울 속에서 자라는 저 푸른 목탁소리 * 오늘 핀 꽃은 어제 핀 꽃이 아니다.. 더보기
박제영 -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 박제영 그리움이란 마음 한 켠이 새고 있다는 것이니 빗속에 누군가 그립다면 마음 한 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니 비가 내린다, 그대 부디, 조심하기를 심하게 젖으면, 젖어들면, 허물어지는 법이니 비 내리는 오후 세 시 마침내 무너진 당신, 견인되고 있는 당신 한때는 ‘나’이기도 했던 당신 떠나보낸 줄 알았는데 비가 내리는 오후 세 시 나를 견인하고 있는 당신 * '시'란... '~란' 말로 시작되는 모든 말은 시가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시가 세상 만물의 조화에 참여하는 방법은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한국어에선 대체로 '~란 ~이다.'의 형태로 표현된다. 시인은 "그리움이란~" 무엇무엇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이 말.. 더보기
황지우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비 그친 새벽 산에서 -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창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 비가 그친 새벽 산에 머물러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산의 등허리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라가는 하얀 김... 산 중턱엔 하얀 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산 아래로 내려온 나는 방금 전 선계에서 유배된 불쌍한 중생이다. 산이 하늘에 두고 온 섬이라면 나는 수중의 고혼이 된 셈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이 참 멋지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희망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어쩌.. 더보기
이승하 - 사랑의 탐구 사랑의 탐구 - 이승하 나는 무작정 사랑할 것이다 죽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지라도 사랑이란 말의 위대함과 사랑이란 말의 처절함을 속속들이 깨닫지 못했기에 나는 한사코 생을 사랑할 것이다 포주이신 어머니, 당신의 아들 나이 어언 스물이 되었건만 사랑은 늘 5악장일까 아니 여탕(女湯) 꿈속에 그리는 그리운 고향 그 고향의 안개와도 같은 살갗일까 술 취한 누나의 타진 스타킹이지 음담패설 속에서만 한결 자유스러워질 수 있었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땐 목청껏 노래불렀다 방천 둑길에서 기타를 오래 퉁기고 왠지 부끄러워 밤 깊어 돌아왔더랬지 배다른 동생아 너라도 기억해다오 큰 손 작은 손 손가락질 속에서 나는 자랐다 길모퉁이 겁먹은 눈빛은 바로 나다 사랑은 그 집 앞까지 따라가는 것일까 세월처럼 머무르지 않는 것.. 더보기
김정환 - 구두 한 짝 구두 한 짝 - 김정환 찬 새벽 역전 광장에 홀로 남았으니 떠나온 것인지 도착한 것인지 분간이 없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구겨진 구두 한 짝이 저토록 웅크린 사랑은 떠나고 그가 절름발이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지는 못 하지, 벗겨진 구두는 홀로 걷지 못한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그렇게 찬 새벽 역전 광장에, 발자국 하나로 얼어붙은 눈물은 보이지 않고 검다 그래. 어려운 게 문제가 아냐 기구한 삶만 반짝인다 * 마하트마 간디가 아직 인도의 정신적 스승이자, 독립운동가가 되기 이전의 일화다. 그는 식민모국인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고향 인도로 돌아오기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도 교민들을 위해 변호사 활동을 했다. 한 번은 열차 출발시간에 늦는 바람에 급하게 출발하려는 기차를 타다 구두 .. 더보기
이성복 - 꽃피는 시절 꽃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 더보기
고영민 - 나에게 기대올 때 나에게 기대올 때 - 고영민 하루의 끝을 향해 가는 이 늦은 시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다 보면 옆에 앉은 한 고단한 사람 졸면서 나에게 기댈 듯 다가오다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몸을 추스르고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올 때 되돌아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흔들림 수십 번 제 목이 꺾여야 하는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야 하는 잠든 네가 나에게 온전히 기대올 때 기대어 잠시 깊은 잠을 잘 때 끝을 향하는 오늘 이 하루의 시간, 내가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한 나무가 한 나무에 기대어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기대어 나 아닌 것 거쳐 나인 것으로 가는, 이 덜컹거림 무너질 내가 너를 가만히 버텨줄 때, 순간, 옆구리가 담장처럼 결려올 때 : 고영민, "악어", 실천문학 * 고등학.. 더보기
이승하 -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