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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강연호 - 감옥 감옥 - 강연호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의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 나는 강연호의 이 시를 읽고 처음엔 키득키득 웃었다. 이제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는 아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의 날개옷을 빼앗고 그녀를 집에 가둬두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집에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하루종일 그녀의 일상복 겸 잠옷겸 하는 츄리닝.. 더보기
조용미 -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바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 조용미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나의 내면이 고요할 때 바람은 어디에 있었나 생나무 가지가 허옇게 부러진다 버즘나무 널따란 잎사귀들이 마구 떨어져 날린다 개태사 앞 향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 마당에 기왓장이 나뒹군다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키 큰 소나무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없는 나무들조차 내게로 몰려오고 있다 이때 폭풍은 나무의 편이다 나무들은 폭풍의 힘을 빌려 내게로 침입하려 하고 있다 속이 울렁인다 저 나무들의 혼이 들어오면 나는 무엇이 되는 걸까 머리칼에 바람이 갈가리 찢긴다 바람은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나와 약한 나무들의 혼을 찾아 멀리 달려가고 있다 숲이 심장처럼 펄떡이고 있다 * "나의 내면이 고요할 때 바람은 어디에 있었나.. 더보기
강윤후 - 쓸쓸한 날에 쓸쓸한 날에 -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 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들려주어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더보기
서정주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에 대한 나의 마음은 이율배반적이다. '인간'적으로야 서정주가 밉지만 '문학'적 입장에서 서정주를 나는 미워할 수가 없다.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딜레마를 서정주는 잘 보여준다. 본래 표현용법상 '인간적이다'란 말은 너그럽다는 말과 이음동의어다. 인간이란 실수가 잦은 짐승이고, 실수를 통해 배워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해 인간적이라 표현할 때 .. 더보기
박라연 -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 박라연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쭉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 더보기
강영은 - 오래 남는 눈 오래 남는 눈 - 강영은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알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출처 : 강영은, "녹색비단구렁이", 종려나무 * 강영은 시인의 이 시는 참 재미있는 과장으로 시작된다. "뒤.. 더보기
정현종 - 가객(歌客) 가객(歌客) - 정현종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이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나는 답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하고.. 더보기
함민복 - 자본주의의 약속 자본주의의 약속 - 함민복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좀 보고 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퍼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트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시티... * 생텍쥐페리의 에.. 더보기
구상 - 유치찬란 유치찬란 - 구상 올해 그 애는 2학년이 되어서 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 자기가 그 작가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 그래서 뭐라고 그랬지? 하고 물었더니 -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보면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 라고 했단다. * '촌철살인'이라 했던가? 나는 시의 본령은 긴 시가 아니라 짧은 시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촌철살인하는 시에 진정한 묘미가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라는 한 마디에 구상 선생의 생전 모습이 맑고 고운 화선지에 툭하고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화악'하고 번져온다. 정말 그러셨을 것 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나의 노년도 그러했으면 하는 부러움이 함께 번진다. 더보기
박재삼 - 천년의 바람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 은 박재삼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1955년 으로 등단해 1997년 세상을 등질 때까지 박재삼 시인은 40여 년간의 시작 생활을 통해 '한국의 전통 서정 탐구와 허무의 시학'을 집중적으로 형상화해왔다고 평가받는다. 아마 시인 자신은 이런 평가를 들으면 혼자 조용히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인을 한국의 전통서정과 허무의 시학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한국의 전통서정은 사실 허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