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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정호승 -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읽을 때 만해도 나는 이 시를 받아들이기가 참 곤란했다. 그만큼 내가 날이 서 .. 더보기
고은 - 어느 소년 소녀의 사계가(四季歌) 어느 소년 소녀의 사계가(四季歌) - 고은 봄 네 작은 무덤가에 가서 보았네 가장 가까운 아지랑이에 낯선 내 살의 아지랑이가 떨었네 겨우내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로 보이는 그 마을의 슬픔 버들옷 뿌리 기르는 시내가 흐르네 어느 날의 봄 비오는 괴롬을 마감하려고 내 봄은 어린 풀밭가에 돌아왔는지 봄에는 네 무덤조차도 새로 있었네 그렇지만 나는 무언가 좀 기다리다 가네 여름 네 어릴 때 가서 살아도 아직 그대로인 한 달의 서해 선유도(仙遊島)에 건너가고 싶으나 네가 밟은 바닷가의 단조한 고동소리 네 소라껍질 모아 담으면 얼마나 기나긴 세월이 그 안에서 나올까 나는 누구의 권유에도 지지 않고 섬을 그리워하네 언제나 여름은 어제보다 오늘이고 첫사랑과 슬픔에게 바다는 더 푸르네 옛날의 옷 입은 천사의 외로움을 .. 더보기
고정희 -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 더보기
도종환 - 늑대 늑대 - 도종환 너는 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편안한 먹이를 찾아 먹이를 주는 사람들 찾아 많은 늑대가 개의 무리 속으로 떠나가는데 너는 왜 아직 산골짝 바위틈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불타는 눈빛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번개가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달려가던 날카로운 빛으로 맹수들을 쏘아보며 들짐승의 살 물어뜯으며 너는 왜 아직도 그 눈빛 버리지 않는 것일까 너는 왜 바람을 피하지 않는 것일까 여름날의 천둥과 비바람 한겨울 설한풍 피할 안식처가 사람의 마을에는 집집마다 마련되어 있는데 왜 바람 부는 들판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오늘은 사람들 사이에서 늑대를 본다 인사동 지나다 충무로 지나다 늑대를 본다 늑대의 눈빛을 하고 바람부는 도시의 변두리를 홀로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본다 그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더보기
이생진 - 사람 사람 - 이생진 어떤 사람은 인형으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목마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생식으로 끝난다 어떤 사람은 무정란으로 끝나고 어떤 사람은 참 우습게 끝난다 * 율곡 이이는 에서 배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에 있는 줄도 모르고 허황되게 뜻을 높고 멀리하여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긴다. 특별한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 자신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활한다면 어찌 불쌍하지 않으랴." 이생진의 시 은 진술로만 이루어진 시다. 진술로 이루어진 시는 교훈적인 느낌이 강한데, 이 시는 서글프다. 그 어떤 사람이 '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시(詩)의 기본은 '묘사'다. 묘사만으로도 시는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처음 써보는 이.. 더보기
손택수 - 꽃단추 꽃단추 - 손택수 내가 반하는 것들은 대개 단추가 많다 꼭꼭 채운 단추는 풀어보고 싶어지고 과하게 풀어진 단추는 다시 얌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진다 참을성이 부족해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지퍼는 질색 감질이 나면 좀 어떤가 단추를 풀고 채우는 시간을 기다릴 줄 안다는 건 낮과 밤 사이에, 해와 달을 금단추 은단추처럼 달아줄 줄 안다는 것 무덤가에 찬바람 든다고, 꽃이 핀다 용케 제 구멍 위로 쑤욱 고개를 내민 민들레 지상과 지하, 틈이 벌어지지 않게 흔들리는 실뿌리 야무지게 채워놓았다 손택수,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통권 143호) * 시(詩)는 어째서 행과 연을 구분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리듬(律) 때문이다. 그럼, 시에서 리듬이 왜 중요한가? 그건 시가 본래 노래였기 때문이다... 더보기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 더보기
함민복 - 만찬(晩餐) 만찬(晩餐) -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 누가 요즘 쓸쓸하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답했다. 하지만 고독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겠노라 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이란 말이 있다. '늙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 젊어서 남편 없는 사람, 어려서 어버이 없는 사람,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맹자가 했던 말인데 그는 주(周)나라 문왕의 사례를 들어 어진 정치를 베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더이상 나는 어리지 않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다. 어쩌면 지금 나의 고독은 그런 외부적 환경에 의한 고독이라기 .. 더보기
오세영 - 그릇 1 그릇1 -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 '君子不器'라 했다. 나는 이 오세영 시인의 시론을 보여주는 시라 평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절제와 균형은 그의 시세계를 이루는 대위법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중심이 도사리고 있다. 표현은 중심에서 어긋나지 않으므로 파격적인 표현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엔 언제나 힘이 있다. 까닭은 오세영의 시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중심이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 더보기
나희덕 - 상현(上弦) 상현(上弦) - 나희덕 차오르는 몸이 무거웠던지 새벽녘 능선 위에 걸터앉아 쉬고 있다 神도 이렇게 들키는 때가 있으니! 때로 그녀도 발에 흙을 묻힌다는 것을 외딴 산모퉁이를 돌며 나는 훔쳐보았던 것인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구름 사이 사라졌다가 다시 저만치 가고 있다 그녀가 앉았던 궁둥이 흔적이 저 능선 위에는 아직 남아 있을 것이어서 능선 근처 나무들은 환한 상처를 지녔을 것이다 뜨거운 숯불에 입술을 씻었던 이사야처럼 * 상현(上弦)달을 영어로는 'first quarter'라 부른다. 과학적인 표현일진 몰라도 매가리 없고, 풀 죽는 느낌이다. 신화의 세계에서 달은 언제나 여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원시시대 인류가 사냥과 채집에서 돌아와 동굴 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로의 온기로 휴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