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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한국시

서정주 - 대낮 대낮 - 서정주 따서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 사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렁이 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달아나며 나를 부르고..... 강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 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끓는 대낮에 우리 둘이는 온몸이 달아...... * 핫슈 : 아편의 일종 * 사람들을 인솔해 미당 서정주의 기념관에 갔을 때,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그의 시에 대한 찬탄을 거듭하며 그의 행적에 대해 눈감거나 그의 행적을 지적하며 이런 시인의 기념관을 세우고, 이런 사람을 기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거나, 물론 그 사람들의 속내를 알지 못하니 내가 한 마디로 단정지어 왈가왈부하는 건 폭력적인 단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분들의 속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람들은 두 가.. 더보기
황동규 - 더딘 슬픔 더딘 슬픔 - 황동규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므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 어려서 할미를 어미인 양 여기며 살았다. 나 결혼하는 것까지는 보고 돌아가실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다던 할머니는 정말 나 결혼한 이듬해 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퇴근하고 돌아와 이제 막 잠들려는 찰나에 받은 전화로 할머니의 부음을 접했을 때 내가 느낀 황망함이란 당신의 죽음이 주는 황망함이 아니라 그 순간.. 더보기
허수경 -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 시를 읽다보면 또, 또, 또냐? 또 '사랑'이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대개의 좋은 시는 서정시고, 서정시는 곧 연애시고, 연애시는 곧 '사랑'에 대한 시이다. 사랑을 많이 체험해야만 좋은 시를 쓴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사.. 더보기
김경미 - 바람둥이를 위하여 바람둥이를 위하여 - 김경미 1 걷지 못하는 민들레가 바람을 만나니 걷잖아 탁 ! 터져서 간음 없는 마음이 흔하랴 그런 거야 욕하지 마 바람둥이들 한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2 욕하지 마 먼지처럼 어디에나 몸을 묻히는 마음 아세톤처럼 어디에서나 쉽게 마음 휘발되는 몸의 사랑 고단하게 귀한거야 * '바람둥이'란 말은 치욕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김경미 시인은 그 고단함을 아는 모양이다. "한 번 누운 곳 정 못 들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단잠 못 이루는" 바람둥이는 어쩐지 바그너의 오페라 같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아니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히 지상에 오를 수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떠돌이가 되어 폭풍우치는 바다 위를 떠돈다. 누군가에겐 .. 더보기
이병률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이병률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헌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 줄 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 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 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 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어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 보아라 * 누군가는 내게 엉엉 소리내어 당신의 슬픔을 보여주고, 간다... 더보기
도종환 - 산경 산경 - 도종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 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 불혹이 될 때까지 살아보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산'과 '강'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산은 그저 그곳에 있게 하면 되고 강은 그저 흘러가도록 하면 된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니 내가 산에 가는 것이오 강이 멈추지 않으니 내가 강을 따라 함께 가면 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더보기
공광규 -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공광규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더보기
김선우 - 낙화, 첫사랑 낙화, 첫사랑 -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T.S. 엘리어트는 "시의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정의는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문학에 있어 '.. 더보기
김혜순 - 잘 익은 사과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 김혜순 시인의 "잘 익은 사과"는.. 더보기
문태준 -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 문태준 끔찍하다 조그맣게 모인 물속 배를 내 눈앞처럼 달고 올챙이가 헤엄치고 있다 아주 어둡고 덜 어두울 뿐인 둥근 배 속 다리 넷이 한테 엉겨 있다 한 통이다 한 통이 통째로 움직인다 마음 가면 마음이 전부 간다 속으로 울 때 손발이 모두 너의 눈물을 받아준다 너의 몸을 보고 내 몸을 보니 사람이 더 끔찍하다 팔을 밀어넣고 나의 다리를 밀어넣어 저 원적(原籍)으로 돌아갔으면 둥근 배 속 아직은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이별이라는 말에 태동(胎動)이 있기 전 출처 : 현대문학, 2007년, 9월호 * 남진은 란 노래에서 목놓아 노래 부른다. "다앙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것을"이라고... 바다야, 이별이 있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으련만 대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