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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천상병 - 내가 좋아하는 여자 내가 좋아하는 여자 - 천상병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으뜸은 물론이지만 아내이외일 수는 없습니다. 오십 둘이나 된 아내와 육십살 먹은 남편이니 거의 무능력자이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이 시 쓰는 시간은 89년 5월 4일 오후 다섯시 무렵이지만요. 이, 삼일 전날 밤에는 뭉클 뭉클 어떻게 요동을 치는지 옆방의 아내를 고함 지르며 불렀으나, 한참 불러도 아내는 쿨쿨 잠자는 모양으로 장모님의 "시끄럽다, 잠 좀 자자"라는 말씀 때문에 금시 또 미꾸라지가 되는 걸 필자는 어쩌지 못했어요. * 천상 시인, 천상 병자, 천상 병신.... 궁상맞기로 둘째 가라면 설운 시인. 천상병의 이름 석자 중에서 '천상'을 따서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천상병을 연상하면서 이 병신 같은 독자(혹은 '~들은')는 무.. 더보기
이상은(李商隱) - 무제(無題) 無題 李商隱 相見時難別亦難 東風無力百花殘 春蠶到死絲方盡 蠟燭成灰淚始乾 曉鏡但愁雲鬢改 夜吟應覺月光寒 蓬山此去無多路 靑鳥殷勤爲探看 서로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이별 또한 쉽지 않고 동풍도 힘이 없으니 모든 꽃들도 시들어 버렸네. 봄누에는 죽을 때에 이르러서야 실을 다하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오. 새벽에 거울을 대하고는 머리칼이 희어짐을 염려하고 밤에 시를 읊고서 달빛이 차가움을 느낀다오. 님 계신 봉래산이 여기서 그리 먼 길이 아니니 파랑새야, 나를 위해 살며시 찾아가 주려무나. * 예전엔 비가 내리는 날이면, 회색 도시의 골목 모퉁이를 돌아 처마 끝에서 빗줄기 피하는 상상을 많이 하였는데, 어느날부터인가 비오는 날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사 어귀 잎사귀 커다란 오동나무 어드메쯤 앉아서 빗소.. 더보기
신동엽 - 진달래 산천 진달래 산천 -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 더보기
파블로 네루다 - 점(點) 점(點) - 파블로 네루다 슬픔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고 피 흘리는 슬픔에 견줄만한 우주는 없다 * 때로 시는 .... 이렇다.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지만 가슴을 푹 찌른다. 더보기
조정 - 안좌등대 안좌 등대 - 조정 걸어서 물 위로 오 리쯤 가는 길에 그가 있다 고집 센 사랑니처럼 별 쓸모도 없는 안도나 휴식이나 평화나 위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면 주전자에 물 끓여놓고 그와 마주 보는 창가에 차까지 한 통 내려놓고 앉지 말아야 하는데 알면서도 빚진 여자처럼 그 앞에 앉는다 그는 빚이 없다 아쉬울 때만 저를 알은체하는 배들을 위해 밤마다 불을 켜고 나팔을 부우우 불어 다 갚았다 * 조정, 이발소 그림처럼, 실천문학, 2007 좋은 시는 가만히 앉아서 천리를 보여준다. 사방이 어둡기만 한 10월의 마지막 밤에 나는 안좌등대 옆에 있다. 그는 지금도 부우우 나팔을 불고 있다. 아쉬울 때만 저를 알은 체 하는 배들을 위해 그는 이 밤도 쉴새없이 눈알을 굴린다. 알고 있는가? 사랑.. 더보기
김광규 - 달팽이의 사랑 달팽이의 사랑 - 김광규 장독대 앞뜰 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 달팽이 두 마리 얼굴 비비고 있다 요란한 천둥 번개 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 여기까지 기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 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 움직이지 않는 속도로 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 이제 몸을 맞대고 기나긴 사랑 속삭인다 짤막한 사랑 담아둘 집 한칸 마련하기 위하여 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 날 때부터 집을 가진 달팽이의 사랑은 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 이제 내년 4월이면 아내와 한집살이, 한몸살이 한 것이 만 4년이 된다. 서로 30여년 가차이 다른 환경, 다른 인생을 살아왔으나 우리는 또 얼마나 가깝고도 먼 사이냐? 시인 김광규는 사랑, 그것도 부부관계, 살림살이, 집을 달팽.. 더보기
장정일 - 충남당진여자 충남당진여자 - 장정일 어디에 갔을까 충남 당진여자 나를 범하고 나를 버린 여자 스물 세 해째 방어한 동정을 빼앗고 매독을 선사한 충남 당진여자 나는 너를 미워해야겠네 발전소 같은 정열로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그녀를 나는 미워하지 못하겠네 충남 당진여자 나의 소원은 처음 잔 여자와 결혼하는 것 평생 나의 소원은 처음 안은 여자와 평생 동안 사는 것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 처음 입술 비빈 여자와 공들여 아이를 낳고 처음 입술 비빈 여자가 내 팔뚝에 안겨 주는 첫딸 이름을 지어 주는 것 그것이 내 평생 동안의 나의 소원 그러나 너는 달아나 버렸지 나는 질 나쁜 여자예요 택시를 타고 달아나 버렸지 나를 찾지 마세요 노란 택시를 타고 사라져 버렸지 빨개진 눈으로 뒤꽁무늬에 달린 택시 번호라도 외워 둘 걸 그랬.. 더보기
정양 - 토막말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면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문학을 아름다운 우리말의 보고(寶庫)이자 보루(堡壘)라고들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자어를 쓰고 있구나). 때때로 나는 문학, 특히 시(詩)를 빙산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것은.. 더보기
파블로 네루다 - 마음 아픈 낮 마음 아픈 낮 - 파블로 네루다 헤아릴 수 없는 수난과 잿빛 꿈을 가진 창백한 겉옷을 입는다. 틀림없는 수행원. 혼자서 살아가는 쇠의 바람, 배고픔이라는 옷을 입은 하인. 나무 밑의 시원함 속에서, 꽃들에게 자신의 건강을 전해주는 태양의 정수 속에서, 황금 같은 내 피부에 쾌락이 찾아오면, 호랑이의 발을 가진 산호 유령인 당신, 장례의 시간, 불타는 결합인 당신, 내가 사는 이 땅을 정탐한다, 약간은 떨고 있는 당신의 달빛 槍을 가지고. 그 어느 날이건 텅 빈 정오가 지나가는 창문은 날개에 풍성한 바람을 갖게 되는 법. 광풍은 옷을 부풀리고 꿈은 모자를 부풀리고, 절정에 달한 벌 한 마리 쉬지 않고 타오른다. 그런데, 그 어떤 예기치 못한 발자국이 길을 삐걱대게 할까? 음산한 역의 저 증기는, 해맑은 저.. 더보기
오규원 - 한 잎의 女子 한 잎의 女子 - 오규원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의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 세상의 모든 시는 기본적으로 연애시이고, 연애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소위 참여냐, 비참여냐, 순수냐, 참여냐로 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