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 이성부



섬 하나가 일어나서
기지개 켜고 하품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느냐.
바다 복판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리움만 먹고
숨죽이며 살아남던 지난 십여년을,
파도가 삼켜버린 사나운 내 싸움을,
그 깊은 입맞춤으로
다시 맞이하려 하느냐.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

오래전 어느 시절 나는 내 삶에도 노래처럼 어떤 음계가 있다면
그것은 국악 장단 중에서도 가장 느리게 흘러간다는 진양조 장단에
발맞춘 슬픔이 아닐까 결론짓고 홀로 힘없이 미소지은 적이 있었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호흡과 리듬을 타고 난다면
나는 아마도 진양조 늦은 장단에 내 삶을 맞추고 싶었다.
내 삶은 언제나 손아귀에 가득 쥔 모래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 쉽고 빠르게 새어나가버리는 듯 했으니까.
그리하여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 흐름에 맞춰 날 적응시키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 삶의 기본은 '서글픔'이란 걸 알게 되었다.

태어난 것이 서러워 울었고
사랑받지 못하는 삶이 서러워 울었다.
파도처럼 매일의 삶이 울음이었다.
간신히 두 발로 선 뒤엔 쓰러지지 않으려 살았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강인하다거나 인내심이 많다거나
매사에 눈치 빠르게 잘 적응하며 살아간다 했으니 나는 서글펐다.

"그대,
무슨 가슴으로 견디어 온
이 진흙투성이 사내냐 !"

그래서 나는 이 구절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진양조의 삶을 꿈꾸었으나 내 삶은 언제나 휘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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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 안나 아흐마또바
(Anna Akhmatova, 1889-1966)


내 앞에는
저녁의 비스듬한 길이 놓여 있네
어제는 사랑에 빠진 채
"잊지 말아요" 속삭이던 사람
오늘은 다만 바람소리뿐
목동들의 외침과
맑은 샘가의
훤칠한 잣나무뿐


*

어제는 사랑에 빠져 행복했던 사람
그 사람이 사라진 뒤의 나에겐 저녁의 비스듬한 길이 있을 뿐이다.
사랑은 '침묵'이 아니라 '대화'로 이루어진 탓에 사랑은 말의 연금술사이자 말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비스듬한 길을 걸어 나조차 사라진 뒤에도, 모든 말들이 허공으로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맑은 샘가의 훤칠한 잣나무는 남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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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승려란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인연(因緣)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대오각성(大悟覺醒)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자를 말한다. 태어남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생 한 번의 커다란 사건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하지만 무수한 윤회를 반복해도 도를 깨우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또 다시 무수한 인연의 덕을 쌓아야만 가능하다. 한 번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도 어렵건만 도를 깨우쳐 윤회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대오각성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번뇌를 깨뜨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는가.


그런데 시인은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라고 한다. 시인의 욕심이다. 하지만 그래서 시인이다. 모든 걸 초탈한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을 지상에 유배된 자들이라 부른다. 지옥 같은 현실로 유배된 지장보살의 현신쯤 되는 자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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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제림



   꽃 피우려고 온 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가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 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 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동네 어귀에서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걷는 아줌마를 본 적이 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아줌마 저 배에 들어있는 게 뭔지 몰라 저 아줌마는 뭘 먹었기에 저리 배가 나왔을까 했다. 그때는 그 뱃속에 끝없이 이어진 기나긴 탯줄의 길, 가도가도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 숨막히는 미로를 뚫고 나올 꽃 같은 우주를 품고 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길 위의 인생들이 만나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 걸 미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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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女僧)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말이 담고 있는 정경이 구구절절하게 아프고, 아프다. 머리 깎은 여승이 속세에서 겪은 삶의 내력이 한 편의 짧은 시에 모두 담길 수 있을까? 아마도 삶의 이러한 면, 저러한 면을 사려 깊게 살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가 보여주는 몇몇의 정경 그 너머에 있을 삶의 저 편이 보일 것이다.

시의 감동은 보이는 속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저 편에서 온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읽는 것은 내 안에 등불 하나 밝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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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꽃 진 자리

-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

"풀꽃"의 시인 나태주의 시들은 따사롭다. 얼핏 생각없이 바라보는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따사롭기 그지 없어 예쁘기만 한 시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그의 따사로운 시어들을 곰곰이 씹고 있노라면 따사롭기 그지없는 시가 담고 있는 정신의 한 편은 고통을 참아내는 강인한 인고(忍苦)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을 가졌는데 누군가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 꽃 옆에서 무심히 중얼거린다는, 얼핏 읽노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안타깝게 여기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만 읽기 쉽다. 그러나 첫 번째 행과 아홉 번째 행에서 반복되고 있는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는 내용적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앞서의 말과 뒤에서 반복되는 말 사이엔 시간적 간격이 크다.

첫 번째 행에서 시인의 사랑 고백을 듣는 산수유는 아직 춥고, 쌀쌀한 바람이 피는 3월 초봄에 남들보다 이르게 피어난 산수유 꽃이지만 아홉 번째 행 이후 등장하는 산수유는 볕좋은 봄날과 뜨거운 여름 한철을 보내고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무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산수유이기 때문이다. 겨울의 차가운 한기가 미처 떠나지 않은 황량한 산야에서 누구보다 먼저 피어나는 산수유는 샛노랗다.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대부분 아직 차가운 날씨에 행동이 굼뜨기 마련인 곤충들을 유혹해 수분을 유도하기 위해 노란 빛을 띈다는데 해마다 춘삼월, 깊은 계곡 시냇가는 아직도 얼어붙어 있는 그 계절에 남도땅으로부터 들려오는 산수유 소식으로부터 우리는 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안다.

개나리가 피어날 때쯤 꽃이 지고, 여름엔 잎만 무성하게 피었다가 우리 모두가 산수유 꽃이 피고 지었던 사실조차 기억에서 잊혀져갈 무렵에야 석조(石棗ㆍ돌대추)라는 별명처럼 작은 대추모양의 예쁘고 빨간 열매가 산수유 꽃 진 자리마다 알알이 맺힌다. 봄의 전령으로 남들보다 훨씬 일찍 꽃을 피웠던 산수유가 절기상 첫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지나서야 열매를 맺는다. 상강이란 절기는 가을도 다가고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되어 나뭇잎들도 떨어질테니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라는 절기다. 서리는 입춘(入春) 지나고도 여든 여덟 번의 밤낮이 바뀌고서야 '이별서리'로 그친다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추위에 얼어죽지 않고 버티다가 다시 꽃을 피우는 것이 산수유나무다.

요즘 세태가 하도 급해서 연인끼리의 사랑도 1000일은 커녕, 100일도 안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풍속도이라고 한다. 성미급한 사람들은 100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만난지 10일, 20일만 되어도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요즘 우리네 사랑 풍습이라고 하는데 산수유는 그래서 기다림의 나무다. 산수유의 꽃말이 '지속ㆍ불변'인 까닭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산수유 꽃 진 자리에 빗대어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랑을 찬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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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Light)

   
- 프랜시스 W. 부르디옹(Francis W. Bourdillon, 1852-1921)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
     The day but one;
Yet the light of the bright world dies
     With the dying sun.

The mind has a thousand eyes,
     And the heart but one;
Yet the light of a whole life dies
     When its love is done.
 

밤엔 천 개의 눈이 있고
     낮엔 오직 하나가 있지
하지만 밝은 세상의 빛은 해가 지면
      사라지고 말아

정신엔 천 개의 눈이 있고
     가슴엔 오직 하나가 있지
하지만 온 생명의 빛은 사랑이 꺼질 때
     사라지고 말아
 

* 제목이 The Night Has a Thousand Eyes로도 알려져 있다.

** 가끔 영 어색하긴 하지만 외국시를 외국어로 낭송하는 것이 듣고 싶어질 때가 있다. 시가 본래 노래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인간의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라는데 외국어로 된 시는 외국어로 낭송되는 것을 듣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노래를 듣고 싶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1년쯤 전에 평화박물관 연말 송년식 자리에서 일본인 친구들이 미야자와 겐지의 "바람에 지지 않고"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갈아 낭송하는 것을 들으면서 어쩐지 그 기대가 깨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 지나치게 개구진 친구들이었기에 낭송의 감동이 좀 덜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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乍晴乍雨

- 김시습(金時習)

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예아변응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
花門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
寄語世人須記憶 取歡無處得平生
(기어세인수기억 취환무처득평생)

갰다가 비가 오고 비 오다가 다시 개이니,
하늘의 도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정이랴.
나를 기리는 사람 문득 돌이켜 또 나를 헐뜯을 터,
공명을 피하더니 저마다 또 공명을 구하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봄이 어찌 상관하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을 산이 무엇을 다투랴.
세상 사람들아 내 말 새겨들으시라,
즐겁고 기쁜 일 평생 가지 않나니.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지은 "사칭사우"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변덕스러운 날씨"쯤 될 것이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통곡하며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온갖 기행을 일삼으며 살아갔던 김시습이다. 어릴 적 읽었던 김시습의 위인전에서 기억에 남았던 일화가 있는데, 김시습의 나이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널리 소문이 나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갈 정도였다.

세종은 김시습을 친히 궁으로 불러들여 어린 신동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그의 지혜를 살핀 뒤 크게 만족해 상으로 비단 몇 필을 내려 주었다. 세종은 어린 신동에게 상을 내려주는 대신 어른의 도움 없이 홀로 비단을 집으로 가져가도록 했는데, 진짜 시험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린 김시습은 비단을 풀어 자신의 허리에 묶고는 집까지 비단을 끌고 돌아가니 세종이 이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경탄했다는 이야기이다.

공자께서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힘써 구하는 자(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스스로를 낮춰 겸양을 표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혜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깃드는 것이란 의미에서 공부를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어쨌든 '나면서부터 아는 것(生而知之)'라면 '배워서 하는 것(學而知之)'인데 주자는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라야 이처럼 나면서부터 아는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임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생지지질(生知之質)'이라 했다. 그런데 조선 역사상 이처럼 '생지지질(生知之質)'로 일컬어진 단 한 명이 바로 김시습이었다.

태어난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깨우칠 만큼 천품이 탁월해 임금도 친히 관심을 기울일 정도이긴 했으나 세종이 친히 김시습을 불러 시험을 치르게 했다는 이야기는 민간의 설화가 부풀려진 듯 싶다. 세종은 민간에 널리 퍼진 김시습의 천재성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혹시라도 어린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두려워 지신사 박이창을 시켜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이를 확인토록 했을 뿐이며 박이창의 보고를 받은 뒤 "내가 친히 그 아이를 불러보고 싶으나 일반 백성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 그러니 그 가정에 권하여 잘 감추어 교양을 쌓도록 하고 그가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치 크게 쓰리라"는 전교를 내렸다 한다. 그러나 김시습의 나이 21세 때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문을 굳게 닫아 걸고 나오지 않은지 3일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이후 미친 척하며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노릇을 하며 살았다.  

비록 이 시에서 김시습은 관조달통(觀照達通)한 듯한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매월당이 이후 살아온 삶의 내력을 조목조목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어떤 이는 편벽이라고도 하던데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는 아무리 가난하여도 무엇이건 빌리지 않았고 남이 주어도 받지 않았으며 자신을 찾아오는 이에게 물어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아주 즐거워했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그 속에는 다른 배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썹을 찡그렸다고 한다. 얼핏 세상사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또한 자신이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봉건시대의 정치체제란 왕이 곧 체제인데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세조와 그 후손이 집권하는 것은 김시습에게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체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이 체제를 뒤집을 만한 권력이나 의지가 있었던 것 또한 아니었기에 그는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체제의 외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는 그것을 상상하게 된다. 아마도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는 이와 같은 그의 상상이 빚어낸 체제의 바깥, 어디쯤이었으리라. 쓸쓸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시습, 그의 나이 59세에 무량사에서 입적했으나 그는 죽음 뒤에도 여전히 색다른 사람이었다. 화장을 거부한 탓에 몇 해 동안 절 옆에 안치해두었는데 3년후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도 생시와 다름 없는 안색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죽음 이후에 부처가 되었다고 믿어 화장하였는데 이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만들어 세우고 그의 풍모와 절개를 기렸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시습에게 이조판서가 추증되고, 청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그것이 김시습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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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핀 가을꽃

- 강영환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마른 눈을 들어 들어서
안간힘으로 버텨선 흔들림으로
가을꽃이 피었다
먼 원시림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건강한 뼈대
자갈밭에 내려 쌓이는
수천의 빛 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로이 홀로 서서
말라비틀어진 이 계절의 중심에서
억센 근육을 부러뜨려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


[출처] 칼잠, 시로사(1983)


*

"여름에 핀 가을꽃"은 강영환 시인의 등단작이자 첫 시집 칼잠에 수록된 시인데 아쉽게도 시집 자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에는 "때도 없이 가을꽃이 피었다"란 구절이 첫 행과 마지막 행에서 반복(5행에서도 축약된 형태로 '가을꽃이 피었다'가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5행 이전에 피어난 가을꽃은 자갈밭으로 난 작은 길 위에 피어난 현실 속의 가을꽃이지만 5행 이후에 피어난 가을꽃은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심상에 피어난 꽃이기 때문이다. 수천의 빛무리를 넘어뜨리며 위태롭지만 굳건하게 피어난 꽃이다. 철모르고 여름에 핀 가을꽃.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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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


요즘 시인들은 왜 달에 대한 멋진 시 하나 토해내지 않는 건지. 제가 가장 마지막에 주목했던 소설가는 "마루야마 겐지"였습니다. 이 말은 최근엔 소설을 읽지 않는 제 현실의 문제이죠. 어쨌거나 그의 소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는 참 특이한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낡은 오토바이를 사서 한계령도 넘고, 한반중에 동해안 모래 사장도 달려보고 싶었지만 울애인이 다른 건 다 되어도 그것만큼은 허용해줄 수 없고 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김사인의 이 시를 읽고난 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이 한창 때 연애 좀 하지 않았을까. 저는 마지막 행에 가서 폭발하는 시를 좋아하는 편인데, 김사인의 <늦가을>은 특히 첫 구절이 매력적입니다.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라는 구절 말이죠. 시에서 노래하는 대상은 불혹을 넘긴 중년의 여성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남과 북을 모두 통틀어 고달프기 마련입니다(예전에 <북한의 여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란 책을 읽었는데 남한에 비해 반드시 평등하다고 말할 순 없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간 시인은 늦가을을 불혹을 맞은 여성에 비유한 건지, 불혹을 맞은 여성을 늦가을에 비유한 건지 몰라도 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긴 있어 보입니다. 늦가을. 9월에서 11월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면, 늦가을은 11월에 해당하겠죠.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에 숲속에 가보셨나요. 11월의 가을 숲속은 추워요. 술먹고 그런데서 잠들었다간 입 돌아가기 딱이죠. 오한이 들죠. 바람도 차갑고... 그런 적막천지 한밤중에 머리를 감는 여자.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외롭다는 감정은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어젯밤엔 갑자기 잠이 안 오더군요.


잠자리에 든 아내를 깨워 자유로라도 나가보자고 꼬셨습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자정 무렵... 문득 여전히 달이 내 뒤를 쫓는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그냥 자자고 쿨쿨... 잠이 오지 않아 부대끼는 밤에 문득 일산 가던 길에 내 뒤를 쫓던 커다란 달이 그리웠어요. 사랑은 어느덧 늦가을에 접어들어 오한이 들고, 주춤주춤 고무신을 옮겨보아도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지요. 잠도 오지 않는 밤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뭅니다. 이유야 어쨌거나 다음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내일모레 불혹을 바라보는 사내가 창 밖을 바라봅니다.


늦가을엔 정말 쓸쓸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이가 들 수록 나의 세상은 깊어지겠지만 그 세계에 깃드는 사람이 없으면 참말 쓸쓸할 거예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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