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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SY

이기철 -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 이기철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 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 넝마 같은 삶이다. 헌옷이 된 생을 다시 펴서 주름없이 다림질하고 싶어지는 삶이란...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설.. 더보기
이하석 - 구두 구두 - 이하석 풀덤불 속에 입을 벌리고 누워 구두는 뒷굽이나마 갈고 싶어한다, 풀들 속으로 난 작은 길을 가고 싶어하며, 어디로든 가 버릴 것들을 놓아 주면서. 주물 공장 최 반장은 토요일에 그를 차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최씨의 바지 밑으로 그는 끈이 풀렸고 뒷굽이 너무 닳아 있었다. 일년 가까이 그는 벌겋게 달아 있었다, 술과 불이 어울어진 최씨의 온몸 밑에서. 내던져진 채 그는 이제 가고 싶은 곳을 잊었다, 최씨의 여자 속을 걸어가는 허약한 다리 대신 차가운 빗물을 맑게 담고서. 문득 흐르던 구름 하나가 구두 속에 깃들어 어디론가 가자고 한다. 그래도 최씨의 구두는 뒷굽에 매달린다. * 처음부터 내 닉이 바람구두로 안착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대학 때 별명이었고, 뒤늦게 인터넷을 시작하다보니 적당한.. 더보기
이문재 - 푸른 곰팡이 푸른 곰팡이 -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혹은 '템푸스(Tempus)'로 구분될 수 있다. 크로노스는 객관, 물리적 의미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주관, 감정적 의미의 시간, 다시 말해 시간을 감지하는 자신이 의미를 느끼는 절대적 시간이다.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족들은 사사(sasa.. 더보기
김선우 - 목포항 목포항 -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팎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 시인 김선우. 이름만 들어선 시인이 성별(性別)이 쉽게 구분되지 않지만, 그녀의 .. 더보기
임현정 - 가슴을 바꾸다 가슴을 바꾸다 - 임현정 한복저고리를 늘리러 간 길 젖이 불어서 안 잠긴다는 말에 점원이 웃는다. 요즘 사람들 젖이란 말 안 써요. 뽀얀 젖비린내를 빠는 아기의 조그만 입술과 한 세상이 잠든 고요한 한낮과 아랫목 같은 더운 포옹이 그 말랑말랑한 말 속에 담겨 있는데 촌스럽다며 줄자로 재어준 가슴이라는 말 브래지어 안에 꽁꽁 숨은 그 말 한바탕 빨리고 나서 쭉 쭈그러든 젖통을 주워담은 적이 없는 그 말 그 말로 바꿔달란다. 저고리를 늘리러 갔다 젖 대신 가슴으로 바꿔 달다. 임현정,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통권 143호)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詩)에서 꽃의 실.. 더보기
김은경 - 뜨거운 안녕 뜨거운 안녕 - 김은경 목욕탕에서 때를 밀다 속옷을 갈아입다 상처에 눈 머무는 순간이 있지 훔쳐봄을 의식하지 않은 맨몸일 때 가령 상처는 가시라기보다는 빨강 도드라진 꽃눈일 텐데 눈물로 돋을새김 한 천년의 미소래도 무방할 텐데 어디에 박혔건 내력이야 한결같을 테지만 죽지 않았으니 상처도 남은 것 그리 믿으면 더 억울할 일도 없을까 오래전 당신은 내게 상처를 주었고 나는 또 이름 모를 그대에게 교환될 수 없는 상처를 보냈네 403호로 배달된 상처 한 상자를 대신 받은 기억 있고 쓰레기 더미 속 상처를 기쁘게 주워 입기도 했네 지나갔으니 이유는 묻지 않겠어 당신 왜 하필 내게 상처를 주었는지 하지만 얇은 유리 파편으로 만든 그 옷 내게는 꽉 끼었지 그래 나는 아팠었지 천진한 햇살마저 나는 조금 아팠겠지 이제.. 더보기
정우영 - 초경 초경 - 정우영 아직 봄이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저녁나절이었다. 허접한 눈으로 헌 신문 뒤적거리고 있는데, 여든 넘은 어머님이 불쑥 물으신다. 자네는 봄이 뭐라고 생각하나? 봄이요? 해 놓고 답변이 궁색하다. 아지랑이야. 눈부터 뽀얀 아지랑이 속에 빠져들며 어머님 스스로 대꾸했다. 내가 양지뜸에서 나물 뜯고 있던 열세 살 때야. 초록 아지랑이 가 다가와 속삭이더니 나를 살짝 휘감아선 날아가는 거야. 난 어 쩔 줄 몰라 아지랑이 꽉 붙잡고 있었지. 아지랑이는 한참을 날아 산등성이에 나를 내려놓았어. 그러고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초록 저고리를 슬근 벗어 걸어 두는 것인데, 요상도 해라. 그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초록 싹이 돋는 거야. 깜짝 놀란 난 하초를 지렸는 데 초록 물이 배어 나왔어. 초경이야. 그 후로는.. 더보기
나태주 - 지상에서의 며칠 지상에서의 며칠 - 나태주 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 줌이었다가 바람 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사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 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 사람들은 누구나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슬픔.. 더보기
이병률 -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 - 이병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쳤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 그(녀)에게 갔던, 그(녀)에게 향했던 무수한 발 걸음, 말없이 되돌아 서야 했던, 거절당했던 막다른 벽에 버티고 서서 간신히 삶을 추어올리고 되돌아서야 했던 그리하여 말도 못하고 '음' 한 마디로 되돌아서야 했던 .. 더보기
고정희 - 강가에서 강가에서 - 고정희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 유유히 내 생을 가로질러 흐르는 유년의 푸른 풀밭 강뚝에 나와 물이 흐르는 쪽으로 오매불망 그대에게 주고 싶은 마음 한 쪽 뚝떼어 가거라, 가거라 실어 보내니 그 위에 홀연히 햇빛 부서지는 모습 그 위에 남서풍이 입맞춤하는 모습 바라보는 일로도 해저물었습니다 불현듯 강 건너 빈 집에 불이 켜지고 사립에 그대 영혼 같은 노을이 걸리니 바위틈에 매어놓은 목란배 한 척 황혼을 따라 그대 사는 쪽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 문득 인생이 허망하다. "할 말이 차츰 없어지고 다시는 편지도 쓸 수 없는 날이 왔습니다."라고 시인이 적어놓은 싯귀를 그대로 옮겨 적으며 이것이 내게 하는 말 같다. 나는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힘주.. 더보기